3화
허약한 몸 때문에 사교계에 자주 얼굴을 비치지 않는 클라우스 공작에게도 찾아오는 손님들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드넓은 정원을 가로지른 화려한 마차가 멈추고 문이 열리자, 문 앞까지 마중을 나와 있던 호즈만 집사장이 직접 공작의 손님들을 맞았다.
“레이넌 대공 전하, 어서 오십시오.”
“오랜만이오, 호즈만. 자네 왠지 살이 빠진 것 같군. 다른 건 몰라도 몸 축나는 건 주인 닮으면 안 되지.”
베르데사 왕국을 다스리는 레이넌 왕의 조카인 에른스트는 유일하게 대공의 작위를 가진 인물이었다. 금색 머리카락에 총기 있는 유록색 눈동자, 훤칠한 키까지 더해져 그야말로 동화책에서 갓 뛰쳐나온 왕자 같은 외모였다.
“마차들이 도착해 있던데, 내가 제일 늦은 모양이군?”
“란츠호프 후작 영애와 드라인 남작가의 도련님께서도 도착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식당까지 가는 데에는 호즈만의 안내도 따로 필요가 없었다. 에른스트는 마치 제집인 양 경쾌한 걸음걸이로 복도를 걸어 식당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먼저 도착해 있던 두 명의 손님, 릴리엇 란츠호프와 페터 드라인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상석에 앉아 있던 클라우스의 입가가 삐뚜름하게 올라간 찰나, 에른스트가 먼저 선수를 쳤다.
“딱 적당한 시간에 온 것 같지?”
클라우스의 왼쪽에 앉아 있던 란츠호프 후작의 딸인 릴리엇이 곱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적당한 시간은 무슨? 또 지각이잖아요.”
에른스트는 대공이라는 지위가 무색해질 만큼 가볍게 키들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릴리엇의 옆자리에 앉았다.
“후작 영애께서 배가 많이 고프셨던 모양인데?”
“릴리엇만 그런 게 아냐. 나도 뱃가죽이 등에 붙을 지경이라고.”
맞은편에 앉은 페터 드라인이 투덜거렸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결코 할 수 없을 말과 행동이었지만, 비스몽트 공작가에서 단 네 명이 모일 때만큼은 달랐다. 작위도, 성별도, 성격도 제각기 다른 이들 사이를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음번에 또 지각하면 에른스트 당신만 빼고 우리끼리 식사할 거예요.”
릴리엇이 뾰로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벌써 스물이 넘은 나이임에도, 밀빛 머리카락을 소녀처럼 가닥가닥 꼬아 모양을 낸 탓에 남자들보다 서너 살은 어려 보여 여동생 같았다.
에른스트도 투정을 부리는 여동생을 보는 듯한 눈으로 릴리엇을 쳐다보았다.
“날 빼고 식사를 시작하면 결국에는 릴리엇 너와, 페터 녀석만 먹게 되는 꼴이잖아. 클라우스는 한 입씩만 먹고 스푼을 놓아 버리니까.”
“내 입이 짧은 걸로 대공께서 불만을 가지실 줄은 몰랐는데.”
클라우스가 비꼬듯이 말했음에도 에른스트는 여전히 유쾌한 표정으로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하도 어렸을 때부터 알던 사이인지라, 이 정도 놀림이 오가는 것쯤이야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이다.
때마침 시종들이 테이블을 준비하러 들어왔다. 가벼운 식전주가 한 잔씩 돌아갔을 때, 흰 제복을 차려입은 아체리아가 시종들과 엇갈리듯 식당으로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비스몽트 공작가의 수석 요리장인 아체리아 클링입니다.”
클라우스를 제외한 세 사람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떠졌다. 어릴 때부터 교류한 사이였으므로, 공작가의 주방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자란 아체리아에 대해서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심술궂은 짓을 곧잘 하는 페터마저도 아체리아가 수석 요리장이 된 사실에 순수하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게 누구야? 우리 빨강 머리 아가씨 아니신가. 잠시 못 봤다고 갑자기 이렇게 승진을 하시는군.”
“에른스트! 제발 그 상스러운 호칭 좀 그만둘 수 없어요? 아체리아를 빨강 머리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어, 왜? 아주 불타는 단풍 같은 빨강 머리야말로 아체리아 그 자체라고. 질투가 나면, 릴리엇 너도 노란 머리라고 불러 줄까?”
“에른스트!”
결국 식탁 밑에서 퍽, 하고 뭔가 걷어차이는 소리가 나고야 말았다. 에른스트가 과장스레 아픈 시늉을 하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페터가 고소하다는 듯이 낄낄 웃었다. 대체로 냉랭한 표정밖에 짓지 않는 클라우스조차도 에른스트의 익살에는 헛웃음을 쳤다.
그사이 시종들이 수프를 내왔다. 식탁에 앉은 손님들은 모두 스푼을 들지도 않고 아체리아를 먼저 쳐다보았다. 손님으로 공작가를 드나든 것이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보니, 클라우스가 식사를 할 때는 수석 요리장이 메뉴에 대한 설명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체리아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들 때문에 표정 관리를 하기가 힘들었다. 심지어 제일 중요한 한 사람, 클라우스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수프만 보고 있는 것이 거슬렸다.
‘생각 같아서는 확 굶겨 버리고 싶다니까, 정말.’
그녀는 어깨를 쭉 펴고 목소리를 살짝 가다듬었다.
“두 가지 종류의 치즈를 넣은 수프입니다. 양파와 닭고기를 함께 넣고 오랜 시간 끓여 감칠맛이 나도록 했습니다. 셰리 와인을 넣어 식전에 맞게 산뜻한 풍미를 느끼실 수 있도록 했으며, 자극적인 향신료는 사용하지 않아 부담 없이 드실 수 있습니다. 빵을 찍어 드셔도 좋지만, 첫술은 수프만 맛보시는 것을 권해 드립니다.”
아체리아의 설명을 듣는 동안 에른스트나 페터는 물론, 후작가 영애인 릴리엇마저도 먹고 싶어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아체리아가 입가에 미소를 띠며 고개를 숙이자, 세 사람은 일제히 수프를 떠먹고는 저마다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양파로 끓인 수프는 다 맛없는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아체리아를 대공가로 빼돌려야 할까 봐.”
“아체리아가 물건인 줄 알아요? 에른스트도 참.”
“아니, 넌 왜 아체리아 편만 드는 거야?”
“내가 릴리엇이라도 너보다는 클링 양의 편을 들 것 같은데?”
페터까지 릴리엇을 거들자 에른스트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클라우스, 너까지 입 다물기야? 내 편은 아무도 안 들어주는 거냐고?”
“빼돌릴 것도 없이 데려가고 싶으면 오늘이라도 데리고 가. 누가 요리하든, 어차피 내 입에는 똑같이 맛없는 것들뿐이니까.”
클라우스의 말에 떠들썩하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잠잠해졌다. 그 와중에 아체리아만은 클라우스의 뒤에서 남몰래 눈을 부라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접시로 한 대만 때려 보면 소원이 없겠네.’
그러나 얼어붙은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뒤이어 메인 요리가 등장하자 릴리엇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미소를 띠었다.
“아체리아, 이 요리는 뭐니?”
“오리의 가슴살로 만든 스테이크입니다. 기름을 많이 쓰지 않고, 익힌 당근과 녹색 채소를 더했습니다. 꿀과 무화과, 남부 지역의 포도로 만든 적포도주를 함께 졸여 만든 소스에, 단맛이 나는 밤 퓌레를 곁들여 드십시오.”
“밤 퓌레? 이런 계절에 어떻게 밤을 구했지?”
페터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체리아는 귀 옆으로 흘러내린 빨간 머리카락을 살짝 넘기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지난 가을에 수확한 밤을 얇게 썰어 말린 다음 보관했습니다. 곱게 빻아 가루를 내면 어느 계절에든 퓌레를 만들 수 있어요.”
오리고기 스테이크는 무척 호평이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자 분위기도 화기애애하게 바뀌었지만, 아체리아의 시선은 불안한 기색을 띤 채 클라우스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클라우스는 손바닥만 한 스테이크를 고작 세 점 먹고는 식기를 내려놓았다. 손님들이 있는 데다가 레이넌 대공이 있으니 깨작대는 시늉은 하고 있지만, 누가 봐도 입맛이 다한 것임을 모를 수가 없었다.
“공작님, 곁들인 채소와 밤 퓌레를 함께 드셔 보세요. 색다른 맛이…….”
“당근은 싫어한다고 여러 번 말했잖아.”
“……공작님, 그럼 녹색 채소를…….”
“왜 이렇게 말이 많지? 그만 나가 봐. 손님들께 폐가 되니 다른 사람이 설명하도록 해.”
가장 당황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한 것은 릴리엇이었다. 원래 마음이 약하고 얌전한 그녀는 자신이 다 민망하다는 표정으로 난처한 듯 아체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체리아는 겉으로는 훌륭할 만큼 표정을 숨겼다. 물론 클라우스의 뒤통수를 한 대 쥐어박고 싶은 감정까지 억누르기는 힘들었으나, 아슬아슬한 순간에 그러쥔 주먹을 소매 속으로 숨기며 싱긋 웃었다.
“알겠습니다, 공작님.”
몸을 홱 돌려 식당을 등진 아체리아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 얼굴로 인상을 굳혔다. 그녀와 교차하듯 식당으로 걸어 들어가던 락케는 아체리아의 등을 돌아보면서 구겨진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
‘흥, 나이도 한참 어린 게 수석 요리장? 웃기지 말라고. 얀 헨릭이 하도 싸고도니 어쩌지 못하고 내버려 뒀다만, 계속 건방지게 굴면 나도 가만히 못 있지.’
* * *
귀족 가문의 후원이 대개 아름다운 꽃이나 나무와 더불어 앉아서 쉴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진 반면, 비스몽트 공작저의 후원 풍경은 여느 후원들과는 조금 달랐다.
나무들은 겨울을 제외한 모든 계절에 신선한 제철 과일을 먹을 수 있는 과수목이었다. 그중에서도 무화과와 사과, 석류나무는 매년 탐스럽고 달콤한 열매를 맺는 것으로 근처에서도 유명했다.
나무뿐만이 아니었다. 울타리를 쳐 말끔하게 다듬어 놓은 빈터에는 크고 작은 텃밭들이 가꾸어져 있었다. 클라우스의 조모인 선선대의 공작 부인이 시종들과 함께 손수 가꾼 밭으로, 공작가의 식탁에 오르는 많은 요리에 이 텃밭의 채소들이 들어갔다.
아체리아는 텃밭의 잡초를 솎아 던져 버리고는 잘 익은 순무 몇 개를 뽑아 바구니에 넣었다. 흠 없이 동그란 모양과 짙은 자줏빛이 보기에 먹음직스러웠다.
“어딜 갔나 했는데, 여기서 무나 뽑고 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