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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국이 너무 따뜻해서 문제다 (145)화 (144/148)

샤르망을 향한 괘씸함이라든가 분노 또한 묻어나지 않았다.

“…….”

로브를 뒤집어 쓴 남자의 올라간 입꼬리를 본 샤르망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이 멈춰 있었다.

눈을 두어 번 깜박였다.

단순한 환상이나 착각이 아니라 남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가 한 걸음 샤르망에게 발을 내딛자 샤르망은 그만큼 뒤로 물러섰다.

왜…… 이곳에.

라고 생각을 하는 순간 술집에서 또 누군가가 나오는 모양인지 소음이 생겼다.

샤르망은 의문을 해결하기도 전에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나기로 했다.

어떤 이유에서건 이곳에 그가 있는 건 안전하지 못하다는 뜻이었으니까.

그 누구도 위험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샤르망은 빠른 몸짓으로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서둘러 샤르망이 자리를 옮긴 것은 술집에서 조금 떨어진, 아니, 아예 전야제가 열리는 거리에서 동떨어진 공터였다.

그렇게 긴 거리가 아니었음에도 샤르망은 숨이 찬 것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이 긴장으로 뒤덮인 까닭이었다.

다시 몸을 돌리려는 순간 덮치듯 남자가 샤르망의 뒤를 껴안았다.

“…….”

뱉어내는 숨이 툭 끊어지는 것과 동시에 남자의 목소리가 귀 지척에서 들렸다.

“또 도망가려느냐.”

어두운 목소리에 샤르망이 짧은 숨을 토해냈다.

언젠가 마주하게 되면 반드시 빳빳이 고개를 들고 심장에 칼을 박을 것이다 다짐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은 마치 궁지에 몰린 쥐 같았다.

다른 이들을 안전하게 하기 위해서 이곳으로 옮긴 것이지만 굳은 몸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제 스스로에게 혐오감이 들었다.

“……라칸.”

그리고 그 품에서 빠르게 빠져나왔다.

다시 마주한 라칸이 짧게 실소했다.

이제는 숨길 이유도 없는지 뒤집어 썼던 후드를 뒤로 젖혔다.

흉흉한 눈동자와 함께 조금도 변하지 않은 모습의 라칸이 눈에 들어왔다.

피 같은 붉은 머리카락도.

샤르망은 자신이 죽었던 그 시간에 갇히며 숨이 막히는 걸 느꼈다.

“이쯤이면 돌아올 줄 알았건만.”

“…….”

“짐이 이리 찾아오게 만들다니.”

라칸이 목울대를 울리며 짧게 웃었다.

“당신이 왜 여기 있습니까.”

샤르망이 가까스로 냉랭하고 적대적인 목소리를 냈다.

그마저도 그에게 우습게 보일까봐 신경이 쓰였으나 바로 정신을 가다듬었다.

“나야말로 묻고 싶군.”

“……무얼 말입니까?”

“내게 충성했던 네가 왜 여기 있는지.”

“……나는 당신에게 충성하지 않습니다.”

쥐어 짜내듯 말하자 라칸이 머리를 쓸어 넘기며 짧게 혀를 찼다.

“잉겔로의 말이 맞았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

샤르망이 입을 다물었다.

“네가 원하는 것을 다 쥐여 줬는데. 뭐가 아쉬웠느냐.”

그 말에 샤르망이 짧게 실소했다.

원하는 것을 쥐여 줘?

그건 자신이 라칸의 명을 해결하고 충족시켜준 만족감에 대한 대가였다.

지금은 그 행동 모두 지워내고 싶은 만큼 후회되는 과거였으나 어쨌든 그 또한 샤르망이 해낸 것이었다.

“엘리움을 삼켜 내게 가져다줄 생각이었다면 용서하마.”

“…….”

“이제 돌아가자. 지금까지의 일은 모두 없던 일로 해줄 터이니.”

샤르망이 허리를 빳빳하게 세웠다.

“나는 륀트벨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나는 이곳에서 엘리움을 지킬 겁니다. 당신으로부터.”

그 말을 하면서도 샤르망은 어떠한 충동에 휩싸였다.

지금 라칸과 자신의 주변엔 아무도 없다.

일부러 물린 것인지 오로지 라칸과 자신뿐이다.

차라리 이곳에서 라칸을 죽이면 더 이상의 불안은 없지 않을까?

어쩌면 그의 손에 죽는 게 자신일지도 모르지만 치명상은 입힐 수 있을 것이다.

내면에 있는 작은 두려움마저 완전히 씻겨내 보내면 그를 제압하는 것이야 어려울 것이 없었다.

만에 하나 일어날지 모르는 일을 위해 그간 쉬지 않고 단련해왔으니까.

만약 죽더라도 그의 심장이나 목에 작은 단도라도 박을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니면 지금 그를 보내고 더 좋은 기회를 기다릴까.

지금 준비해 온 것처럼 완전히 륀트벨이 일어서지 못하도록, 엘리움을 노리지 않도록 누를 그때를 기다려야 맞는 걸까.

어떻게 해야 옳은 것일까.

“내가 아닌 엘리움이 네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다 여기느냐?”

“저는 엘리움에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라칸이 다시금 실소했다.

“그럴 리가. 너는 나와 같다. 너는 욕심이 많지. 너는 야망이 있다. 그런 네가 원하는 것이 없다고?”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건 오로지 당신이 무너지는 것뿐.

샤르망이 라칸을 살기 가득하게 노려봤다.

차오르는 살기를 라칸이 모를 리 없었다.

“……원하는 것이 정녕 없다?”

“그리고 나는 다신 당신의 개가 되지 않아.”

결국 내뱉은 말에 라칸에 눈가에 전에 없는 짜증이 치밀었다.

“투정이 길구나. 너이기에 내가 이곳에 온 것이다. 눈을 감아주는 것도 너뿐이지.”

“…….”

“짐의 인내를 가벼이 보지 말라. 아무리 너라도 더는 봐줄 수 없느니.”

그 말에도 샤르망은 동요하지 않았다.

분명히 샤르망은 알고 있다.

지금껏 쌓아왔던 모든 것을 버리고, 뉘우친 과거마저 뿌리치고 다시 라칸의 손을 잡으면 더 없는 명예와 권력을 쥐게 된다는 것을.

라칸은 자애로운 자가 아니다.

그런 자가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한다는 건 그에게 자신이 큰 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놀란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렇다고 라칸이 자신을 죽인 과거가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명예와 권력을 코앞에 두고 또 죽을 것이다.

어쩌면 과거에 일어났던 일보다 더 잔인한 죽음을 내리기 위한 꼬드김일 수도 있었다.

행여 그런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더라도.

과거와 달리 라칸이 자신의 가치를 더 높게 쳐 죽이는 일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샤르망은 돌아가지 않는다.

현재의 샤르망이 안식처로 여기는 곳은 이곳이다.

세 제자가 있고, 아힐이 있고, 에빌과 멜피네가 있고, 미야와 바쿤이 있는.

그리고 페페가 있고 자신을 아껴주는 이들이 있는 엘리움이다.

같은 생각을 한 것인지 라칸이 비웃음에 가까운 얼굴을 했다.

“그럼 나를 죽일 셈이냐?”

샤르망은 긍정의 뜻으로 입을 열지 않았다.

눈치를 챘다면 역시 이곳에서 라칸을 죽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계획과 전혀 다르지만 차라리 이게 좋은 방법인 것만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든 찰나였다.

“하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중얼거리는 말한 라칸이 뚜벅뚜벅 큰 보폭으로 다가왔다.

샤르망이 뒤로 물러나기도 전에 가까이 다가온 라칸이 손을 들어 샤르망의 턱을 쥐었다.

형형한 눈동자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쳤다.

모로 삐딱하게 비뚤어진 턱과 시선.

그리고 그의 한숨 같은 숨결이 이어졌다.

“네가 돌아오지 않겠다면 돌아오게 만들어야겠지.”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

“마탑이 널 무척이나 싸고돌더구나.”

샤르망이 눈을 부릅떴다.

“그래서 궁금하였다.”

“…….”

“어떠한 마음으로 감히 ‘내 것’을 지키겠다 하는 건지. 너와 그 사이에서 오간 것이 대체 무엇인지.”

“…….”

“그자가 제 목숨을 내놓을 만큼 너를 지킨다면 나는 무슨 생각이 들까. 음?”

목숨을 내놓을 만큼?

순간 아힐이 아직 가지고 있는 저주가 떠올랐다.

샤르망은 자신의 뺨을 만지려는 라칸의 손을 빠르게 잡아챘다.

그러나 그 행동을 비웃듯 반대편 손이 샤르망의 뺨을 쓰다듬었다.

“너는 내 것이다. 네가 돌아온다면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해주마. 마지막이다.”

“…….”

“그러니 돌아와.”

서로의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한 가까운 거리에서 라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으면 네 주변의 모든 것을 없애줄 테니. 네가 정녕 원하는 것이 그것이라면 그리 해주겠다.”

잊지 마, 너는 내 것이라는 것을.

돌연 그가 샤르망에게서 멀어졌다.

샤르망이 늘 품 안에 가지고 다니던 단도가 라칸의 손에 들려 있었다.

“기다리마.”

그렇게 샤르망을 비웃듯 라칸이 그 자리에서 먼지처럼 사라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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