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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국이 너무 따뜻해서 문제다 (46)화 (46/148)

“그…… 래도 안 잘래! 늦으면 어떡해.”

“내가 깨워줄게.”

제스퍼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야! 나가서 운동해야지. 그리고 청소도 해두고 나갈래.”

그러곤 문 옆에 기대놓았던 작은 목검을 들고 콧노래를 부르며 나갔다.

“못 말린다니까.”

샤르망은 새벽녘 들렸던 목소리를 다시 떠올리며 찻물을 내렸다.

결국, 제스퍼의 닦달에 본래 계획에서 한 시간이나 이르게 나와 검술 대회장에 도착했다.

언젠가 자신도 검술 대회에 나갈 테니 하나도 놓칠 수 없다는 큰 뜻이 있단다.

제스퍼는 검술 대회장에 도착하자마자 샤르망을 이끌고 벽돌 하나하나 확인할 것처럼 주변을 쏘다녔다.

샤르망도 처음 보는 곳이었기에 겉으로 티는 안 났지만 대회장이 신기해서, 마음속은 ‘우와, 우와’ 감탄사를 내뱉고 다니는 제스퍼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벤트성으로 급하게 계획한 터라 규모는 지금껏 개최된 대회 중에서 가장 작을 거라고 하더니, 그렇게 작지만도 않았다.

‘엘리움의 검술 대회에서 목숨을 잃는 사고는 여태 없었다고 하니 안심해도 되겠지.’

륀트벨에서는 검술 대회가 다소 격했다. 무투 대회만큼은 아니었지만.

매년 사상자가 발생하는 것은 물론, 강한 자가 곧 권력이기에 잔인한 꼴도 종종 일어나곤 했다.

하지만 이곳은 엘리움이고, 륀트벨 사절단은 그저 관람만 할 테니 위험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샤르망은 꼼꼼히, 몇 번이고 물어본 뒤에야 제스퍼가 이곳에 오는 걸 허락한 것이었다.

그렇게 제스퍼에게 잡혀 대회장을 한 바퀴 돌고 나니 그사이 사람들이 가득 차 북적북적했다.

사람들도 내심 엘리움에 안전과 평화가 찾아올까 싶었는지 가족끼리 온 이들이 많았다.

“후작 각하.”

샤르망도 제스퍼와 미야, 바쿤과 함께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으려는데 왕의 보좌관 중 하나가 찾아왔다.

“음?”

“전하께서 뵈었으면 하십니다.”

“아.”

오늘은 부를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설마 잉겔로가 왕한테도 제사를 보겠다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한 건 아니겠지?’

샤르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스퍼, 혼자 다니면 안 돼.”

“응, 걱정하지 마! 그럼 샤르망 이따 봐!”

“걱정 마, 얘도 다 큰 애야. 내가 맡고 있을 테니까 얼른 다녀 와.”

미야가 샤르망의 등을 떠밀며 웃었다.

왕을 찾아가자 한쪽에 륀트벨 사절단이 나란히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시선을 느꼈는지 잉겔로가 이쪽을 보더니 또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손을 들어 보인다.

‘대체 무슨 꿍꿍인지.’

생각보다 얌전한 그들의 행보에 안심하려고 해도 저 미소를 보면 전혀 그럴 수 없었다.

옆에서 뚫어져라 보고 있는 테메릭과 레아의 모습도 보였다.

‘제이드는 또 어디에 보낸 거지? 대놓고 시찰 중인가. 여전하군.’

어쨌든 이번 방문이 엘리움을 섣불리 건든다거나 하려는 목적은 아닌 게 분명했다.

샤르망은 수상한 점이 없는지 다시 확인하며 잠시 눈길을 준 뒤 왕에게 향했다.

그런데 왕이 너무 자주 부르는 거 아닌지?

매번 딸꾹질이 나올 것처럼 어려웠던 대화도 하다 보니 익숙해지고 있었지만 지나치게 자주 불려 다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대한 마주하지 않아야 좋은데.

얌전히 전쟁만 막자고 계획했던 게 반쯤 실패했다는 건 진작에 예상했지만, 너무 많은 인물들과 자주 엮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로 불렀어?”

“아, 후작. 어서 오시게.”

왕의 보좌관이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뒤로 물러났다.

샤르망은 왕의 바로 옆 의자에 앉았다.

“그대 말이 맞았네. 륀트벨 사절단 외의 인원이 ”

왕이 샤르망에게 들릴 정도의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샤르망이 살짝 고개를 돌리자 왕이 설명을 이었다.

“시저 변경백이 륀트벨 측에서 두 번이나 잠입 시도를 하고 돌아가는 걸 목격했다고 하더군. 오늘로서 완전히 철수를 한 모양이야.”

버키가 국경을 확인할 수 있는 건 하루 두 번 정도였는데 그 사이 흔적이 있었나 보다.

엘리움에서 눈치를 채 다행이었다.

“그래?”

“열 명, 최대 스무 명 남짓이었다고 보고 받았네. 그렇지, 펜?”

“모두 비무장 상태였다고 합니다. 단순 잠입으로 판단됩니다.”

보좌관이 고개를 숙이며 거들었다.

“그대 말대로 대비를 해놓길 잘했어. 그대의 선견지명에 감탄했네.”

“그냥 노파심이었을 뿐이야. 아무리 저들이라도 조금의 명분도 없이 움직이지는 않을 거 아냐.”

“글쎄, 그 부분을 단언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한시름 놓았네. 이틀 정도가 남았으니 무사히 지나갈 것 같구먼.”

샤르망은 잠시 턱을 문지르며 고민한 뒤 왕에게 말했다.

“저들 말이야.”

“음?”

“제를 지내는 걸 보고 싶어 하고 있던데, 알고 있어? 나한테 볼 수 없겠냐고 물었어.”

그러자 잠시 표정을 굳히더니 약간 노기 어린 목소리로 왕이 말했다.

“그런 일이 있었군. 그건 이미 사전에 안 된다고 전달한 부분이지 않나. 걱정하지 말게.”

왕의 단호한 말에 걱정을 던 샤르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보지 그러나? 대련하는 모습이 가장 잘 보이는 곳일 텐데.”

샤르망은 고개를 돌려 제스퍼와 미야가 있는 곳을 쳐다보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싶지만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샤르망은 왕이 자신을 더 붙잡기 전에 빠르게 그곳을 벗어났다.

“와아아아아!”

샤르망이 원래 있던 자리에 돌아와 앉자마자 검술 대회가 시작했다.

“시작한다!”

제스퍼가 흥분하며 일어났다.

대회는 토너먼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다만 첫 경기는 연습 경기처럼 입단 예정 중인 견습생들의 대련이 세 번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견습생들의 경기였지만 샤르망도 검술 대련을 보는 건 오랜만이기에 금방 집중했다.

머리를 짧게 깎은 두 명의 젊은 견습생이 나와 인사를 하고 서로 검을 들이댔다.

샤르망이 앉아 있는 꽤 먼 거리에서도 긴장된 어깨가 보였다.

“자, 제스퍼. 저길 봐. 긴장을 하면 어깨가 불필요하게 위축되지. 저렇게 올라가면 안 되는 거야.”

샤르망은 손까지 뻗어가며 가르쳤다.

그러자 제스퍼가 한참 눈을 가늘게 뜨고 집중하더니 샤르망을 홱 쳐다봤다.

“……으음! 모르겠어. 나한테는 멋있기만 한데. 누가 이길까?”

“오른쪽.”

샤르망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제스퍼는 어떻게 그걸 아느냐며 못 믿는 눈치였다.

“그럼 나는 왼쪽! 오늘 우승까지 가장 많이 맞추는 사람이 저녁 준비하기!”

그 말이 귀여워서 샤르망이 픽 웃었다.

“좋아.”

두 견습생이 검을 맞대자마자 십여 합 만에 결판이 났다.

오른쪽에 선 견습생이 하늘 높이 검을 들어올렸다.

제스퍼가 와락 얼굴을 구겼다.

“으, 처음부터 지다니.”

“다음 대결도 있잖아.”

그러나 열 번의 대결이 지나가는 동안 제스퍼는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미야가 샤르망의 팔을 툭툭 쳤다.

“너 언제부터 이런 능력이 있었어?”

“능력?”

“지금 백전백승이잖아! 어떻게 다 맞출 수 있어?”

“아. 뭐, 그냥……?”

“페페, 있잖아.”

미야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응?”

그냥 내기를 하자는 제스퍼가 귀여워서 골려준 것인데 너무 의심 가는 행동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아무것도 모른 척했어야…….

“우리 다음 주부터 검투장 가서 돈 좀 걸자. 판돈 걸어서 싹 쓸어버리는 거야.”

손가락을 연신 접었다 펴며 있지도 않은 돈의 액수를 계산하던 미야는 금방이라도 콧김을 뿜어낼 것처럼 흥분하기 시작했다.

“또, 또, 또. 허황한 꿈꾼다.”

옆에서 바쿤이 타박했다.

“조용히 해, 땅딸보! 나중에 부자 되어도 너는 국물도 없으니 그리 알아.”

“탐나지도 않는다. 그걸 기다리느니 내가 명검을 만들어 부자가 되는 게 더 빠르겠군.”

“너어— 진짜 짜증나.”

샤르망이 웃음을 참으며 다시 고개를 돌리다 이내 딱딱하게 굳었다.

정식 토너먼트가 시작하고 이제 반 정도 지났을 때였다.

대결을 보느라 륀트벨 사절단에 관심을 잠시 거두었었는데, 테메릭이 아래로 내려가 심판과 뭔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내 대회에 참석하는 검사들이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향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의도가 뻔히 보이는 장면이었다.

지금 그는 질 안 좋은 게임을 하려는 거다.

륀트벨의 검술 대회는 엘리움과 달리 신사적이지 못했다. 때문에 거친 행동이 나오는 것은 물론, 사상자가 나오는 일도 흔했다.

‘여기서도 그 짓거리를 하려고?’

그 중 가장 질 나쁜 짓을 하는 게 테메릭 같은 이들이었다.

그는 그러지 않을 수 있었는데도 일부러 상대의 신경을 훼손해 불구로 만들어버리는 행동을 한 전적이 있었다.

그것도 그가 참가했던 다섯 번의 대회 모두.

샤르망이 본 것만 다섯 번이니, 실제로는 그보다 많을지도 몰랐다.

테메릭은 라칸의 심기를 거스르지만 않는다면 그런 비열한 짓을 서슴없이 하는 변태 같은 자였으니까.

샤르망이 제에 참석하지 못하게 해서 신경이 뒤틀릴 대로 뒤틀린 모양인데, 그 화를 여기다가 풀려는 게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테메릭 펠 리우어가 내일 경기에 참가한다는 진행자의 말이 크게 울렸다.

“저 새X가.”

분노한 샤르망이 저도 모르게 잇새로 욕을 내뱉으며 일어섰다.

그러다 순간 아차 싶어 고개를 돌렸다.

같이 보고 있던 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샤르망을 쳐다보고 있었다.

피가 사악 식는 기분이 들었다.

이 착한 사람들 앞에서 내가 무슨 막말을.

“아, 그게…….”

샤르망이 당황해서 얼버무렸다.

“샤르망 너.”

미야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너 기억 돌아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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