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접시에 식기가 스칠 때마다 힘없이 딸그락거리는 소리가 이어진다.
공작가의 요리사인 아체리아 클링은 식탁 옆에서 뒷짐을 지고 선 채 내리뜬 시선을 슬쩍 움직여 접시를 훑어보았다.
‘으깬 감자 한 스푼, 작은 아스파라거스 다섯 개, 로메인 상추로 만든 샐러드 반 그릇.’
“그만 치워.”
무감동한 목소리로 명령한 비스몽트 공작은 냅킨을 들어 입가를 대강 문지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나 그랬듯 희미하게 찌푸려진 미간과 성마른 뺨. 냉랭하게 잘생긴 미남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기력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몸짓 때문에 어딘가 아픈 사람처럼 허약해 보였다.
“식사는 입에 맞으셨습니까?”
아체리아가 공손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옆을 스쳐 지나가려다 비스듬히 고개를 돌린 공작은 아무런 말도 없이 코웃음만 치고 식당을 나가 버렸다.
혼자 남은 아체리아는 비스몽트 공작 특유의 보폭이 큰 발소리를 들으며 불만스레 시선을 굴렸다.
* * *
“그렇게 가리는 게 많으니까 맨날 비실비실하지!”
아체리아가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내리치자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잔이 달각대는 소리를 내며 떨렸다.
아체리아가 공작의 식사를 살핀 뒤 성질을 부리는 것이야 하루 이틀 있던 일도 아니어서, 같이 식사를 하던 요리사들은 저마다 자기 접시의 음식이 흘러나가지 않게 수프 그릇을 슬쩍 들거나 덤덤히 컵을 치울 뿐이었다.
“그러게 공작님의 식사를 굳이 네가 살필 필요는 없다니까. 넌 대체 왜 그러냐? 애가 아주 삐뚤어졌어!”
수석 요리장인 얀 헨릭이 걸걸한 목소리로 잔소리를 했으나 아체리아는 스푼을 쥔 채 부르르 떨리는 손으로 또 한 번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빈민가에서는 제때 못 먹어서 굶어 죽는 사람들도 있는데 하여튼 배가 불러서! 매 끼니마다 본인을 위해 음식 만드는 사람은 생각도 안 하고 말이야!”
“시끄러워 죽겠네. 인마, 너 계속 그렇게 투덜댈 거야? 엉? 그럴 거면 나가서 먹어!”
“영감님은 화도 안 나요! 그거 전부 영감님이 만든 거잖아요!”
“이게 누구한테 영감이라는 거야!”
결국 맨손으로 가재 껍질도 부순다는 얀 헨릭의 주먹이 아체리아의 머리를 꿍, 내리찍는다. 악, 소리를 지른 아체리아는 그러고서도 분이 덜 풀린 표정으로 김이 피어오르는 빵을 수프에 푹 찍어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전투적으로 빵을 우물거리던 아체리아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맙소사! 오늘 수프 너무 맛있다! 여기 넣은 게 뭐예요? 게살……은 아니겠고, 오늘 점심때 게 샐러드 만들고 남은 게 껍질 넣었구나, 맞죠! 그리고 아보카도가 들어갔고…… 뭐지? 뭔가 톡 쏘는 맛이 나는데…….”
방금 전까지 사람 한 명 잡을 기세로 우악스레 투덜거리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아체리아는 수프를 즐기다 못해 거의 감동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스푼으로 수프를 떠서 유심히 맛을 본 아체리아가 얀 헨릭을 휙 돌아보며 말했다.
“겨자씨! 겨자씨가 들어간 거죠! 내 혀는 못 속여!”
“하여튼 그놈의 혓바닥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쥐똥만큼 다져 넣었는데 그걸 알아내?”
퉁명스레 핀잔하는 말투이긴 했으나 얀 헨릭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너무 맛있어요. 겨자씨를 넣어서 이런 맛을 어떻게 냈어요? 이건 수프라고 할 수가 없어요. 스퀼라 의상실 알죠? 거기서 파는 제일 비싼 비단을 먹는 것 같다니까요. 그만큼 부드러운데, 겨자씨가 갑자기 혓바닥을 톡 걷어차고 들어오니까 갑자기 어제 마신 포도주 숙취가 달아나는 느낌?”
“너 어제 또 창고에서 와인 훔쳐 마셨냐?”
얀 헨릭이 눈을 부라렸다. 아체리아는 뜨끔한 표정으로 모르는 척 시선을 피했다.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죠.”
“이게 도적이야, 고용인이야? 공작님께서 아시면 무슨 사달이 나는지 몰라서 그래?”
공작가의 창고에는 왕국 전역에서 진상된 온갖 종류의 술이 무더기로 쌓여 있어서, 하인들이 비교적 값싼 포도주 같은 것들을 한두 모금씩 홀짝거리는 것은 그렇게까지 문제 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얀 헨릭은 수석 요리장이었으므로 다른 요리사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라도 아체리아를 혼내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물론 아체리아는 그 정도 꾸중 좀 들었다고 풀이 죽거나 겁을 집어먹을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음, 오늘은 자네들에게 할 말이 있다.”
모두들 식사를 반쯤 마쳤을 무렵, 얀 헨릭이 입을 열었다. 평소와 달리 그의 말투가 진지해서, 긴 식탁에 둘러앉은 주방의 고용인들이 모두들 의아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얀 헨릭은 까슬까슬한 턱 밑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뜸을 들이더니, 아체리아 쪽을 힐끔 쳐다보고는 말했다.
“내가 비스몽트 공작가의 주방에 견습으로 들어와서, 요리사로 일하며 공작 가문을 모신 지도 벌써 50년이 다 됐지.”
평소 얀 헨릭은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가는 인물이었다. 오늘처럼 장황하게 서두를 떼는 일이 좀처럼 없었던지라, 다른 고용인들은 물론이거니와 그와 가장 가까운 아체리아조차 얀 헨릭이 무슨 말을 할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얀 헨릭은 자신을 향해 쏟아진 시선들을 둘러보며 왠지 멋쩍은 표정으로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중 수석 요리장으로 있었던 시간은 27년…… 자네들도 알겠지만, 수석 요리장이라는 건 무척 어려운 자리일세. 공작님의 식사를 직접 만들고 살펴야 하니까 말이지. 에…….”
“아, 정말. 오늘따라 되게 뜸들이시네. 뭐예요? 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래요?”
참을성 없는 아체리아가 조바심을 내며 얀 헨릭의 말을 끊었다. 다른 고용인들은 수석 요리장이라는 얀 헨릭의 위치가 어려워서라도 함부로 그런 행동을 할 수 없었지만 그녀는 달랐다.
“이 녀석아, 좀 기다리지 못해? 어른이 모처럼 중대 발표를 하시는데 버르장머리 없이…….”
“빨리 디저트를 먹어야 한단 말이에요! 오늘 디저트는 초콜릿케이크라고요!”
얀 헨릭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잠시 아체리아를 쳐다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왠지 많은 감정이 가신 표정으로 덤덤하게 말을 쏟아 냈다.
“이번 주를 마지막으로 난 은퇴할 예정이야.”
귀를 기울이고 있던 주방 고용인들이 일제히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비스몽트 공작가의 수석 요리장이 얀 헨릭이 아니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그들이었기에, 이 갑작스런 은퇴 발표에 다들 당혹해하고 있었다.
“아니, 요리장님. 이렇게 갑자기 은퇴라뇨?”
“아직 정정하신데 왜 은퇴를 하시겠다는 거예요?”
곳곳에서 이해할 수 없다는 목소리들이 튀어나온다. 물론 그 와중에도 아쉬움이나 당혹감보다는 은근히 기쁜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공작가의 이등 요리사인 로널드 락케였다. 얀 헨릭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지만, 그도 역시 어릴 때 공작가의 주방에 고용되어 30년을 요리사로만 일한 인물이다. 얀 헨릭이 은퇴한다면, 이 시점에서 새로이 수석 요리장이 될 만한 인물은 그가 유일했다.
얀 헨릭은 떠들어 대는 사람들을 향해 대충 손짓을 하고는 말했다.
“언제까지고 귀족 가문의 요리사로만 일할 수는 없지. 죽기 전에 내 가게는 차려 보고 죽으려고. 그래서…….”
얀 헨릭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쇳소리 섞인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거나, 아니면 화를 내기 전에 항상 나오는 버릇이다.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다시금 목소리를 죽이며 얀 헨릭의 큼직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로널드 락케는 의기양양하게 들뜬 얼굴로 어깨를 쭉 폈다. 곧 얀 헨릭이 자신을 수석 요리장으로 지명하리라는 자신감에 가득 찬 얼굴이었다.
얀 헨릭은 각양각색의 표정들을 찬찬히 살피듯 훑어본 뒤,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아체리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음 수석 요리장은 너다, 아체리아.”
얀 헨릭의 입에서 말이 떨어지기만을 숨죽여 기다리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중에서도 가장 가관인 것은 차기 수석 요리장으로 지목된 아체리아의 경악한 표정과, 자신이 수석 요리장이 될 것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던 락케의 구겨진 얼굴이었다.
아체리아는 입술을 달싹거리더니 머리라도 얻어맞은 사람처럼 더듬더듬 말했다.
“아니…… 잠, 잠깐만요. 영감님, 아니지. 요리장 님. 제가요? 수석 요리장이요? 아니, 농담이시죠? 은퇴한다고 이렇게 아무렇게나 말씀하고 그러시는 거 아니에요. 이제라도 빨리 농담이라고…….”
“농담이라니, 누가 농담을 해? 난 요리 가지고는 농담 안 한다. 앞으로 네가 수석 요리장이야. 그러니 공작님의 식사를 직접 만들어야 한다. 물론 당분간은 식사하시는 걸 지켜보면서 계속 살펴보기도 해야 하고. 알겠어?”
때마침 다 구워진 초콜릿케이크가 테이블로 옮겨졌다. 하루 종일 일을 하느라 기운을 뺀 사람들을 너 나 할 것 없이 달려들어 케이크를 한 조각씩 집느라 바빴지만, 정작 케이크를 먹어야 한다며 우겨 대던 아체리아는 앉은 자세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내가…… 수석 요리장? 그 밥맛없는 자식의 식사를 내가…… 만들어? 게다가 계속…… 살펴? 계속?’
공작저로 온 후 오늘만큼 간절히 도망가고 싶은 날이 있었던가.
아체리아는 얼이 빠진 채 의자에 등을 툭 기댔다. 초콜릿케이크의 다디단 향기가, 지금은 아주 끔찍한 악몽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