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이 너무 따뜻해서 문제다 (57)화 (56/148)

“……!”

갑자기 글자들이 다시 빠르게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처음 새겨졌던 글귀까지 빛을 잃더니 이번에는 충만한 생명력을 머금었던 풀과 꽃들이 검게 죽어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지?”

왕도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없는 듯 놀라며 말했다.

샤르망은 불안함을 느끼며 뒤로 고개를 돌렸다.

재단 밖까지 퍼져나가던 싱그러운 풀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삭막한 돌바닥으로 바뀌었다.

화르륵 세게 타오르던 횃불마저 힘을 잃고 꺼졌다.

“…….”

암흑이 찾아왔다.

샤르망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살리드의 신이 노했나? 영혼을 속였기 때문에? 어떡하지?’

“잠깐만 기다려 보지. 이런 일은 처음이라 섣불리 움직이면 안 될 것 같네. 혹시 무슨 일인지 알겠는가?”

왕이 물어왔다.

침착하려고 애쓰는 것 같았지만 왕도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

당연했다.

이번 제를 실패하면 엘리움의 풍요로움은 사라지고 10년의 지옥이 시작될 테니까.

제를 지내는 건 간단하지만 제가 가진 의미는 절대 그렇지 못했다.

샤르망이 간절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황동잔을 쥐었다.

‘……제발!’

어찌나 억세게 쥐었던지 손에 난 상처 사이로 다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화르륵!

새까만 어둠에 다시 불길이 잃었다.

횃불이 모두 타오른 것이다.

좀 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한 불길이었다.

마음 졸이게 했던 죽은 풀잎도 빠른 속도로 되살아났다.

“별일이군.”

왕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샤르망이 이 기회를 놓칠세라 다시 빛을 내기 시작한 글자를 읽어 내려갔다.

몽환적인 목소리가 공기를 타고 바깥까지 흘러나갔다.

마지막 글자를 읊었을 때 비로소 환한 빛이 엘리움 전체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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