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씻고 와.”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는지 아니면 그냥 놀란 건지 얼빠진 채 그대로 굳어버린 제스퍼를 달래 욕실로 보냈다.
그러자 들어감과 동시에 서두르는 소리와 함께 얼굴만 냅다 씻은 제스퍼가 다시 나왔다.
채 1분도 되지 않아 얼굴도 제대로 닦지 않은 채 젖은 얼굴로 나온 제스퍼가 겔린과 샤르망을 번갈아 쳐다봤다.
“엄마 진짜…… 온 거야?”
“앞에 계시잖아.”
샤르망은 얼빠진 제스퍼의 얼굴에 웃음을 참으며 대신 말해줬다.
겔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제스퍼가 짐 꾸러미를 보고 머뭇거렸다.
“어…… 그럼…… 지금…….”
제스퍼가 여전히 할 말을 못 찾고 우물쭈물했다.
지금 바로 가야 하는 건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말 가긴 하는 건지 고민하고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천천히 해도 돼, 제스퍼. 엄마는 제스퍼가 하자는 대로 할 거야.”
겔린이 다독이자 제스퍼가 고심하더니 다시 물었다.
“그럼 우리 원래 집으로 가는 거지?”
“맞아.”
재스퍼가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다 힐끔 샤르망 눈치를 봤다.
기척도 알아채는 샤르망이 그 눈길을 모를 리 없었다.
샤르망은 피식 웃으며 제스퍼가 원할 답을 내주었다.
“언제든지 와도 괜찮아.”
“정말? 놀러 와도…… 돼?”
“물론이지.”
그러자 제스퍼의 얼굴이 보름달처럼 밝아졌다.
“그럼, 지금…….”
제스퍼는 속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지금 가고 싶다고 말을 꺼냈다.
내심 걱정이 많았던 겔린도 제스퍼의 말을 듣자 얼굴이 밝아졌다.
제스퍼와 겔린이 서로를 마주 봤다.
겔린이 무릎을 굽혀 제스퍼와 눈을 마주치고 말했다.
“엄마가 정말 많이 잘못했어. 이제는 다신 그러지 않을게. 같이 집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자, 제스퍼. 엄마가 정말 미안해.”
“……괜찮아. 아! 잠깐만.”
제스퍼가 겔린의 손을 잡으려다가 다시 등을 돌려 제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 나와 샤르망에게 두 손을 내밀었다.
“고마워. 그렇지만 약속은 기필코 지킬 거야.”
제스퍼가 내민 건 회중시계였다.
원래는 겔린의 것이었지만 형이 팔아넘긴 그 골동품.
“저건…….”
겔린이 회중시계를 알아보고 말끝을 흐렸다.
샤르망은 하는 수 없이 그날의 일을 말해줄 수밖에 없었다.
“폴이 팔고 간 거야. 겔린 네 말대로라면 빠르게 자리 잡을 생각이었겠지.”
“제 어머니가 주셨던 거예요. 제가 집을 나가고 얼마 안 되어서 저를 어떻게 찾아 오셨었는데…… 그때 주시고 가신…….”
겔린이 목이 메는지 연신 입술을 깨물었다.
샤르망은 뒤를 돌아 장부 중 얇은 장부 하나를 꺼내 제스퍼에게 내밀었다.
“자.”
“……이게 뭐야?”
제스퍼가 장부를 받아들였다.
“그동안 네가 여기서 일하며 치른 값.”
그러자 제스퍼가 빠르게 장부를 펼쳤다.
장부에는 제스퍼가 그간 청소하고 식사 준비를 돕고 한 온갖 일이 모두 적혀 있었다.
“이게…….”
솔직히 말도 안 되는 금액이었다.
청소 한 번에 2골드.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50실버.
저녁 준비를 도우면 1골드.
화장실 청소를 한 달은 5골드.
그마저도 샤르망이 마법으로 도와줘 물기를 닦아내는 일만 했었다.
“계산할 줄 알지? 가르쳐 줬으니까.”
제스퍼가 한 일은 그저 스푼 하나만 얹은 거나 마찬가지였는데 고위 기사들이 버는 금액을 순식간에 벌어버린 것이다.
제스퍼는 자신이 아무리 어려도 이게 억지라는 걸 잘 알았다.
“말도 안 돼…….”
슬금슬금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지 못하면서도 제스퍼가 툴툴거렸다.
“계산 못 하겠어?”
“……해애! 그러니까…….”
한참 열심히 암산을 하던 제스퍼가 금방 결론을 내놓았다.
“45골드…….”
어쩜 이렇게도 딱 맞았는지.
꼭 5골드를 일부러 내버려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거의 다 갚았네. 5골드는 가끔 놀러와서 치르면 되겠네.”
샤르망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말했다.
제스퍼가 멋쩍은지 볼을 벅벅 긁었다.
“꼭 갚을 거야!”
“당연하지. 도망가면 녹색 눈을 한 제스퍼를 찾는다고 대문짝만 하게 대자보를 붙여놓을 테니까.”
샤르망이 다시 회중시계를 내밀었다.
“아, 아직 다 안 갚았잖아.”
“널 믿는 거야. 심심하면 자주 놀러 와.”
우물쭈물하던 제스퍼가 한참만에야 회중시계를 받아들었다.
겔린은 그런 둘의 모습을 젖은 눈으로 빠짐없이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