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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국이 너무 따뜻해서 문제다 (117)화 (116/148)

말을 하면서도 아힐에게 크게 잔소리를 듣겠다 싶었다.

그에게는 잘 해결하겠다고 했으면서 대련을 하자는 이야기나 꺼내고 있다니.

케니즈의 기가 찬 표정의 뜻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방법이 없었다.

앞으로 자신을 지켜보면 믿을 수 있을 텐데, 그때까지 그가 기다려 줄 일도 없을뿐더러 그때까지 계속 케니즈가 자신에게 칼을 겨누는 모습을 볼 자신도 없었다.

상대는 엘리움에서 큰 중책을 맡고 있는 인물이었다. 만약 륀트벨과 전쟁을 하게 된다면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또 총사령관을 맡게 될 것이다.

아무리 샤르망이 왕과 합의를 했어도, 엘리움의 수호자이자 마탑주 아힐이 그녀를 지지해 주어도 케니즈가 꼿꼿이 버틴다면 샤르망과 페페, 아힐의 계획은 수월하게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가 발생하면 엘리움의 군을 움직여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르는데, 왕의 지지를 받았다고 해도 그땐 군을 직접 통솔하는 왕자와 케니즈가 꼭 필요했다.

그렇다고 그가 받아들여 줄 때까지, 믿어줄 때까지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닐 수도 없고.

차라리 다른 방법으로 회유를 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러니 기회가 온 오늘 그를 설득해야 맞았다.

“그러니까 사디나르 공, 그대가 날 이기면.”

“스스로 감옥에 들어가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샤르망은 조금 떨떠름했지만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에 그가 수락하기만 한다면 져줄 생각은 없었다.

물론 다치게도 하지 않을 예정이다. 그냥 이렇게 임시로라도 그를 설득하고 싶은 것뿐이다.

곧 주말에는 할스레이크도 가야 하고 다른 이들의 용서를 받는 일도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여기서 그의 말대로 감옥에 들어가 시간을 죽일 수는 없는 일이란 말이다.

샤르망은 그를 보며 답을 기다렸다.

검을 잡는 사람이니 검으로 대화를 하자는 이야기는 좀 들어주지 않으려나.

침묵이 길어진다.

샤르망이 다시 힐끗 케니즈를 쳐다봤다.

“그 전에 하나만 묻지.”

기분 탓인지 몰라도 케니즈의 음성이 살짝 누그러져 있었다.

아닐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샤르망이 느끼기에는 그랬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약간의 기대감이 들었다.

전처럼 웃으며 농담을 던지고 지낼 수 있는 관계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뭐든.”

“왜 하필 엘리움이지?”

모든 감정을 배제한 케니즈의 궁금증이었다.

엘리움이야 가장 위협하는 존재가 륀트벨이니 그쪽에 가장 예민하게 굴진 몰라도 륀트벨의 시선에서 엘리움은 그저 정복하려는 여러 나라 중 한 곳일 텐데.

륀트벨의 개였던 자가 하필 고른 곳이 엘리움.

“……몰라.”

처음은 분명 제 의지가 아니었다.

이유야 어쨌건, 방법이야 어쨌건 그 낡은 가게에서 눈을 떴던 건 제 의지로 한 것이 아니었다.

이곳을 지키겠다고 마음먹었던 건 그 이후의 일이었으니까.

나중에서야 아힐이 제자들과 결탁해 자신을 되살린 것을 알았지만 아직까지도 그의 진짜 의중을 모르는 샤르망이었다.

동정인지 그의 말대로 궁금증인지 아니면 자신과 전혀 상관없이 엘리움만을 위해서인지.

“뭐?”

“모르겠어. 하지만 내가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고, 괜찮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고 알려준 건 아힐 더프와 엘리움이야.”

한 치의 거짓도, 아부도 담기지 않은 진심이었다.

케니즈가 샤르망을 빤히 내려다보다 이내 스치듯 고개를 팩 돌렸다.

“륀트벨의 개 주제에. 아까처럼 휘두른 게 아니라 이따위 방법으로 사람을 홀렸…….”

마치 더 골이 나라고 일부러 더 후벼 파는 모양새다.

“그래. 나는 륀트벨의 개였지. 네 말이 맞아. 나만큼 충성스럽고 순종적인 개도 없었을 거야.”

“…….”

스스로를 힐난하는 샤르망의 말에 케니즈는 입을 다물었다.

“그 충성스러운 개가 반대로 달려들어 목을 물어뜯는 건 보고 싶지 않아?”

케니즈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움찔 미세한 변화가 샤르망의 눈에 띄었다.

이것까지 말해줘야 하나 싶어 샤르망이 덧붙였다.

“그리고 솔직히 내 입으로 이렇게 말하긴 그렇지만, 너와 아힐 더프가 작정하고 날 공격하면 네가 원하는 최후를 맞이할 수 있겠지. 나라고 둘이 작정하고 덤비는데 어떻게 막겠어.”

케니즈가 황당한 눈초리를 한다.

샤르망은 어깨를 으쓱했다.

잡고 있던 날은 이미 빼앗을 수 있을 정도로 느슨하게 힘이 빠져 있었지만 샤르망은 구태여 그에게 알리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케니즈가 더 잘 알 테니까.

인고의 시간이 흘렀다.

쯧, 혀 차는 소리와 함께 케니즈가 검을 거뒀다.

마침내 그가 완전히 뒤로 물러섰다.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속으로는 바짝 긴장한 상태였던 샤르망도 뒤늦게 숨을 토해냈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모습을 보였을 시엔.”

샤르망은 제 목을 만지작거리며 그를 올려다봤다.

“걱정 마. 그땐 내가 스스로 목을 내어 줄 테니까.”

“너와 농담 따위 하고 싶지 않아.”

케니즈가 고개를 팩 돌렸다. 검은 거뒀지만 여전히 낯은 불쾌하고 찝찝해 보였다.

이제 가려나.

샤르망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동안 어느새 케니즈는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너. 아힐과는 대체 무슨 관계냐. 아무리 주군의 부탁이라고 해도 쉽게 움직일 녀석이 아니라는 걸 잘 안다. 속일 생각하지 말고 말해.”

그 말에 샤르망은 눈만 깜박이며 입을 다물었다.

글쎄, 무슨 관계지. 그들처럼 친구도 아니고 그렇다고…….

샤르망도 궁금했다.

자신은 그를 죽였고, 아힐은 시간을 돌려 자신을 살렸다.

고맙기도 하고 이곳에서 의지가 되는 존재.

하지만 그 어느 하나로 정의하기가 쉽지 않았다.

“관계랄 건…… 없는데. 내가 그에게 큰 빚을 졌을 뿐이야. 어떻게 정의를 내려야 할지 모르겠어. 확실한 건 그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난 날 받아준 엘리움을 배신할 순 없다는 사실이야.”

샤르망은 왕이 부탁한대로 최대한 말을 아끼는 대신 최대한 그에게 내비칠 수 있는 솔직함으로 쏟아냈다.

다행히 그에게 통했는지 노기가 누그러진 느낌이 들었다.

”그렇군. 아무리 속 좋은 그 녀석이라도 마음에 둘 리는 없겠지. 방심하진 마라. 난 네가 여전히 의심스럽다. 단지 주군께 충성할 뿐. 뿐만 아니라 왕께서 널 처분하라는 즉시 나는 목숨을 걸고 널 없앨 거다.”

케니즈가 끝까지 탐탁지 않은 낯으로 일갈했다.

“응, 명심하지.”

그러고는 더 여지를 주지 않고 그래도 휙 돌아 성큼 가버렸다.

샤르망이 뒤늦게 바닥에 주저앉으며 숨을 쉬었다.

“휴……. 이것도 보통 일이 아니구나.”

아직도 상대방과 대화를 하고 설득을 하려면 더 많이 배워야 할 것 같다.

이렇게 기가 빠지고 힘이 들다니.

이마저도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이 있기에 버텼다.

샤르망은 다시 서둘러 일어났다.

괜히 주저앉은 채 미적거리다 아힐에게 못 볼 꼴을 보일 수는 없었다.

뒤늦게 샤르망도 자리에서 벗어났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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