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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국이 너무 따뜻해서 문제다 (126)화 (125/148)

그 순간 허공을 떠다니던 설계도들이 일순간 그물에 걸린 것처럼 한꺼번에 샤르망 앞에 들이밀어졌다.

홱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아힐이 바로 옆에 있었다.

떨어져 있는 줄 알았는데 너무 가까워서 조금 놀랐다.

“이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아.”

그런가?

하긴 위험한 일도 아닌데. 실은 일부러 마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괜히 이상하게 불똥이 튈까 봐.

며칠 공중 감옥에서 쓸데없이 시간을 보내서인지 샤르망도 모르게 무척 조심스럽게 굴고 있었다.

안에 있는 동안 아힐과 대화를 나누어서 지루하진 않았지만 정말 피가 마르는 기분은 다시 느끼고 싶지 않을 만큼 불쾌했던 기억이라서.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랬다. 이게 뭐라고.

방을 부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설계도를 가까이 가져오는 것뿐인데.

샤르망은 스스로 멍청하게 굴고 있었다는 생각에 헛웃음을 흘렸다.

겁이라도 먹었었다는 건가.

할스레이크의 의도에 그대로 술술 넘어갔다는 생각에 샤르망이 생각을 바꿔 먹었다.

“그러네…….”

반투명한 입체 설계도 안에는 에빌이 설계한 마력 회로가 반짝이고 있었다.

저대로 수식을 그려 마력을 집어넣고 만든다면 금방 마도구가 탄생할 것이다.

거기다 할스레이크가 가진 신의 힘을 불어넣으면 더 완벽한 마도구가 될 테고.

에빌은 마력 증폭기도 그렇고, 대부분 초기 설계도라고 했지만 샤르망이 보기에는 이미 완성에 가까운 것들로 보였다.

샤르망은 마법을 살상으로만 사용했기에 이런 연구에는 문외한이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 공부하고 깨우쳤던 부분만으로 볼 때 설계도는 완벽해 보였다.

“네가 보기에는 어때? 설계도들.”

“기대 이상인데. 우리가 쓰는 것과 똑같진 않지만 기본적인 수식은 같아. 확실히 복잡하고 까다롭긴 하네. 전혀 쓰지 않던 부분도 있긴 하고.”

“만약 이들의 도움을 더 받지 않고서는 어려울까?”

사실 에빌이 자신이 만든 할스레이크의 마도구 설계도를 가져와서 써도 된다고 했을 때, 에빌에게 힘까지 빌려 쓸 순 없을까 욕심이 났었다.

그런데 그가 ‘완성도는 떨어져도’라고 했었던 걸 보면 그건 어려운 방법일 것 같았다.

실제로 에빌은 할스레이크에 다시 돌아가지 않기 위해 그리고 멜피네를 지키기 위해 할스레이크와 더 엮이지 않길 바란다고 했으니까.

그걸 깨고서 샤르망을 도와준 것이었다.

그들만의 암묵적인 규율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르디나도 에빌이 말한 대로 전하자 몹시 불쾌해했지만 결국은 아르디엘의 방을 내주기도 했고.

“실은 말이지.”

아힐은 눈앞에 끌어당겨진 설계도들을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손에 의해 몇 가지 설계도가 골라졌다.

“……?”

“처음 너에게 의뢰를 맡겼던 날 말이야.”

“아, 응. 왜?”

샤르망은 아직 페페의 수칙에 익숙하지 않아 곤란했던 그날을 바로 떠올렸다.

처음 보는 사람의 몸에 깃든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그를 만나고 의뢰까지 받았던 황당했던 상황.

당장이라도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감마저 지금도 생생했다.

“그날 대체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할지 정말 어려웠어.”

그날 아힐이 첫 마디에 뭐라고 했더라.

샤르망의 기억이 맞는다면 의뢰한 물건을 받으러 왔다고 했던 것 같다.

“그래? 전혀 안 그래 보였는데.”

오히려 집요하지 않았던가.

샤르망이 물건이 없다고 하는데도 기어코 찾아내고 의뢰비까지 꼭꼭 챙겨주었다.

그 말에 아힐이 짧게 웃음을 지었다.

“내가 널 안다는 걸 티내지 말아야 했으니까.”

“나는 무서웠었어.”

샤르망이 솔직하게 말했다.

“무서웠다고?”

아힐이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떴다.

“전쟁에서 널 쓰러뜨렸을 때 나는 드디어 전쟁이 끝났다는 해방감에 찰 줄 알았어. 내 주군에게 승리를 가져다 줄 수 있어서 기쁘다고, 세상에서 가장 기뻐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라칸 다음이 나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거든. 그런데 아니었어.”

“……그래?”

“라칸에게 사냥이 끝난 개처럼 버려지고 죽음에 이르고 나서야 내가 어리석었다는 걸 깨달았지. 너를 쓰러뜨리고 나서 느꼈던 혐오감과 불쾌함의 뜻이 무엇인지를 그제야 온전히 깨닫고 받아들였던 거야. 동시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비소로 생겼지.”

“음.”

“그리고 나는 다시 깨어났었지. 페페의 몸에서. 그리고 얼마 못 가 날 원수로 생각할 사람을 봤는데 어땠겠어? 날 알아채고 날 죽이러 온 걸까 하고 무서웠어. 심지어 엘리움은 나에게 적국 한복판이었다고.”

아힐이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웃지 마.”

아힐이 일부러 자신에게 졌다는 것도 이제는 다 아니까.

“무서워했을 줄은 전혀 몰랐어. 사실 네가 놀라는 표정을 보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는데, 실제로 마주치고 나니 그렇지 않더라. 깜박하면 속아 넘어갈 정도로 널 숨기더라고. 그래서 계속 찾아갔지.”

사실은 그 모든 의뢰마저도 페페가 아니라 샤르망 자신에게 한 것이었다.

정말 그동안 깜박 속았던 거다.

“그래서 마력 증폭기를 의뢰했었던 거 맞지? 내가 과거에 먼저 가로채서?”

그런데 아힐의 표정이 미묘하게 틀어졌다.

“음…… 아니. 사실 처음에는 널 찾아가려고 만든 명분이었어.”

“명분?”

샤르망은 어느새 완전히 설계도에서 관심을 떼고 아힐에게 몸을 돌린 상태였다.

만지고 있었던 설계도는 어느새 샤르망의 손에 밀쳐져 뒤로 쭉 밀려났다.

“단지 명분이었단 말이야?”

여기까지 오는 일이 샤르망에게는 엄청나게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게 고작 샤르망을 찾아오기 위한 명분이었다고?

“내 목적은 오로지 너였으니까. 마력 증폭기를 얻는 데에 성공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 못했고, 그저 널 계속 만나서 네 마음을 온전히 바꿔놓을 수 있으면 더 이상은 아무것도 필요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어. 근데 다 네가 해낸 거야.”

아니, 또 그렇게 말하면 화내기가 민망해지지 않는가.

“…….”

샤르망은 눈을 깜박이다가 아힐이 제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다시 몸을 홱 돌렸다.

일부러 화를 못 내게 하려고 저렇게 말하는 게 분명했다.

뭐, 어느 순간부터는 샤르망이 더 마력 증폭기를 엘리움에 가져다주고 싶었으니 진 사람은 없는 게임이 된 셈인가.

샤르망은 의미 없는 다툼은 하지 않기로 했다.

굳이 필요하다면 우선 여기서 마력 증폭기 설계도를 찾아서 돌아간 다음에 꼬투리를 잡아도 될 테니.

“혹시 이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힐이 뭔가를 끌어당겼다.

가장 먼 쪽에 있던 설계도였다.

샤르망의 눈이 커졌다.

샤르망은 직접 마력 증폭기를 보고 가동도 했었기에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맞아!”

샤르망이 기뻐서 저도 모르게 외쳤다.

드디어 찾았다.

이제 이 설계도를 가지고 나갈 일만 남았다.

에빌이 필요한 게 있다면 몇 개 더 가져와도 된다고 했으니까 몇 개만 좀 더 챙기고.

그냥 나가도 되지만 이왕이면 완벽한 마력 증폭기를 가지고 나가고 싶었다.

샤르망은 아르디나에게 한 번만 더 부탁을 해보자 마음먹으며 남은 설계도를 더 빠르게 눈으로 훑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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