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들이 우려하는 게 뭔지 알아. 이해하기 힘든 것도 당연해. 하지만 지금 륀트벨이 너희가 제물로 희생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어.”
셋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너희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제국을 상대로 너희들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해?”
“…….”
“…….”
“뭐……. 샤르망이 얽혀 있는 이상 쉽게 놔줄 거라고는 생각 안 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살린 만큼 너희들도 살려고 노력했으면 좋겠어. 아니, 발악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 이대로는 안 돼. 적어도 울타리 정도는 만들어야지.”
“무슨 말인지는 알겠습니다.”
샤르망이 심호흡을 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기사단 쪽에 친분이 있어. 안 그래도 그쪽 단장들이 내게 볼일이 많이 있어 보이거든.”
샤르망은 한동안 번갈아가며 제 기사들을 가르쳐 달라고 졸라대던 왕자와 사디나르를 떠올렸다.
“그래서 대화가 한결 쉬울 거야. 그러니 너희만 동의해 주면 된다고 생각해. 언제까지고 이방인 취급을 받을 수는 없잖아.”
“아무리 우리가 이따위 상태가 됐다고 해도 그래도 좀.”
라디가 영 찝찝한지 수긍을 하지 못했다.
“그냥 해.”
엘타인이 내뱉듯 툭 말을 던졌다.
당연히 시선이 엘타인 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엘타인은 팔짱을 끼고 의자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냥 하라고?”
라디가 불쑥 물었다.
“우릴 위해서라잖아.”
“아니, 뭐 이게 이렇게 쉽게 결정할 일이야? 아무리 우릴 위한다고 해도. 이러다가 샤르망이 돌아와서 원래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면 어쩔 건데. 샤르망 말을 거역할 거야?”
“안 돌아가.”
“뭐?”
“샤르망은 안 돌아간다고.”
엘타인이 눈을 떴다.
샤르망은 엘타인이 자신을 쳐다보자마자 고개를 홱 돌렸다.
“그건 엘타인 말이 맞다. 설령 샤르망이 돌아가겠다고 해도 내가 막을 거니까.”
“아, 형까지 왜 그래?”
“황제가 샤르망을 가만히 둘 것 같나? 우린 그냥 샤르망만 지키면 돼.”
펠릭이 샤르망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쪽과는 확실하게 결정한 뒤에 다시 말해주십시오. 그럼 따르겠습니다. 다만 우린 고개 숙이지 않을 겁니다.”
“어…… 그래.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텐데 순조롭게 협조해줘서 고마워. 물론 너희들이 숙이고 들어가라고는 안 할 거야.”
“그럼 그때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죠.”
“응. 안 그래도 내일 아침에 바로 왕궁에 다녀올 거거든. 최대한 빠르게 말을 전달하도록 할게.”
정적이 흘렀다.
아무래도 예민한 화제를 담은 대화다 보니 끊길 수밖에 없었다.
적국의 기사들을 가르치라니.
말도 안 되는,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건 샤르망이 더 잘 알았다.
하지만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만약 전쟁을 막지 못했을 때까지 대비하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했다.
그리고 이들이 이곳에 남아 조금이라도 안락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서였다.
샤르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만 갈게.”
막 나가려는데 펠릭이 따라 일어섰다.
“형, 어디 가게?”
라디가 물었다.
“밖에. 나가는 김에 같이 가시죠. 어차피 가는 길에 볼일이 있습니다.”
“어? 어, 그래.”
얼떨결에 펠릭과 함께 같이 나온 샤르망은 그와 나란히 걸었다.
“가게라도 들르게?”
“그냥 답답해서 바람이나 쐬러 나온 겁니다.”
“아, 난 또.”
둘은 말없이 한참을 걸었다.
그런데도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오래 함께 했던 펠릭이라 그런지, 숨 쉬듯 편안했다.
아직 해가 떨어지기 전이라 손님이 붐비는 가게가 많았다.
지난번 페페의 가게에 찾아와 계란을 던졌던 아이처럼 누군가가 화를 내면 어쩌나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다행히 페페의 가게와 가까운 거리까지 올 동안 누군가가 적대적인 눈빛을 보낸다거나 하는 등의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제자들과 함께 몇 번 갔던 식당에서는 친근한 인사를 받았다.
“이곳에서 지내보니 어때?”
어느새 사람들이 없는 한산한 거리에 들어섰다.
오랜만에 같이 걷는 게 나쁘지 않아 가게 가는 길을 빙 둘러 걸었다.
“뭐 나쁘진 않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게 될 줄도 몰랐고.”
“다행이네. 혼란스러웠던 거 다 아는데, 그래도 마음을 열어줘서 고맙다.”
“어차피 선택의 여지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쉽지 않은 결정이라는 거 알아. 여기 온 후 보낸 시간이 짧아서 아직 내가 믿음을 주진 못했겠지만 너희를 위험에 빠뜨릴 일은 결코 없어. 약속해.”
“알고 있습니다.”
샤르망이 조금 놀란 얼굴로 펠릭을 쳐다보다 이내 흠흠 헛기침을 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곳이 륀트벨에 비해 턱없이 작게 느껴질 거라고 생각해. 지도만 봐도 차이가 어마어마하니까. 그래도 매번 생사를…… 아니, 편히 지내기에는 여기가 훨씬 잘 맞을 수도 있어. 내가 엘리움 사람이라 그렇게 말하는 것만은 아니야.”
“그럴 수도 있겠죠.”
“좀 더 안정을 찾으면 지금보다 자유롭게 다닐 수 있을 거야.”
샤르망이 펠릭의 발 폭이 조금 넓어진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그래서 언제까지.”
펠릭이 샤르망의 길을 막듯 앞에 섰다.
“숨기실 겁니까?”
샤르망이 걸음을 멈춰 고개를 올려다봤다.
“응?”
“언제까지 제게 숨길 거냐고 여쭸습니다, 스승님.”
펠릭이 느긋하게 양쪽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허리를 굽혀 샤르망과 시선을 맞췄다.
행동과 달리 눈빛은 신중하기 짝이 없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계속 모른 척할까요.”
“저기, 뭔가 대단한 오해를 한 것 같은데.”
펠릭은 조금 망설였던 엘타인과 달리 아주 확신에 차 있었다.
“간밤에 엘타인을 보내길 참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스승님.”
샤르망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펠릭은 제 할 말만 했다.
‘잠깐, 엘타인을 보냈다고?’
“너…….”
“스승님을 옆에서 본 시간이 얼만데 제가 모를 것 같습니까?”
어쩐지.
엘타인보다 더한 놈이 있다는 걸 잠시 깜박했다.
“…….”
“제가 정답을 맞췄는데 머리 안 쓰다듬어 주실 겁니까?”
샤르망이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펠릭은 오히려 머리를 들이밀 기세였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예전에도 이런 모습으로 서로를 봤던 것 같은데.
“하, 정말. 나도 모르겠다.”
이미 어젯밤 한차례 들켜서 그런가.
모른 척하는 게 우습게 느껴졌다.
“네놈들은 왜 하나같이 그 모양인지. 모습이 완전히 바뀌었는데, 대체 어떻게 알아보는 건데? 어?”
“모르겠습니다. 그냥 스승님이 보입니다. 스승님이니까 스승님으로 보입니다. 곰곰이 이유를 곱씹어서 보고라도 올릴까요?”
이놈이나 저놈이나.
샤르망은 결국 포기하고 중얼거리며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짜증이 섞인 눈으로 고개를 드는데 펠릭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짜증 대신 헛웃음이 터졌다.
“네가 제일 괘씸한 놈이야. 알고 있어?”
“확인 안 해주셔도 압니다, 스승님.”
“그냥 모르는 게 너희도 더 편할 텐데 왜 굳이.”
“그러고 보면 스승님도 매번 맞는 말만 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차라리 욕을 하지?”
“제가 어떻게 감히.”
샤르망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 뚝 웃음을 멈췄다.
샤르망의 얼굴이 죄책감으로 허물어졌다.
“……미안하다.”
“…….”
“그런 일을 겪게 해서.”
“스승님이 탓하실 일이 아닙니다.”
“목숨을 잃을 뻔했어!”
“스승님은 늘 그러셨잖습니까. 이제 아시겠습니까? 저희 마음을요.”
할 말이 없었다.
아니, 펠릭이 할 말을 없게 만들었다.
샤르망이 괜히 입을 삐죽였다.
“라디 녀석도 스승님을 많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녀석이어도 스승님만 보는 녀석이지 않습니까.”
“그래, 잘 알고 있어.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이게 내가 너희를 지키는 일이야. 너도 당분간만 모른 척해. 녀석이 알면 얼마나 날뛰겠어.”
“안 날뛰는데.”
라디가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왔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몹시 불쾌한 얼굴의 라디가 보였다.
“진짜 짜증난다, 스승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