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이 너무 따뜻해서 문제다 (113)화 (112/148)

샤르망은 에빌이 다시 찾아온 것에 놀랐다.

“에빌?”

혼자 온 건지 멜피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늦은 시간에 다시 찾아와 죄송합니다. 불이 밝게 켜져 있길래 계신 듯해서……”

에빌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괜찮아. 혹시 놓고 간 거 있어?”

“아뇨, 그게 아니라 아무래도 조금 더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 다시 찾아왔습니다. 제가 설명이 부족했던 것 같아서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야. 괜찮으니 어서 들어와. 안 그래도 혼자 심심하던 참이었어.”

그러자 에빌이 쭈뼛쭈뼛하며 안으로 들어왔다.

“밤이라 진한 차는 좀 그렇지? 가볍게 허브차를 내려줄까?”

“괜찮습니다.”

샤르망은 에빌의 맞은편에 앉았다.

에빌은 아까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아까 에빌과 멜피네가 돌아간 후 샤르망은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혼자만의 생각과 확신일 뿐 속 시원히 풀어지지 않았던 샤르망은 오히려 에빌이 찾아온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에빌은 두 손을 깍지 끼고 머뭇거렸다.

“할 말이 있다면서. 뭐든 괜찮으니까 말해도 돼. 놀랄 이야기라면 미리 마음 다잡고 있을게.”

모든 준비가 다 됐다고 말하자 에빌이 작게 웃었다.

“샤르망 씨께서 아까 아르디나 할스레이크와 무슨 관계인지 여쭤보셨죠.”

“응, 그랬지.”

“아르디엘 할스레이크.”

“…….”

“그게 제 예전 이름입니다.”

아르디엘 할스레이크.

샤르망이 작게 읊조리듯 중얼거렸다.

아르디엘 할스레이크, 아르디나 할스레이크…….

설마?

“아르디나 할스레이크는 제 누이입니다. 샤르망 씨.”

“뭐?”

아까까진 궁금한 것도 잘 참고 놀라는 것도 잘 참았었는데 지금은 저도 모르게 펄쩍 뛰었다.

그럴 줄 예상했다는 듯 에빌이 다시금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샤르망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가 확인을 시켜 드릴 수 있는 게 마땅치 않아서…… 괜찮으시다면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샤르망은 잠시 에빌의 얼굴을 보다가, 그의 손을 악수하듯 맞잡았다.

순간 찬물을 맞은 것처럼 덜컥 신비로운 힘이 느껴졌다.

이내 할스레이크에 이미 도착한 것처럼 눈앞에 풍경이 펼쳐졌다.

샤르망은 허공에 뜬 채 놀란 눈으로 옆에 선 에빌을 쳐다봤다. 에빌의 모습이 바뀌어 있었다.

샤르망이 예전에 보았던 아르디나의 옷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제가 그곳에 있을 적 모습이라 좀 낯설 겁니다.”

“……말도 안 돼.”

골동품의 기억을 짚듯 아니면 단순한 마법을 부린 게 아니었다.

샤르망의 힘으로는 절대 깰 수 없는 마법 그 이상의 힘이 느껴졌다.

이게 신의 힘이라는 건가?

형용할 수 없는 힘이 마력과 충돌하며 아득한 느낌을 자아냈다.

더 놀라웠던 건 신의 힘을 전혀 가지지 않은 아힐의 마력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는 점이었다.

물론 신의 힘은 아니니 결은 달랐지만 그가 정말 인간의 힘을 초월했었던 마법사라는 게 뒤늦게 한 번 더 와닿았다.

“놀라시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샤르망이 그 힘이 버겁게 느껴져 숨을 몰아쉬자 금방 에빌의 힘 안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왔다.

샤르망이 어리벙벙한 얼굴을 했다.

“아, 아니. 왜, 왜……?”

“왜 그곳에서 나와 생활하는 건지 묻고 싶으시겠죠.”

버벅대던 샤르망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것도 그렇지만 할스레이크에 이런 인간적인 인간, 아니, 이렇게 평범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다니.

그들도 이렇게 정중하며 겸손할 수 있다는 게 그 무엇보다 놀라웠다.

그가 할스레이크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아까부터 계속했고 확신에 가까웠는데도 이렇게 놀랍다니.

샤르망은 가까스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랬구나……. 네가 그곳 사람일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직접 들으니 조금 놀랍네.”

“뭐, 이제는 거길 떠났지만요. 그래도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 권한은 여전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 건 걱정하지 않아. 아르디나 할스레이크가 누이라면 네가 차기 수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네.”

거긴 강한 힘을 가진 자가 우두머리가 된다고 했으니까.

아르디나와 같은 피를 타고난 아르디엘, 그러니까 에빌이 그 다음 힘을 가진 자였을 것이다.

샤르망의 추측일 뿐이지만.

“그곳에 있을 때는 그랬겠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샤르망 씨의 말대로 아르디나의 근심은 아마 원인이 저겠죠. 제가 그곳을 떠날 때 무척 화를 많이 냈었는데,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모양입니다.”

자신들의 감정도 제대로 모르는 그들과 달리 에빌은 아르디나의 상태를 아주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에빌은 자신의 이야기를 샤르망에게 조금 풀어주었다.

에빌은 예전부터 지상에 관심이 무척이나 많았었다고 했다.

할스레이크 안에서도 늘 특이하다는 소리를 들었을 정도로.

그곳에서 지낼 때도 지상에 홀로 내려와 여행한 적이 많았는데 그러다 멜피네를 만나게 된 거라고 말했다.

그 후 멜피네에게 푹 빠진 에빌은 그녀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어 이곳에 정착하기로 결심했다.

중간에 잠시 헤어지기는 했지만 에빌은 이곳을 떠나지 않았고, 덕분에 지금은 서로가 아니면 안 될 정도로 다시 붙어 있는 것이었다.

“그럼 이번에 날 도와줘도 누이를 볼 생각은 없다는 거지?”

“예, 물어도 모른다고 대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어디에 있는지, 누군가와 있는지. 멜피네가 귀찮아지거나 위험해지는 건 원치 않아서요.”

아르디나가 에빌이 그곳을 나온 이유가 멜피네 때문이라고 단정 짓고 있다면 에빌이 말한 걱정이 현실이 될 수도 있었다.

“알았어. 그 약속은 꼭 지키도록 할게. 실은…… 다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진짜 내가 할스레이크에 가고 싶은 이유야.”

“들어봐도 되겠습니까?”

“나는, 아니, 우리는 할스레이크에서 만든 마도구가 필요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린 그중에서도 마력 증폭기가 필요하거든. 이곳에서 만든 것과는 차원이 다른 힘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어.”

“아.”

에빌이 눈썹을 치켜떴다.

“마력 증폭기를 빌릴 수만 있다면 앞으로 있을 침략에 대한 대비도 할 수 있고, 마법사를 빠르게 양성할 수도 있지. 이곳은 신기하게도 마력을 타고난 사람들이 많은 편이거든. 그런데 마법사 한 명을 양성하는 데에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투자도 많이 해야 하는데 엘리움은 그게 좀 안 되고 있어. 오로지 마탑에 의지하고 있지. 그게 무척 안타깝고 아깝다고 생각해. 아까는 너희를 믿지 못해서 다 말하지 못했어, 그 점은 정말 미안해.”

“아닙니다. 당연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예민할 수 있는 이야기니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저희는 그저 샤르망 씨께 도움이 되고 싶었던 거라서요.”

“……그래서 할스레이크에 가고 싶었던 거야.”

“그렇군요. 그런 거라면 생각보다…… 더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에빌이 싱긋 웃었다.

“응? 그게 무슨?”

“할스레이크로 가기 전에 그건 다시 말씀드릴게요.”

대체 뭐길래 그러지?

“저, 샤르망 씨,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저도 한 가지 여쭤봐도 됩니까?”

“물론이지. 뭐든 물어봐.”

샤르망이 흔쾌히 허락했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혹시 샤르망 씨는 시간 여행을 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시간…… 여행?”

뭔가 이상한 게 보이나?

하긴, 할스레이크인인 그라면 신의 눈을 가진 자이기도 하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다른 건 아니고 처음 뵈었을 때부터 다른 사람들보다 시간이 배로 겹쳐 보여서요. 처음 보는 현상이라 단순히 생긴 궁금증이니 말씀해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시간을 돌리는 일에 엮인 사람 외에 샤르망이 과거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아보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에빌도 자신이 할스레이크인이라는 걸 말해주었으니 샤르망도 말하지 못할 게 없다 싶었다.

“음, 그런 것도 보이는구나. 시간 여행……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 사실 같은 시간을 한 번 더 살고 있는 건…… 맞아. 누군가 내게 큰 선물 같은 기회를 줬거든.”

“그렇군요. 절대 쉽지 않은 일인데 아마도 샤르망 씨를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하신 분인가 봅니다. 정말 대단한 분이군요.”

“어, 어?”

샤르망이 깜짝 놀라 손을 저었다.

“아니야, 절대 그렇지 않아.”

“아, 아닙니까? 제가 실례했군요. 시간을 돌리거나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건 신의 힘을 거스르는 일이라 할스레이크에서도 절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꼭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요. 그래서 그렇게 제가 착각했나 봅니다.”

“대단한 사람인 건 맞아. 그는 내가 본 사람 중에 가장 대단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거든. 물론 이 빚을 다 갚아야 하지만 말이야.”

“그런가요.”

“그럼 서로 비밀 하나씩을 공유한 셈이네.”

그 말을 내뱉다 말고 샤르망이 멈칫했다.

신의 힘을 가진 에빌에게 자신이 아예 다른 사람이라는 것까지 말해야 하나?

어쩌면 이미 알고 있는데 모른 척을 하고 있는 걸 수도 있었다.

아까 전 에빌이 할스레이크인이라는 걸 알게 된 후, 할스레이크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생겼으니 돌아가는 걸 조금 더 미뤄봐야지, 하는 생각만 하고 있던 샤르망은 아예 그 계획부터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할 수는 없었다.

샤르망이 그 생각에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 저기, 에빌.”

“네, 샤르망 씨.”

“혹시…….”

에빌에게 과연 밝혀도 괜찮은 걸까?

하지만 숨기기에는 샤르망이 간과한 부분이 너무 컸다.

지금 에빌이 말해주지 않았다면 영영 깨닫지 못하고 놓쳤을 사실.

에빌이 샤르망에게 겹친 시간을 볼 수 있다면, 아르디나도 분명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일전에 소로 숲에서 운 좋게 하라만이 샤르망의 출입을 허락받아 줬다면.

샤르망은 지금 에빌에게 그런 것처럼 아르디나에게도 과거로 돌아온 것을 들켰을 것이고, 어쩌면 더 큰 화를 입었을지도 모른다.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더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래도 에빌에게 확인을 하는 게 차라리 나을지도.

“혹시 내게 더 보이는 건 없어? 방금 네가 말한 겹친 시간이라든가, 아니면 내 영혼이…… 좀 이상하다든가 하는 거 말이야.”

에빌은 샤르망을 찬찬히 살폈다.

“음, 영혼을 볼 수는 없지만 영혼의 색이 다른 건 알고 있었습니다. 샤르망 씨께 뭔가 사정이 있을 거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아, 그런 것도…… 볼 수 있구나.”

역시, 신의 눈이라는 건 정말 인간을 초월하는 힘인 것 같았다.

“혹시 문제가 되는 부분입니까?”

“그렇…… 다기보다 아르디나 할스레이크가 내가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하면 어쩌나 걱정이 들어서. 사실 이렇게 갑자기 기회가 찾아올 줄은 몰랐어. 까마득하기만 하고 해결할 실마리가 보이지 않던 차였거든.”

실제로도 소로 숲 엘프들에게는 제대로 된 인사도 하지 않고 원래 몸으로 돌아가려고까지 생각하지 않았던가.

어서 빨리 계획을 다 뒤집어엎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이었다.

에빌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크게 문제 될 만한 것 같진 않은데요. 이런 말이 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 몸을 떠날 것이 아니라면.”

에빌이 샤르망의 표정을 보고 잠시 말을 멈췄다.

살피듯 고개를 갸웃한 에빌이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떠나려는 거군요.”

“…….”

“멜피네가 슬퍼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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