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합니다.”
남자가 샤르망의 부축을 받아 주춤 다시 일어섰다.
샤르망은 단단히 잠갔던 자물쇠를 풀고 문을 열었다.
“우선 들어와. 마침 전해줄 것도 있었으니 잘 왔어.”
“제게 말입니까?”
에빌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쭈뼛쭈뼛 샤르망을 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앉아.”
“예.”
샤르망은 에빌이 앉는 걸 확인하고 분주하게 몸을 움직였다.
에빌에게는 지금 조금 시원한 차가 필요할 것 같다.
자신도 궁에서 바로 온 상태였기 때문에 시원한 것이 필요했다.
평소보다 빠르게 차를 내린 샤르망은 마법을 써 따뜻하게 우려진 차를 순식간에 차갑게 만들었다.
샤르망이 에빌에게 내밀었다.
“마셔. 지금은 반지보다 이게 필요한 것 같으니까.”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갈수록 날씨는 더워지는데 남자는 약해도 너무 약해 보였다.
거기다 작은 충격에도 바로 주저앉는 부실한 하체라니.
샤르망이 쪽지를 건네주면 더 놀라서 심약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에빌은 홀짝홀짝 조심스럽게 차를 마시더니 점점 안정을 되찾았다.
결국 그 자리에서 차를 바닥까지 비운 에빌이 겸연쩍은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민폐를 끼쳤군요.”
“아니야. 그보다 왜 다시 반지를 찾을 생각을 한 거야?”
에빌이 말을 잇지 못하고 하릴없이 엄지로 빈 찻잔만 쓸었다.
“마음 정리가 다 됐다고 생각해서, 반지를 떠나보내고 나면 후련할 줄 알았습니다.”
“응.”
“그런데 그날부터 그녀가 계속 꿈에 나와요. 자꾸 원망을 합니다. 그녀는 이곳에 있지도 않은데. 제가 정리하지 못한 탓인 거죠.”
“……그래서 다시 찾으러 왔어?”
“못 잊겠습니다. 저는 아마 안 되나 봐요. 잊을 수가 없나 봅니다. 그래서 찾으러 왔는데 이미 늦었군요.”
7년을 아파하고서도 잊지 못했다고 에빌이 말했다.
샤르망은 그때 느꼈던 그 아릿한 감정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결국 에빌은 그녀를 잊지 못했다.
“반지는 딱 맞는 주인을 찾아갔어.”
에빌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가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습니까. 그럼 차라리 다행이군요. 애초에 그저 물건일 뿐인데 제가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했었던가 봅니다. 죄송했습니다. 진짜로 떠나보낼 때가 된 것 같네요.”
샤르망이 차를 내리며 미리 꺼내뒀던 쪽지를 테이블 위로 쓱 밀어 넣었다.
“반지를 산 손님이 남긴 거야. 반지를 판 사람한테 관심이 아주 많더군.”
그 말에, 자리에서 일어서던 에빌이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샤르망이 내민 쪽지를 받아들었다.
“7년을 아파하고서 결국은 못 잊어 다시 찾아오고서는 뭘 또 그렇게 빨리 체념해?”
“7년이요? 그걸 어떻게…….”
놀란 에빌이 눈을 크게 떴다.
“적어도 되찾고 싶은 반지였으면 누가 가져갔는지.”
‘누가…… 팔았나요? 혹시 알 수 있나요?’
“어디에 사는 사람이었는지, 무슨 말을 하면서 사 갔는지. 언제 사 갔는지.”
‘남자였나요? 머리색은 어땠죠? 저와 비슷했나요? 긴 머리였을까요? 이걸 판 사람이 어디서 사는지…… 아. 미안해요. 제가 너무 질문만.’
“인상착의는 어땠는지, 이름을 알 수는 없는지.”
‘어디, 어디 있는진 알 수…… 없겠죠? 판매한 사람의 정보가 남아 있나요? 언제 팔았죠? 오래 됐나요?’
“그중 하나 정도는 물어볼 수 있잖아.”
샤르망이 에빌을 쳐다봤다.
놀란 눈으로 계속 샤르망을 쳐다보던 에빌이 쪽지를 열었다.
에빌의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아.”
“누군가 반지를 알아보고 사 갔을 수도 있는 일이거든.”
샤르망의 말에 에빌의 눈에 순식간에 고인 눈물이 아래 눈꺼풀 가운데 매달려 머물다 톡 떨어졌다.
“멜피네.”
에빌이 쪽지 끝자락에 대문짝만 하게 적힌 이름을 불렀다.
“어디, 어, 어디에 있습니까? 언제, 언제 사 갔습니까? 금발 머리의 여자가 맞습니까? 청초하고 아름답게 생긴…… 아니.”
에빌이 뒤늦게 횡설수설했다.
“또 온다고 했어. 하지만 기다리지 못하겠거든 그 주소로 찾아가 봐.”
에빌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쪽지를 쥐고 샤르망을 쳐다봤다.
샤르망이 말했다.
“운명이 정말 있나 싶었는데 정말 여기 있네.”
에빌이 가까스로 평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그건 멜피네에게 직접 듣는 게 좋지 않겠어? 당신처럼 상대가 자신을 완전히 떠났다고 생각하면서 줄곧 기다렸는지도 모르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감사합니다.”
에빌이 땅에 박을 정도로 인사를 하더니 기다리지 않고 직접 그 주소로 찾아가겠다고 말했다.
“꼭 만나길 바라.”
샤르망은 그런 그에게 작은 응원을 해줄 뿐이었다.
에빌이 돌아간 후 샤르망은 그제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미지근해진 차를 다시 차갑게 만든 뒤 단숨에 마셨다.
“아, 시원하다.”
쉬고 싶지만 한 시간이나 가게를 늦게 열었으니 분주하게 움직여야 했다.
그래도 오래 헤어졌던 연인이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괜히 흐뭇해졌다.
사랑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지만 그 정도의 절절함이라면 한번쯤 겪어볼 만한 일이겠다 싶기도 했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그때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샤르망의 눈썹이 꿈틀했다.
“오후에 간다니까 또 왜 왔어?”
“오늘은 저 혼자 왔는데요.”
펠릭이 들어오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퍽도 고맙다.”
“안 그래도 화를 내실까 봐 내기로 한 명만 오기로 했습니다.”
“또 네가 벌칙이군.”
“이번에도 이겼습니다만.”
“참 이길 것도 없다.”
“왜 여태 친절하시다가 정체가 탄로 나니까 원래대로 돌아오십니까?”
샤르망이 고개를 돌려 힐끗 펠릭을 본 뒤 다시 정리에 집중했다.
“잘 보일 필요 없잖아.”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스승님은 역시 입에 칼이 든 게 분명합니다.”
“알았으면 이리 와서 이것 좀 옮겨 봐.”
샤르망은 완전히 과거처럼 돌아왔음을 느끼며 괜히 더 짓궂게 굴었다.
“그거 보세요. 제가 필요하시죠?”
“다시 갈래?”
“……아니요.”
펠릭이 큼직한 몸을 구기며 샤르망 옆에 답삭 붙었다.
정리와 청소를 끝마친 샤르망이 펠릭에게 말했다.
“내일은 함께 입궁하자. 단장들과 만나야 하니까 해 뜨면 바로 와. 그리고 그 후에는 당분간 가게에 찾아올 필요 없어. 가게 문을 닫을 예정이거든.”
“어디 가십니까?”
“응, 며칠 못 올 수도 있으니까 네가 책임지고 셋이 잘 지내고 있어.”
펠릭의 몸이 일순간 경직했다.
“어디를 가시는 건데요?”
걱정을 숨기지 못하고 펠릭이 물었다.
“……걱정하는 그런 거 아냐. 금방 돌아올 거래도?”
“말씀해주실 수는 없는 겁니까?”
“으음, 그게 아니라. 잠시 마탑에 다녀올 거야.”
“마탑이요? 여기서 마탑이라면…… 룬힐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아.”
“미친……!”
펠릭이 벌떡 일어났다.
“거긴 위험합니다. 룬힐은 엘리움을 수호하고 있지 않습니까.”
“너 방금 욕한 것 같은데.”
“거기서 만약 스승님 정체를 알기라도 하면 어떻게 합니까?”
“위험할 일은 없을 것 같긴 한데. 그래도 각오도 하고 가는 거야.”
“그러니까 왜요!”
“이대로 있을 순 없잖아. 방법을 찾아야지. 도와주기로 한 사람이 있어.”
“그게 누구…… 설마 그 마탑주입니까? 감옥에 있는 동안 몇 번 왔었던.”
아힐이 감옥에도 다녀갔던 모양이다.
아, 전에 고위 마법이나 저주가 있는지 직접 확인했다고 했던 것도 같다.
그런데 그때 말고 또 갔었던 건가.
샤르망이 끄덕였다.
펠릭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채 펴질 못했다.
“다녀와서, 다녀와서 말해줄게. 지금은 나도 정리가 안 돼. 확실한 건 다시 올 거니까 걱정하지 말란 이야기야.”
펠릭이 한숨을 길게 쉬었다.
마치 샤르망에게 들으란 듯이 길고 소리도 컸다.
“막아도 가실 거죠?”
“…….”
“그럼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만약 약속하신 시일이 지나도 안 오시면 저희가 가겠습니다.”
거기까진 막을 수 없겠다 싶어 샤르망이 승낙했다.
어차피 아힐도 며칠 걸릴 거라고 해줬으니까.
마지못해 끄덕였지만 한참이 지나도 펠릭의 표정은 펴질 기미가 안 보였다.
“또 이런 식으로 사라지는 일은 없게 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결국 샤르망이 한 소리를 더 얹었다.
“그게 말처럼 쉽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샤르망이 생각하는 걱정보다 펠릭의 표정이 더욱 좋지 않아 보였다.
뭐가 더 있나?
결국 샤르망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왜. 할 말 있으면 해. 그런 얼굴 하고 있지 말고.”
펠릭은 머뭇거리며 몇 번 심호흡을 했다.
샤르망이 재촉하자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실은 스승님이 사라진 그 이후부터 자꾸 이상한 악몽을 꿉니다.”
어린애도 아니고 다 큰 성인이 악몽 때문에 괴로워하나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그게 지속되면 아무리 그라도 정신이 피폐해질 것 같긴 했다.
“대체 무슨 악몽이길래?”
악몽을 떠올린 펠릭의 얼굴이 구겨졌다.
“자꾸 저희가 스승님을 죽이는 꿈을 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