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르망이 상체를 뒤로 물렸다.
“잠깐, 너 왜 이래.”
“샤샤 맞지.”
“샤샤라니. 방금 내 이름을 부른 줄 알았는데.”
샤르망이 빠르게 변명했다.
반쯤 술이 깼지만 너무 놀란 탓에 머릿속이 멀미가 나는 것처럼 휘몰아쳤다.
“거짓말하지 마.”
“무슨 거짓말을…… 했다고 그래. 그냥 실수야.”
“실수라고?”
아무거나 내뱉은 말에 아차 싶었다.
그냥 잘못 들었다고 계속 밀어붙일걸.
실수라니, 이런 바보 같은.
더운 숨이 나왔다.
“취해서 그래. 이름이 같잖아. 그러니까 네 스승이 아니라 나를 부르는 줄 알았지.”
엘타인이 피식 웃었다.
“샤르망 부른 거 아닌데.”
“뭐? 너야말로 거짓말하지 마. 네가 방금.”
엘타인이 더 말해보라는 듯 피식피식 웃으며 샤르망을 쳐다봤다.
착각 한 번 제대로 한 샤르망이 입을 딱 다물었다.
‘아, 샤르망이 아니라 방금 샤샤라고 했지.’
정신이 번쩍 든 줄 알았는데 연달아 실수를 해버렸다.
명백한 자신의 실수였다.
젠장.
“내가 방금 뭐.”
“사실은 내 별명도.”
“샤샤였다고 변명이라도 하게? 또 해, 변명. 실수고 뭐고 다 해.”
“…….”
평정 유지를 위해 샤르망은 눈도 감고 입도 닫았다.
팔이 잡힌 채 서로의 숨소리가 가까운 그 거리에서 샤르망이 잠시 숨을 골랐다.
제대로 말을 하기 전까지는 자신을 놔주지 않는다는 뉘앙스가 아래에 깔려 있었다.
그냥 잘못 들었다고 밀어붙일까.
이미 뭔가를 알고 떠본 게 확실했다.
어쩐지 술을 때려 붓는 게 오늘 영 이상하긴 했어.
망할 놈들!
어차피 여기서 더 거짓말을 해봤자 우스운 꼴이 날 것 같았다.
그간 너무 편해서 긴장을 너무 풀었다.
그 와중에도 차라리 엘타인이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가끔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의문이 드는 녀석이긴 해도 그나마 셋 중에서 가장 침착한 놈이니.
“그래, 맞아. 이 집요한 놈아.”
“…….”
“둘한테는 아직 말하지 마. 나중에 내가 다 제대로 설명할 테니까.”
샤르망이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
엘타인이 답이 없었다.
“어? 때가 되면 내가 다 말할 테니까…….”
샤르망이 눈을 뜨자 바로 코앞에서 자신을 빤히 보고 있는 엘타인이 보였다.
그때였다.
엘타인의 표정이 갑자기 무너지더니 그대로 샤르망을 껴안았다.
사르륵 엘타인의 긴 머리카락이 커튼처럼 흐트러졌다.
“아.”
압박감이 엄청났다.
느닷없이 큰 덩치가 꽉 안으니 취기가 다시 올라오는 것 같았다.
“야, 잠깐.”
샤르망이 엘타인의 어깨와 등을 두드려보았으나 미동도 없었다.
오히려 더 꽉 죄어오기에 샤르망은 포기하고 가만히 기다렸다.
이런 식으로 알리려던 건 아닌데.
‘완전 실패다.’
샤르망은 낭패감에 포기하고 멀거니 안겨 있었다.
한참이나 으스러질 듯 강한 힘으로 가만히 껴안고 있던 엘타인이 샤르망을 안은 채 허리를 숙여 샤르망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샤르망 맞지.”
“…….”
“샤샤 맞지. 빨리 말해.”
샤르망이 완전히 체념하고 엘타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맞다고.”
“하.”
엘타인이 숨을 토했다.
“설명할게. 미리 말해두지만 이건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안 해도 돼.”
“…….”
“그냥 샤르망이면 됐어. 그딴 거 설명 안 해도 돼.”
샤르망은 엘타인을 그대로 느꼈다.
‘결국 나를 알아봐 주는구나. 내가 아무리 숨겨도.’
그들에게 아주 조금 깔려 있던 원망이 사르르 사그라들었다.
“……음, 그래. 알았으니까 이제 좀 떨어질까?”
“응.”
하지만 엘타인은 그러고도 더 한참 샤르망을 놓고 놔주지 않았다.
“엎어치기 전에 이제 좀 풀어.”
결국 샤르망이 협박을 한 뒤에야 엘타인이 팔을 풀었다.
그러나 한껏 좁혀진 거리가 벌어지진 않았다.
엘타인이 샤르망의 얼굴을 한참 뜯어보더니 불만스럽게 내뱉었다.
“전이 더 나아.”
샤르망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나도 내가 원해서 이렇게 된 건 아니야.”
“원래 몸은.”
마법사라서 그런지 파악이 빨랐다.
샤르망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몰라.”
“뭐?”
“아직 모른다고. 방금 말했잖아. 내가 원해서 된 일이 아니라고.”
“찾아올게.”
엘타인이 망설임 없이 말했다.
얼굴은 지금 당장이라도 찾으러 떠날 것 같았다.
“내 몸이 어디 있는지는 나도 모르지만 지금 대륙 어디를 뒤져도 없는 건 확실해.”
“없다고?”
“시간에 갇혀 있다고 들었어. 그러니까 나중에 설명해 줄게. 펠릭과 라디 녀석한테는 아무런 말 하지 마. 할 수 있지?”
“응.”
엘타인이 순순히 대답했다.
“이곳에서 널 아는 사람은?”
“없어.”
“그럼 됐어.”
“혹시나 해서 말해두겠는데 당장 엘리움을 떠날 생각 없어.”
샤르망이 엘타인을 유심히 보며 말했다.
“여기 있겠다고?”
아니나 다를까, 엘타인이 인상을 구겼다.
“이곳에서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어.”
엘타인은 못마땅한 얼굴을 했지만 샤르망의 의지를 막을 수는 없었다.
애초에 단 한 번도 막은 적도 없었다.
그렇다고 걱정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지만.
엘타인은 샤르망을 계속 뚫어져라 쳐다봤다.
“정말 샤샤 맞지.”
“제발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돋는 느낌에 샤르망이 눈살을 찌푸리자 엘타인의 얼굴이 풀어졌다.
“한두 번도 아니고.”
“언제부터 알아챘는데?”
“내 머리 헝클어뜨렸을 때.”
“대체 내가 언제?”
“기억 못하면 말아.”
샤르망이 눈썹을 치켜떴다.
엘타인이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계속 의심은 갔었어. 확신이 필요했을 뿐이지.”
“다른 모습이잖아.”
“그게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는데.”
샤르망은 그런 엘타인을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 네놈은 원래 그런 놈이었지.”
샤르망의 뚱한 목소리에도 엘타인이 웃었다.
술이 완전히 깨고 있었다.
아니, 실은 전혀 깨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숨기려고 했는데 들키고 나자 이상하게도 행복회로가 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서로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던 둘은 무심코 눈을 마주쳤다.
곧 누가 먼저 뭐라 할 것도 없이 허탈한 웃음이 터졌다.
“이게 대체 무슨.”
샤르망이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별 일을 다 겪어보네.”
엘타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끝까지 감출 셈이었어?”
엘타인이 물었다.
“……때 되면 말하려고 했어.”
샤르망은 아예 긴장을 놓고 말했다.
차라리 이렇게 된 거 일을 빠르게 시작하자는 마음이 들었다.
“엘타인.”
“응.”
“넌 내가 무엇을 한다고 해도 따를 건가?”
“응.”
“네가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해도?”
“그래.”
망설임 없는 대답에 샤르망이 자심감을 얻었다.
“위험하다고 해도?”
“늘 위험했잖아.”
“늘…… 은 아니지.”
“넌 늘 그랬어.”
샤르망은 이해하지 못할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엘타인은 자신의 말을 확신했다.
샤르망은 늘 위험한 선 그 어딘가에 발을 딛고 있었다.
‘너흰 이곳에 있어.’
‘무슨 뜻이야, 그게.’
‘여기서부터는 나 혼자 들어간다.’
‘스승님 미쳤어?’
어느 더운 여름날이었다.
상급 이상의 대형 마물들이 천연 마정석이 있는 대형 굴과 숲을 차지했다.
라칸의 명을 받아 토벌을 하러 나온 길.
이번 임무는 한 중대가 투입되어도 버거울 정도의 난이도였다.
그걸 단 4명이 해결하러 온 것이다.
숲 입구에서부터 난이도가 상당했다.
무더운 날이 손으로 꼽힐 정도로 여름조차 그렇게 덥지 않은 륀트벨인데, 그 해는 유난히 더운 날씨가 지속되고 있었다.
추운 기온에 익숙한 륀트벨인들은 버티기 어려운 날씨였지만, 마물은 날씨에 상관없이 서로를 잡아먹고 힘을 키우며 또 빠른 속도로 새끼를 쳐서 그들의 영역을 키워갔다.
보름 가까이 이어진 싸움.
숲 일대를 모두 청소하고 남은 굴 앞에 네 명이 섰다.
지칠 대로 지쳐 잠시 휴식을 갖는 사이 샤르망 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원거리로 독을 뿌려 치명상을 입히는 가장 까탈스러운 마물이 틀고 앉은 굴에 혼자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말도 안 됩니다. 저희도 같이 들어갈 겁니다.’
‘거추장스럽다.’
‘헛소리 하지 마. 무조건 같이 움직일 거니까.’
‘명령이야.’
그러고는 눈 깜짝할 새 굴 입구를 무너뜨리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물론 그날은 셋이 기어코 샤르망의 명을 어기고 무너진 굴 입구를 뚫고 들어갔었다.
하지만 샤르망은 그런 사람이었다.
꼭대기 하나만을 보며 인정사정없이 굴다가도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면 제 사람들을 챙기고 있었다.
제 목숨까지 바쳐가면서.
샤르망은 절대 그런 적 없다고 매번 발뺌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샤르망이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엘타인은 샤르망이 차라리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고 부탁을 할 때가 더 좋았다.
사실 내치지만 않는다면 샤르망이 뭘 하든 다 좋지만. 혼자서 위험을 무릅쓰려는 것도 내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펠릭과 엘타인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뭘 하려는 건데?”
“나는 라칸을 쓰러뜨릴 거다.”
엘타인이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지금은 이해가 안 되겠지만 나는 륀트벨로부터 이곳을 지킬 거야. 그리고 라칸이 계획하고 있는 정복 전쟁을 막을 거다.”
샤르망이 다시 엘타인을 쳐다봤다.
“그래. 스승의 명이라면 따라야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엘타인이 말했다.
“실패할 수도 있어. 하지만.”
“응.”
“너희만큼은 내가 지켜.”
샤르망과 눈을 맞추고 있던 엘타인이 피식 웃었다.
“그건 우리가 할 말이고.”
엘타인이 다시 샤르망의 어깨에 머리를 툭 기댔다.
“우리 곁으로 돌아왔으니까 됐어. 없어지지만 않으면 돼. 뭐든 할 테니까.”
그 말에 샤르망은 비로소 편히 웃으며 엘타인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