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이 너무 따뜻해서 문제다 (128)화 (127/148)

“이곳이 아니라 지상이어야만 합니다.”

“한번 눈감아 줬더니 잘도 기어오르는구나.”

“이곳에 와서 만나는 건 아르디엘이 싫어할 것 같아서요.”

샤르망은 에빌이라는 이름 대신 본래 이름을 쓰려고 노력했다.

뭐 그렇게 하지 않아도 에빌이 있는 곳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것 같지만.

엘리움이 이들에겐 그다지 넓은 곳도 아닐 텐데.

아니면 아르디나가 에빌을 찾으면 에빌이 감쪽같이 숨어버린다든가.

몇 가지 생각이 떠올랐으나 모두 샤르망의 짐작에 가까웠다.

하지만 아르디나는 그 점을 몹시 불쾌해했다.

“네가 함부로 부를 만한 이름이 아니다. 아무리 인간에게 무르기로서니 이런 것들과 어울리다니.”

이들은 왜 이리도 사람을 싫어하는 걸까.

엘리움이 있기 전 살리드 신도 인간들을 아꼈다.

페페를 포함한 요정족들과 함께 인간들을 보살피고 먹을 것을 내려주고 풍족하게 해주었다.

그렇기에 인간들도 신을 숭배하고 따랐던 것인데.

심지어 다는 아니지만 이들의 부모 중 한 사람은 인간인 사람도 있었다.

신과 수인, 신과 인간, 신과 엘프…….

그렇기에 각기 다른 신비로운 외형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그 점에 비하면 아르디엘과 아르디나는 샤르망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엘프와 인간 그 사이 어딘가처럼 호리호리 하긴 했지만 인간에 가까웠다.

그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니 열등감 같은 건 아닐 테고.

“왜 그렇게도 인간을 싫어하십니까?”

“너무나 당연한 걸 묻는 구나.”

“당연한 거라고요?”

“너희들은 세상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께서 일구어 주신 땅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머저리들이지.”

아르디나가 대놓고 힐난했다.

샤르망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아르디나가 덧붙이며 샤르망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저 싫어할 가치도 못 느끼는 것뿐. 심지어 너희들은 주제도 모르고 늘 이곳에 오고 싶어 하지. 마치 너처럼.”

차라리 욕을 하지.

“……정확히 알겠습니다. 하지만 아르디엘은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

“아직 너희들의 추악한 면을 보지 못한 탓이지.”

“지상에서 나는 특별한 것들을 찾아오시기도 하시잖습니까?”

“그곳에 있어야 할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르디엘 또한 그렇지.”

“그래서 매일 보셨나요?”

샤르망은 환상수의 심장석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누가 매일 봤다는 것이냐.”

샤르망이 슬며시 웃어 보였다.

아르디나는 아닌 척 입으로 가시를 쏟아내면서도 중간 중간 에빌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그 애가 무엇을 하며 지내느냐.

여전히 인간들 사이에서 기뻐하느냐.

이곳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느냐 등등.

다행인지 멜피네에 대한 질문은 없었다.

에빌은 아르디나가 멜피네를 찾는 걸 꺼리는 것 같았는데, 관심이 아예 없는 건지 멜피네가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아서 그 점은 안심해도 될 것 같았다.

바로 감옥에 집어넣지도 않고 아까처럼 힘을 뿜어내지도 않고, 이야기는 잘 진행이 되고 있는데…….

아르디엘과 만나려면 아르디나가 지상에 내려가야 한다는 말만 나오면 다시 도돌이표였다.

“엘리움은 여기만큼 낙원은 아니지만 그래도 좋은 곳입니다. 착한 사람들이 많고 살리드 님은 떠나셨지만 아직 신을 숭배하고 기도하는 자들이 많아요.”

“…….”

“아르디엘도 엘리움이 좋은 곳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까 말씀드린 대로 안전장치를 해놓지 않으면 모두 불타게 되고 말 것입니다. 당신께서 선의를 베푼다면 아르디엘이 좋아하는 엘리움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것은 네가 겪었기 때문이냐?”

“…….”

“지상의 인간들이 모두 불타 죽든 아니든 내 알 바 아니다만, 너는 아까부터 전쟁을 확신하고 있구나.”

“당신께선 제 겹쳐진 시간을 보고 계시겠죠.”

“그래. 하지만 이 세상에 전혀 없는 일도 아니니 우쭐해할 것 없다. 인간이 두 번의 삶을 살아봤자 내가 살아온 날의 반의반도 안 될 것이니.”

“맞습니다.”

순순히 인정하자 아르디나가 힐끗 샤르망을 쳐다봤다.

샤르망이 고개를 들어 아르디나를 쳐다봤다.

“그때 저는 엘리움을 불태우기 위해 당신을 찾아왔었습니다. 시간을 돌아오기 전에 말입니다.”

“뭐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너뜨리기 위해 마력 증폭기를 찾아 이곳에 왔었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선 제게 마력 증폭기를 내주셨죠.”

“뻔뻔한 거짓말을 하는구나. 내가 전쟁을 도왔다는 뜻이냐?”

샤르망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당신께선 그저 연구에 쓰일 제 심장을 탐내셨을 뿐입니다.”

“심장이라. 하기야 보통의 인간의 것이 아니긴 해 보이는군.”

“‘마력 증폭기와 네 심장을 바꾼다면 생각해 보겠다’ 그리 말씀하셨고 저는 제 심장을 걸고 마력 증폭기를 가져갔습니다. 당신을 설득할 가장 확실하고 쉬운 방법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엘리움을 함락시키고 많은 사람을 희생시키고 또한 불태웠죠. 제 주군의 명이었으나 그 선봉에 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지키고 싶다?”

“네, 부끄럽지만 그러고 싶어요. 당신께서도 아르디엘에게 미움 받기는 싫으시지 않습니까?”

아르디나가 다시 움찔했다.

“그 녀석은 나를 버리고 떠났다. 나를 버리고 할스레이크를 버렸어.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돌리질 않았는데 네가 그 마음을 돌릴 수 있단 말이냐.”

“말씀드렸잖아요. 인간인 제게 한 번 손을 뻗어주신다면 그 뒤로 쉬울 거라고요. 아르디엘은 저를 통해 당신에게 기회를 드린 겁니다. 아르디엘은 아르디나 님께 큰 걸 바라지 않았어요.”

“……말장난 하지 마라.”

아르디나는 또 한 번 힐난했지만 아까와 달리 머뭇거렸다.

“못 믿으시겠다면 과거처럼 제 심장을 걸겠습니다. 제 말이 틀리다면 제 심장과 마력 증폭기를 같이 거둬가 주세요. 아르디나 님께서는 지금도 제 심장을 연구 재료로 탐내고 계시잖아요. 손해 보지만은 않으실 겁니다.”

샤르망은 한 번만 자신을 믿어달라고 또 다시 간청했다.

이 말을 들으면 아힐이 화낼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과거와 같은 심장이 조건이라고 해도 달랐다.

이번에는 스스로 지켜낼 확신이 있었다.

“흠.”

“하지만 들어주지 않으신다면 저는 아르디엘의 말대로 이 설계도만을 가지고 가겠습니다. 이것마저 막으시진 않겠죠. 그렇게 되면 아르디엘과의 관계를 절대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잘 아실 테니까요.”

아르디나는 한참 말이 없었다.

샤르망은 버릇없다며 가차 없이 공격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오히려 큰 수확이었다. 아르디나는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윽고 아르디나가 입을 열었다.

“좋다.”

샤르망이 눈을 크게 뜨고 벌떡 일어섰다.

“지금 좋다고 하신 것 맞습니까?”

“인간들이란 귀도 좋지 않군. 좋다고 말했다. 마력 증폭기를 내어 주마.”

샤르망이 환하게 웃었다.

이렇게 대화만으로 허락해 주다니.

“다만 네 말대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네 심장을 가져가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내가 직접 엘리움을 무너뜨릴 것이다.”

샤르망은 기뻐서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그렇지만 절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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