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이 너무 따뜻해서 문제다 (81)화 (80/148)

라디가 등을 돌리며 샤르망을 피했다.

커다란 등이 단단히 토라진 것처럼 보였다.

‘제대로 화가 났네.’

위험할까 봐 라디만 놔두고 셋이 임무를 나갔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샤르망이 가까이 다가가자 라디가 어깨를 움찔했다.

“여기서 보니까 아름다워 보이지.”

“……알 게 뭐야.”

말 걸지는 말라면서 또 말을 걸면 대답은 착실했다.

샤르망은 한참이나 라디와 나란히 서서 주황색 불이 가득한 엘리움 수도를 내려다봤다.

어디부터 말을 해줘야 할까.

이 모든 일의 열쇠를 찾고 나서 확실하게 설명해줄 생각이었는데 순서가 엉망이 되었다.

시간이 되돌려졌다고 말하면 믿어나 줄까.

아무리 녀석들이라고 그거까진 믿기 힘들 것 같다.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죽었는지 입 밖에 내고 싶지 않았다.

“눈을 떠보니까 전혀 모르는 천장이 보였어.”

“…….”

“도통 기억에도 없는 곳인데 심지어 거울 안에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있었지.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타국, 타인의 몸에서 눈을 떴다는 걸 알았어.”

그러자 라디가 속사포처럼 질문을 쏟아냈다.

“몸이 바뀌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다거나 하진 않았어? 우린 그날 모여서 술을 마시고 있었잖아. 혹시 그날 우리가 잠든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냐고.”

“나랑 말하지 않겠다더니.”

샤르망이 피식 웃자 라디가 다시 팩 고개를 돌렸다.

“시, 싫으면 관둬!”

샤르망이 라디의 말을 곱씹었다.

‘술을 마시고 있었다라.’

역시 되돌려지기 전의 일들을 기억하는 것은 자신뿐인 것 같았다.

“왜 이렇게 됐는지 알아내는 중이야. 그 후에 너희에게 제대로 말할 생각이었어. 이렇게 쉽게 날 알아챌 줄 몰랐거든.”

“우린 스승님이 그 작은 너구리처럼 변했어도 알아봤을 거라고.”

샤르망이 고개를 숙이며 작게 웃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너희가 절대 못 알아채길 바랐어.”

“그게 지금 할 말이야?”

“다른 사람 몸에서 눈을 뜨고 나서야 깨달았거든. 내가 너희를 지옥으로 몰아넣었구나.”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 난 스승님이 거둬주지 않았으면 지금도 좀도둑이 됐을 건데.”

“내 검을 훔친 놈이니 좀도둑에 그치진 않았겠지.”

“그건 그렇네.”

라디가 기분이 좀 나아졌는지 킥 웃음을 터트렸다.

“자, 방금 말한 건 펠릭한테도 말 안 했던 거야.”

그러자 라디의 입꼬리가 흐물흐물 풀어졌다.

“앞으로도 계속 말하지 마.”

“그래, 그러니까 삐지지 말고.”

“누가 삐졌대? 화 난 거야.”

“그래, 그게 그거지.”

“다르거든.”

샤르망이 비스듬히 몸을 돌렸다.

“우리가 살아 있는 이상 라칸은 우릴 편히 두진 않을 거다.”

“……그렇겠지.”

“하지만 그대로 당하지도 않을 거야.”

“스승님, 설마.”

라디가 표정을 굳혔다.

“그래. 라칸을 쓰러뜨릴 거다. 그래야만 모든 게 자유로워질 수 있어.”

“…….”

라디는 충격이라도 받았는지 말이 없었다.

하기야 무서울 것이다.

지금까지의 두려움과는 상대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충성과 복종으로 내면에서부터 쌓아 올린 공포란 그런 것이다.

“강요하진 않을 거다. 하지만 안전을 위해서라도 너흰 이곳에 있었으면 해.”

“무슨 소리야!”

라디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샤르망이 손으로 귀 한쪽을 막았다.

“왜 소리를 지르고…….”

“방금 이 개 멋진 사람이 내 스승님이구나, 속으로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는데!”

“개…… 뭐?”

샤르망이 한쪽 눈썹을 비뚜름하게 올리며 묻자 라디가 팔로 가드를 올리며 뒤로 주춤했다.

“아, 스승님 욕 아니라고. 스승님이 그놈을 쓰러뜨리든 씹어 먹든 스승님을 따를 거라고.”

“…….”

“우리가 언제 황제한테 충성했어? 스승님한테 충성했지. 이 당연한 걸 스승님은 모르고 우리한테 숨겼지만.”

라디가 뒤끝 있게 굴며 눈을 흘겼다.

도리어 할 말이 없어진 샤르망은 입을 다물었다.

“차라리 잘 됐어. 그놈이 스승님을 제 것처럼 생각하고 함부로 굴 때마다 아주 짜증났는데.”

라디는 아예 황제의 호칭을 바꿔버리고 후련한 듯이 말했다.

라디가 갑자기 샤르망에게 성큼 다가갔다.

“그러니까.”

“…….”

“다시는 숨기지 마. 이번엔 진짜 서운했으니까.”

나름의 심각한 엄포에 샤르망이 픽 웃었다.

“그래, 미안했다.”

“그래. 이번에는 스승님도 미안해해야 해.”

그래도 속은 풀렸는지 라디의 표정이 한결 좋아졌다.

라디가 샤르망의 양어깨를 짚고 요리조리 살폈다.

“원래 몸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거야?”

“찾고 있어.”

“얼른 찾았으면 좋겠다. 스승님 얼굴이 아닌 게 영 마음에 안 들어.”

“거울 보니 예쁘기만 하던데.”

라디가 그런 샤르망을 빤히 쳐다봤다.

“근데 스승님 좀 바뀐 것 같네.”

“내가?”

“응. 조금 더 뒤에 만났으면 바로 못 알아봤을지도 모르겠어.”

“안 좋은 의미?”

“스승님한테 안 좋은 의미가 어디 있어. 그냥 좀…… 분위기가 뭔가 말랑해졌어.”

샤르망이 별 해괴한 소리를 다 듣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랑이라니.”

“몰라. 그냥 말랑말랑해진 것 같아.”

샤르망이 몸을 돌렸다.

“무슨 말인진 모르겠지만 다 풀렸으면 내려가자, 라디.”

“난 여기서 스승님하고 더 같이 있고 싶은데. 더 있다 가자.”

라디의 조름에도 샤르망은 단호하게 손짓했다.

“빨리 내려와.”

라디의 입이 또 댓 발 나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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