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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2)화 (2/144)

2화

저택 내부의 고용인들까지 잠든 늦은 시간에, 아체리아는 포도주를 순식간에 쭉 들이켠 뒤 탁, 소리가 나도록 잔을 세게 내려놓았다.

“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그래요!”

얀 헨릭은 느긋한 태도로 황동으로 된 잔을 기울였다. 생긴 것과 달리 주량이 약한 그는 포도주 한 잔에 이미 불콰한 얼굴이었다.

“뭐가 말이 안 된다는 거야?”

“내가 왜, 왜 수석 요리장이 돼요? 락케 씨가 나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일을 했잖아요. 게다가 그 사람은 이등 요리사고, 나는 그냥 요리사! 영감님, 이러면 소문이 이상하게 난다니까요? 손녀뻘인 여자애한테 딴마음을 품어서 편애한다고 다들 수군수군…….”

“야! 네 녀석이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도 마! 손녀뻘은 둘째 치고, 네 녀석 같은 왈패 빨강 머리에게 딴마음은 얼어 죽을 딴마음이야! 영감은 눈도 없는 줄 알아!”

“어머? 이 영감이, 진짜! 이제 곧 관 짜게 생겼다고 말씀을 아무렇게나 하시네? 내가 어때서요!”

아체리아가 따박따박 대들었다. 얀 헨릭은 기도 안 찬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며 자기 잔을 반쯤 더 채우고 말했다.

“아체리아, 이건 너한테도 기회다. 내가 네 녀석을 특별히 예뻐하는 것도 없는 말은 아니다만, 네 녀석이 그럴 만한 실력이 안 됐으면 손녀뻘이 아니라 진짜 손녀라도 절대로 이 자리에 앉힐 일은 없었어. 너, 내가 이런 일에 장난을 칠 사람으로 보이더냐?”

얀 헨릭의 눈빛이 엄격해졌다. 아체리아는 한풀 꺾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난데없는 재난을 고분고분 받아들일 마음은 없었다.

“영감님. 아니, 얀. 아무리 그래도 이건 정말 아닌 것 같아요. 음식을 만드는 일만이라면 그나마 괜찮아요. 하지만 수석 요리장이 되면 지금처럼 가끔도 아니고, 최소 반년은 공작님이 식사를 다 마칠 때까지 매일 지켜보고 있어야 하잖아요. 그래야 공작님의 입맛에 맞춘 식재료 선정이 쉬워지니까. 근데 제가 그걸 할 수 있을 거라 보세요? 한 달도 못 가서 식탁 엎어 버리고 쫓겨날 것 같지 않아요? 네?”

“먹힐 만한 협박을 해라. 콩 한쪽도 안 남기는 네가 잘도 식탁을 엎겠다.”

그건 그렇다. 아체리아는 이를 꾹 깨물며 속 터진다는 듯이 발을 동동 굴렀다.

“아체리아.”

얀 헨릭이 나직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주방에서 일을 할 때, 아래 직급의 요리사나 고용인들에게 똑바로 하라며 고함을 치던 때와는 딴판인 표정이다. 마치 할아버지가 아끼는 손녀를 보는 것 같은 다정한 시선이었다.

아체리아는 아직 불만스러운 표정이기는 했지만 얌전히 얀 헨릭을 바라보았다.

“지금의 클라우스 공작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몸이 너무 허약했다. 그래서 선대 공작 내외께서는 걱정이 많으셨지. 요양도 다녀 보고, 몸에 좋다는 것도 다 찾아다 먹여 봤지만 결국 공작님은 아직도 병약하신 상태야. 설상가상 입도 짧고 못 드시는 것도 많으니 사람이 기운이 안 날 수밖에.”

“저도 알아요. 결국 얀도 공작님의 입맛에 맞는 걸 못 만드셨잖아요. 얀 잘못이 아니라, 그 사람은 정말 심각하게 음식을 가린다니까요! 그런데 제가 어떻게 그 까탈스런 입맛을 맞춰요?”

“어려운 일이지. 하지만 다른 사람이 아닌 너니까 그걸 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아체리아는 오만상을 찡그린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여기서 쫓겨나면 전부 다 얀 탓이에요. 알겠어요?”

“그럼 내가 차린 식당으로 와라. 월급은 두둑이 쳐줄 테니까.”

* * *

베르데사 왕국의 사교계에서 ‘젊은 공작님’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사람은 딱 한 사람, 클라우스 폰 비스몽트뿐이다.

왕가의 방계로 대공령의 주인인 레이넌 대공 역시 클라우스의 또래로 젊은 축에 속하지만, ‘젊은 공작님’이라고 했을 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클라우스의 창백하고 병약해 보이는 얼굴을 떠올렸다.

클라우스가 어렸을 때 그를 호칭하는 말은 ‘어린 소공작’이었다. 주로 귀부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소곤소곤거리는 귓속말로 나오곤 하던 그 호칭에는 ‘몸이 약해 오래 살지 못할’이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었다.

그만큼 허약하고 잔병치레가 많아 그가 무사히 공작위를 승계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클라우스는 무사히 스물다섯 살을 넘기고 공작이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비스몽트 공작’보다는 ‘젊은 공작님’이라는 호칭으로 더 자주 불렸다. 물론 그 호칭 앞에 생략된 말은 있었다. 바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이었다.

“공작님, 오늘 아침 식사는 새우와 양송이버섯, 그리고 시금치가 들어간 부드러운 오믈렛을 준비했습니다.”

아체리아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젊은 공작 클라우스의 옆에서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신분이 높은 귀족들 중에는 식사를 할 때 일일이 요리사의 설명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주로 식도락을 취미로 하는 귀족들이 혀와 눈, 코뿐만 아니라 귀까지 만족하는 식사를 하기 위해 즐겨 사용하는 방법이었는데, 비스몽트 공작가에서는 그 필요가 조금 달랐다.

아체리아는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클라우스를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클라우스는 포크를 쥐기만 한 채 도무지 먹을 생각이라고는 없는 듯 고개를 삐뚜름하게 기울이고 오믈렛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시금치는 안 먹는다고 말했잖아. 그리고 버섯도 너무 흐물거려서 입맛이 달아나. 게다가, 내가 두 끼 연달아 똑같은 식재료 넣은 음식을 싫어한다는 걸 벌써 잊었나? 어제 저녁때도 호박 소스를 얹은 새우를 내놨잖아. 설마 남은 걸 다시 쓴 건가?”

‘그래, 이 자식아. 다시 썼다.’

아체리아는 부르르 끓어오르는 말을 꾸역꾸역 삼키며 입술을 꽉 물고 억지웃음을 지었다.

비스몽트 공작의 식사를 살피며 옆에서 설명을 거들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였다. 그는 가리는 음식이 너무도 많았다.

“……공작님, 저녁 식사 때 드셨던 새우와는 조금 다른 종류의…….”

“안 먹어.”

클라우스가 포크를 탁 내려놓으며 몸을 젖혔다. 아체리아는 눈을 지르감았다 뜨고는 화를 삭이기 위해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다른 것으로 준비하겠습니다.”

“아니, 됐어. 아침부터 꾸역꾸역 먹고 싶지 않아.”

그렇게 말하는 클라우스는 금방이라도 도로 쓰러질 사람처럼 피곤해 보이는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뒷짐을 진 채 서 있던 아체리아는 등 뒤로 주먹을 꾹 쥐며 말했다.

“공작님, 적게라도 매 끼니 식사를 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시면 항상…….”

“왜 이렇게 말이 많지? 이거나 빨리 치우도록 해.”

수석 요리장이 아니라 견습 시종을 부리는 것 같은 말투에 아체리아는 발끈했지만 순순히 접시를 치웠다. 하는 짓이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한들 일개 요리사일 뿐인 자신이 감히 귀족의 멱살을 잡겠는가, 뭘 하겠는가.

아체리아는 결국 이렇게 말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점심 식사는 입맛에 맞으시는 걸로 준비하겠습니다.”

* * *

“으악! 열받아!”

주방으로 돌아온 아체리아는 다른 요리사들이 화들짝 놀랄 정도로 큰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잖아도 원체 성격이 불같은지라 평소에도 시시때때로 폭발할 때가 있던 그녀였지만, 얀 헨릭이 은퇴한 후 수석 요리장이 된 이후로는 식사 때마다 주방이 조용할 날이 없었다.

“이것도 싫어, 저것도 싫어, 그것도 안 먹어. 대체 뭘 먹겠다는 거야, 그럼? 뭘 먹을 생각이 있긴 한 거야? 유니콘 뒷다리라도 구해다 삶아 주면 먹을 건가?”

또 한 번 버럭 소리를 친 아체리아는 공작이 손조차 대지 않은 오믈렛 접시를 바라보았다. 선명한 노란색이 돌도록 완벽하게 익은 달걀과, 버터를 둘러 익혀 살짝 윤기가 도는 모양이 무척 먹음직스러웠다.

아체리아는 성질이 나 씨근거리며 스푼으로 오믈렛 귀퉁이를 조금 떠서 입에 넣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이마를 턱 짚으며 어깨를 푹 숙였다.

“이렇게 맛있는데…… 그 멍청이가…….”

그 난리를 지켜보고 있던 요리사들은 저마다 고개를 흔들며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였다. 벌써 매일같이, 거의 끼니때마다 벌어지는 일이라 딱히 놀라울 것도, 새로울 것도 없었다.

아체리아는 끊임없이 구시렁대면서 기어이 오믈렛을 다 먹었다. 요리사라면 대체로 음식이나 식재료를 함부로 낭비하는 것을 꺼리지만, 아체리아의 알뜰함은 단연 독보적이었다.

손을 대지 않은 음식은 깨끗하게 갈무리한 다음 따로 양념이나 조리법을 첨가해 새 음식으로 만들어 내놓기도 했고, 보통은 버려질 만한 재료도 어떻게든 이용할 방법을 찾아내어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처음에는 저 정도면 궁상을 떠는 것이라며 손가락질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아체리아의 그 재능이야말로 얀 헨릭이 가장 마음에 들어 한 것 중 하나였다.

아체리아는 버리는 재료로 요리를 만들더라도 결코 소홀히 다루거나 아무렇게나 요리하지 않았다. 다들 코웃음을 치는 재료라도 어떻게든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말 그대로 ‘요리’로 만들 수 있는 실력과 집념이 공작가의 요리사로 잔뼈가 굵은 얀 헨릭마저도 감탄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아체리아, 아체리아 있나?”

다 먹은 오믈렛 그릇을 개수통에 집어넣은 아체리아가 주방 입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택의 집사장인 호즈만이었다.

“집사장님, 왜 그러세요?”

“아, 있었군.”

늙수그레한 집사장은 어쩐 일인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아체리아는 왜인지 불길한 예감에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어색한 웃음을 띠었다.

집사장은 분주하게 움직이는 주방의 요리사들을 흘긋 바라보다가 말했다.

“공작님의 손님들께서 오실 예정이야. 오찬을 함께하시겠다고 하니 준비를 해 주게.”

이런 예감은 왜 틀리는 법도 없을까. 아체리아는 끈 떨어진 인형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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