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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국이 너무 따뜻해서 문제다 (104)화 (103/148)

그날 오후 골목에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북적북적했다.

정확히는 미야 벨킨슨의 가게가 북적였다.

“샤르망 또 어디 갔나 봐?”

잠시 쉴 겸 놀러 온 바쿤이 물었다.

“…….”

미야가 꽃을 다듬기만 할 뿐 대답을 하지 않자 알론소가 손을 번쩍 들고 대신 대답했다.

“아침 배달 때부터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주 바쁘구먼. 진짜 180도 바뀐 것 간단 말이지? 그렇게 게을렀던 샤르망 맞아?”

“그런 소리 좀 그만할 수 없어? 지겹지도 않니?”

꽃을 다듬던 가위를 내려두고 물뿌리개를 쥐고 화분 쪽으로 가던 미야가 돌연 짜증을 냈다.

“별 이야기 안 했어.”

바쿤이 깜짝 놀라며 변명했다.

쟤는 또 왜 대낮부터 골이 났나 싶었다.

미야의 변덕이 하루 이틀 있는 일은 아니지만 오늘은 확실히 기분이 저조해 보였다.

금방이라도 땅을 뚫고 들어갈 것 같은 느낌에 바쿤은 쩝 입을 닫고 미야가 내려줬던 남은 차를 벌컥벌컥 마셨다.

하지만 그 침묵도 오래가진 못했다.

바쿤은 일을 하는 중에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일만 하는 편이라 쉬는 시간에 모든 걸 쏟아 내야 했기 때문이다.

“너도 다음번에는 소로 숲에 가보는 건 어때?”

“거길 내가 왜 가?”

“거기 숲이 엄청 빽빽하더라고. 네가 살던 곳과 똑같지는 않겠지만 한 번 가보는 게 좋겠다 해서.”

“…….”

미야는 또 침묵했다. 그러자 바쿤이 소로 숲에서 있었던 일을 줄줄이 이야기했다.

“샤르망이 무슨 짓을 해놓은 건지 환영의 환영을 하더라고. 드워프를 반기는 엘프라니, 너 같은 괴짜가 또 있나 싶었다니까? 뭐, 싫으면 하는 수 없고. 하지만 너도 가끔은 고향이 그리울 거 아냐. 안 그래?”

미야는 화도 나고 머릿속이 무척이나 복잡한 상태였다.

“거기가 안전할 거라는 보장이 어디 있어?”

그러자 바쿤의 눈이 짝짝이가 될 정도로 한쪽 눈썹이 높이 올라갔다.

“으잉? 뭔 소리야? 안전할 거라는 보장이 어디 있냐니?”

“샤르망 말만 믿고 가기에는 너무 위험하잖아.”

“그럼 누구 말을 믿어? 그리고 이미 갔다 왔는걸. 환대까지 받았다니까 여태 뭐 듣고 있었던 거야!”

“그쪽에서 다른 꿍꿍이가 있으면 다음에 안전할 거라는 보장이 없잖아. 그리고 기억 잃은 샤르망의 말을 믿기엔 너무 무모한 거 아냐? 하다못해 걔가 기억을 잃은 게 아니라 샤르망 몸에 누가 들어가 있는 거면!”

“아니, 대체 오늘 왜 이래? 아침 대신 꽃 이파리라도 먹었어?”

바쿤의 말이 잘못된 건 아니었다.

자신들은 서로를 속이는 일이 없었다.

그렇기에 누군가 말을 하면 믿어주는 게 당연했다.

바쿤의 말대로 소로 숲 엘프들이 바쿤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는데.

잘 알고 있는데도 이 복잡한 감정을 풀어낼 길이 없었다.

샤르망 노엘 켄더스는 너무 위험한 인물이었다.

지금도 믿기진 않는다.

그녀는 정말 샤르망 노엘 켄더스인가?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샤르망 노엘 켄더스가?

비록 반쪽이지만 엘프 중에서도 유난히 귀가 밝은 종족의 특성이 아니었다면 자신도 아직까지 깜빡 속아 넘어갔을 것이다.

그동안 그녀가 진짜 샤르망 페페라고 생각해서,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 모두 진심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근처에 인기척이 느껴지면 귀신같이 멈추던 행동과 말.

샤르망이 뭔가 숨기고 있다고 생각한 건 지금보다 훨씬 더 전의 일이었다.

말도 안 되는 억측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샤르망이 하던 행동들은 샤르망 페페의 행동이 아니었기에 파고들 수밖에 없었다.

페페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자신들을 속이고 있는 줄은 알았지만.

그 존재가 하필이면 샤르망 노엘 켄더스일 줄은 몰랐다.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어떻게 그런 일을 벌인 거지?

대체 무슨 속셈을 가지고 있는 거지?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 거지?

하지만 그동안 샤르망 노엘 켄더스가 벌인 일이라곤 페페의 집을 청소하고 주변을 깨끗이 하는 것.

궁에서 부르는 등의 무슨 일이 있지 않고선 매일 부지런히 가게 문을 열고 닫는 것.

수시로 골동품들을 닦는 것.

미야가 무거운 화분을 옮겨야 할 때 부리나케 다가와 화분을 들어주고 옮겨준 것.

차 우리는 법을 알려주자 기뻐하며 종종 차를 우려 주겠다고 한 것뿐이었다.

그나마 의심스러운 걸 고르라면 륀트벨에서 제물로 쓰이기 위해 버려지다시피 해서 왔다는 사람들을 거뒀다는 것.

그러나 그마저도 왕궁 기사단을 도와주며 엘리움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거기다 바쿤을 소로 숲에 소개시켜 주기도 했고, 소로 숲 엘프들과의 거래로 엘리움이 꽤 많은 이득을 얻고 있다는 것도 미야는 다 알고 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지금껏 그들은 서로가 그릇 개수도 몇 개인지 공유할 정도로 친했으니 샤르망이 해온 일을 모르는 게 더 이상했다.

하다못해 가장 어린 알론소도 다 아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더 의심이 갔다.

지금 페페의 몸에 있는 것이 진짜 샤르망 노엘 켄더스라면 그럴 이유가 전혀 없지 않은가?

아무리 우리를 속이기 위해서라도 이렇게까지?

그렇다고 그녀를 믿을 수도 없는 이 상황에, 미야는 생전 느껴본 적 없던 두통을 느끼고 있었다.

‘미안해, 미야.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내 과오를 지울 수 없다는 걸 알아. 나도 내 잘못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엘리움을 지키고 싶은 마음은 정말 진심이었어.’

‘아주 조금만 시간을 주면 안 될까? 아힐 더프의 부탁과 샤르망 페페의 부탁만 해결하고 나면 내가 조용히 스스로 떠날게. 그때까지만 네가 한 번만 눈감아 주면 안 될까?’

아무리 반성을 했다고 해도, 다신 엘리움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겠다고 약속해도 그걸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미야가 볼 때 그녀의 말은 모두 진심처럼 보였지만 절대 믿을 수 없었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륀트벨 사람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이 와중에 아힐 더프는 그녀에게 대체 무슨 부탁을 한 건지.

거기에 페페가 했다는 부탁은 또 뭔지.

차라리 가면이 벗겨졌으면 본 모습을 드러낼 것이지.

왜 자신에게 사과를 하고 부탁을 하고 비는 건지.

떨리는 몸, 얼굴, 그 진심 어린 표정까지.

그게 연기라면 정말 대단한 여자였다.

그녀가 울 때는 미야도 마음이 아팠다.

만약 그 모든 게 진심이라면.

그땐 어쩌지?

그간의 모든 일이 미야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짜증나, 정말! 어쩌라는 거야?”

“아우, 깜짝이야. 진짜 왜 저래?”

“뭐! 넌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무것도 모르긴! 네가 이상한 건 잘 알겠다! 기억 잃은 샤르망이 이상한 게 아니고 순전히 저가 더 이상하구먼! 애먼 샤르망 잡지 말고 너나 찬물 마시고 정신 차려! 그리고 정신 차리면 이따 저 가게나 가보던지. 아무것도 안 적어놓고 자리를 비우니까 이상하잖아. 알렉산드로 영감이 샤르망 가게에 손님 뜸하면 수시로 살펴보라던 거 잊었어? 에잇, 간다! 가.”

바쿤이 더 있다가는 불똥이 튈 것 같은지 일을 하러 가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쿤과 미야 벨킨슨 사이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알론소도 같이 따라나서기 위해 벌떡 일어났다.

오늘은 알렉산드로 님이 따로 시킨 일이 없어서 느긋하게 놀다 가려고 했는데, 괜히 화를 입을 것 같았다.

바쿤은 잔뜩 날이 선 미야 벨킨슨을 두고 알론소와 함께 꽃집에서 나왔다.

“느긋하게 쉬다 가려고 했더니 엄청 뭐라고 하는구먼.”

“페페 가게 한 번 더 들를까요?”

“냅둬. 급하게 어딜 간 모양이지. 내일 아침에도 배달할 거잖아?”

“예, 그럼요!”

“내일 아침에는 나타나겠지. 그나저나 둘이 싸웠나, 왜 저러는지 모르겠네. 너도 가서 쉬어!”

“예, 바쿤 아저씨!”

“오냐.”

바쿤이 양갈래로 가지런히 땋아 묶은 거칠거칠한 머리를 휘날리며 다시 일을 하기 위해 힘차게 공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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