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이 너무 따뜻해서 문제다 (144)화 (143/148)

“자, 주문하신 술 나왔습니다!”

이윽고 주문한 술이 가득 나왔다.

거대한 트레이에 담아온 것도 모자라 뒤에 종업원 다섯 명이 뒤로 줄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라디가 ‘흐응’ 하며 샤르망을 쳐다봤다.

“우리 스승님 또 술 마시면 엄청 솔직해지지.”

그 말에 샤르망이 눈썹을 치뜨다 짧게 눈을 흘겼다.

어쩐지 이번에는 무슨 말을 털어놓나 기대하는 말투였기 때문이다.

라디에게는 안타깝지만 샤르망은 그 기대를 처참히 눌러줄 예정이었다.

“미안하지만 안 마실 거야.”

라디가 해괴한 얼굴을 했다.

“엥? 오늘 같은 날 안 마신다고?”

샤르망은 정말 안 마실 작정이었다.

실제로도 저 기다리고 있는 세 번째 종업원의 트레이 위에는 샤르망이 미리 주문한 주스 한 잔이 놓여 있었다.

샤르망은 술을 마시는 걸 싫어하는 편은 아니다. 오히려 가끔은 즐길 줄도 알았다.

하지만 과거를 돌이켜보건대, 술을 먹고 좋았던 기억은 없었던 것 같다.

평소와 다르게 실수가 늘고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쏟아낸다거나 하는 경향이 있었다.

제자들에게 들켰던 것도 그 탓이지 않았는가.

하여 그 후로 샤르망은 어지간해서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한두 잔 정도는 문제가 없지만 기분이 좋아지면 또 실수를 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샤르망은 과거 자신을 꽤 잘 믿는 편이고 엄하고 뻑뻑한 편이었지만 지금은 전혀 아니었다.

지금은 자신에게도 몹시나 관대하고 너그러워졌지만 오히려 평가는 냉정해졌다.

다른 사람들의 앞에 커다란 술잔이 놓일 때 샤르망 앞에는 상큼한 오렌지 주스가 놓이자 라디가 혀를 차며 아쉬워했다.

그렇게 각자의 앞에 잔이 놓인 후에는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어째선지 조금 가라앉았다.

서로가 신뢰를 보이기로 하고 엘리움을 지킨다는 공통의 목적으로 화해를 하고 모였으나 잔을 부딪칠 만큼 친한 사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게, 미야가 샤르망에게 마음을 풀어놓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심지어 바쿤과는 샤르망이 진실을 말하고 사과했던 그날 이후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알렉산드로가 있었다면 이미 진즉에 술잔을 잡아 들었겠지만 지금은 미묘한 눈치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보다 못한 페페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자아, 이렇게 모이기도 쉽지 않잖니? 건배하자!”

그러고는 혼자 욕심내며 술잔 두 잔을 양손에 하나씩 들었다.

“…….”

“…….”

떠들썩한 손님들 사이에서 이쪽의 공기만 조금 더 서먹해졌다.

아힐이 짧게 웃었다.

“그럴까.”

그리고 페페를 돕기 위해 술잔을 쥐더니 샤르망을 향해 들어 보였다.

샤르망이 피식 웃으며 덩달아 주스잔을 들었다. 그러면서도 눈치를 보듯 시선이 저절로 바쿤에게 향했다.

어차피 제자들이야 무조건 제 편을 들어줄 거라는 믿음이 있으니 걱정되는 쪽을 본 것이다.

샤르망과 눈이 마주친 바쿤이 짧게 혀를 찼다.

“까짓 거! 잘 지내보자고!”

그리고 두툼한 팔로 술잔을 들었다.

바쿤이 ‘뭐 해, 어서 들어!’라고 타박하자 미야가 마지못해 술잔을 들었다.

동시에 펠릭과 엘타인, 라디도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함께 술잔을 들었다.

멜피네와 에빌도 마주보고 웃으며 함께 거들었다.

페페의 얼굴이 확연하게 밝아졌다.

“모두의 행복을 위하여!”

“위하여!”

언제 서먹했냐는 듯 테이블이 소란스러워졌다.

한번 허물어졌던 벽이 오늘 두 번째로 허물어졌다.

술이 들어가서인지 테이블에 모인 이들은 급속도로 친해졌다.

술을 나르는 직원의 방문이 10번을 넘어가자 묻지 않아도 누군가 술잔을 들면 누군가는 반드시 부딪쳐주기까지 했다.

샤르망은 그들 사이에서 꿋꿋하게 주스를 마시면서도 속에서는 알 수 없는 희열이 느껴졌다.

뿌듯하고 고맙고 흐뭇한 마음이 가득했다.

펠릭은 그런 샤르망을 말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늘 어딘가 절박하고 끊임없이 절제하는 것 같던 샤르망의 얼굴에 언제부턴가 발그레한 미소가 항상 함께하고 있었다.

그건 엘리움에 오고 난 이후 그 언젠가부터였다.

샤르망과 가장 오래 함께 한 펠릭은 어딘가 아슬아슬해 보이던 샤르망에게서 늘 눈을 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때와 달리 미소를 남긴 채 어딘가 편안해 보이는 지금의 모습에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펠릭은 샤르망을 존경하며 동경하고 선망하며 흠모했다.

결투에서 졌을 때부터,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이따금 애타는 충동을 참기 어려웠던 적도 있었다.

그래도 샤르망이 제 마음을 알아주지 않아 서운했던 적은 결코 단 한 번도 없었다.

늘 보이는 곳에 있기를, 그저 샤르망이 행복하면 되었다고 생각하니까.

감히 닿을 수는 없어도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샤르망을 보고 지킬 수 있다는 게 그의 마음을 뿌듯하게 만들었다.

샤르망이 륀트벨에서 정점을 찍어 그녀가 권력을 누렸으면 싶었던 적도 있었다.

정점까지는 아니어도 그녀가 목표에 다다라 모든 불안감을 없애고 여유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도 바랐었다.

그런데 이것도 좋았다.

이전과는 판이한 행보지만 어쨌거나 샤르망이 웃으니까.

‘그거면 됐지, 뭐.’

샤르망이 웃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 몇 번의 위기에도 살아남았던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문득 샤르망이 웃음을 터트렸다.

펠릭은 저도 모르게 배어나오는 웃음을 지었다.

엘타인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펠릭과 다른 점을 꼽자면 감정의 깊이랄까.

펠릭이 깊고 고요한 바다처럼 또는 산처럼 묵묵히 샤르망을 지키는 타입이라면 엘타인은 그보다 더 요동치는 파도와도 같았다.

경외, 선망, 흠모보다 조금 더 단순한 애정으로 치환할 수 있는 욕구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펠릭과 라디는 그의 소중한 동료이자 친우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라이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펠릭과 같은 눈으로 샤르망을 보고 있었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저렇게 편안해하는데 기꺼이 그녀를 위해 움직여야지.

바로 옆에서 틈나는 대로 애교와 아양을 부리는 라디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어갔다.

“자, 샤르망. 너도 제스퍼처럼 주스만 홀짝 거리지 말고 한잔 하지.”

“아.”

아쉬운대로 주스를 홀짝거리고 있던 샤르망은 바쿤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제스퍼처럼이라니.

다들 술고래 대회라도 연 듯 연거푸 마시고 있는 사이에서 어린애 취급을 받으니 조금 부끄러웠다.

“여기 술 더 가져다 줘!”

“예, 바로 갑니다!”

바쿤의 말에 종업원이 힘차게 대답하며 술을 또 한가득 가져왔다.

샤르망이 뭐라 더 말하기도 전에 샤르망의 앞에도 술잔이 놓였다.

분명 좀 전까지 절대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샤르망이지만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술잔을 쥔 샤르망을 보고 라디가 낄낄 웃었다.

“우리 대쪽 같은 스승님 어디 갔지.”

샤르망이 테이블 아래 라디의 발을 몰래 꾸욱 누르자 라디는 더욱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샤르망은 바쿤을 향해 술잔을 들었다.

“자, 다시 건배!”

그 소리와 함께 서로 왁자지껄하게 놀던 이들이 기다렸다는 듯 술잔을 들었다.

샤르망은 맞은편에 바로 앉아있는 아힐과 눈이 마주쳤다.

아힐이 웃으며 고개를 까닥였다.

샤르망은 이제야 술로 목을 축이며 남은 축제 전야제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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