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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국이 너무 따뜻해서 문제다 (31)화 (31/148)

얼마 전 같았다면 저런 질문에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넘기고 마력 증폭기를 얻으면 된다고 말했을 텐데.

이상하게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

그래, 실은 살고 싶은 거다.

이제는 죽으라면 죽는 개가 아니란 걸 그녀 스스로 깨달았다.

손에 피를 묻히는 것보다,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는 것보다 이 따뜻하고 향긋한 차를 내리는 게, 누군가의 안부를 묻는 게 행복이라는 걸 조금씩 깨닫는 중이었다.

어린아이도 아는 그 사실을 샤르망은 바보 같게도 이제야 깨달은 거다.

잠시 머뭇거리던 샤르망이 고개를 들었다.

아힐은 그런 그녀를 고요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내포된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

마치 그저 그녀의 반응을 끌어내려는 사람 같기도 했다.

“우리가 먼저 샤르망 노엘 켄더스를 찾는다면…… 쉽게 마력 증폭기를 얻을 수 있겠지. 그들 소문대로 심장을 넘기면 될 테니까. 그런데…….”

“응.”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어. 그녀도…… 사람이잖아.”

“그럼?”

샤르망의 입이 바짝 말랐다.

사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에게 그런 말을 입에 올릴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편히 죽진 말아야 할 텐데 말이야. 그렇지?’

케니즈 사디나르가 그랬던 것처럼 그도 비웃을 것만 같다.

자신이 보기에도 기만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다른 방법을 찾는 게 좋겠어. 사람을 도구로 쓰고 싶진 않아.”

더는.

끝 단어 하나를 말하지 못하고 삼킨 그녀가 단호하고 명확하게 답을 내놓았다.

침묵이 감돌았다.

샤르망은 꼭 벌을 받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아까부터 계속 그녀를 빤히 보며 기다리던 아힐의 입꼬리가 일순간 올라가는 듯싶더니, 그가 아예 시원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어?”

샤르망이 바보처럼 입을 벌린 채 소리를 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그렇게 생각한다고?

무언가 다른 의도가 있는 줄 알았는데, 단순한 질문이었나 싶어졌다.

샤르망은 고개를 갸웃했다.

“앞으로도 그렇게 생각해.”

아힐이 덧붙였다.

“어? 아, 응.”

샤르망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니었겠지만 샤르망에게는 그의 말이 삶에 더 욕심을 가져도 된다고, 자신도 사람이니 그래도 된다고 꼭 부추기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이곳에 와서 이상한 버릇이 생긴 모양이었다. 듣고 싶은 대로만 듣고.

어느새 찻잔이 모두 비었다.

조금은 어색한 침묵이 살짝 감돌다가 아힐이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피곤했을 텐데 쉬어. 오늘 일은 내일 바로 왕에게 전달하도록 할게.”

샤르망은 가려는 그의 소매를 잡으려다 멈칫했다.

아힐이 샤르망의 얼굴을 빤히 보더니 물었다.

“할 말이 더 있어?”

“아, 다른 건 아니고.”

“응.”

“왕을 만나러 갈 때 나를 같이 데려다 줄 수 있을까? 저번 연회 때처럼.”

“그거야 어렵지 않지. 저번 일 때문에?”

샤르망이 끄덕였다.

“맞아. 그날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했거든. 아무래도 답을 내려야 할 것 같아서.”

“음, 그럼 아침에 여기로 데리러 올게.”

아힐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한결 편해진 샤르망이 그를 배웅했다.

아힐을 보내고 샤르망은 다시 의자에 앉았다.

“이제 곧 제스퍼 올 때가 됐는데.”

미야랑 그렇게 앙숙처럼 굴더니 약속 시간보다 늦는 걸 보면 제법 친해졌는지도 모른다.

미야는 좋은 하프엘프이니 제스퍼도 그 진심을 알았으리라고 본다.

어린애들의 눈은 오히려 더 정확한 법이니까.

샤르망은 고요해진 주변을 보다 테이블에 풀썩 엎드렸다.

어쩐지 오늘은 마법을 거의 쓰지도 않았는데 몸이 축축 늘어졌다.

이동할 때도 모두 아힐의 힘을 썼다.

그녀가 쓴 건 챙겨간 고구마를 그들에게 전달해줄 때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골동품으로 시선이 갔다.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즉, 이 몸의 생명이 닳고 있다는 뜻.

지금 그 추억이 필요한 때였다.

추억을, 물건에 깃든 오래된 기억을 먹고 살아야 한다니.

“정말 특이한 종족…….”

샤르망은 말을 내뱉다 말고 멈칫했다.

종족?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이지만 조금 전까지는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었다.

하지만 여러 종족이 모여 살고 있는 이곳에 인간과 수인 말고 또 다른 종족이 없을 리가.

그저 좀 특이한 인간이겠거니 생각했었던 게 오산이었다.

‘이런 비슷한 특징을 가진 종족이라면.’

전이라면 모른 채로 넘어갔겠지만 아힐 더프가 준 책에서 분명히 본 기억이 났다.

추억이나 특정한 기운을 먹고 사는 종족은 소수였다.

지금은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진 요정족이 그랬고 하늘을 날 수 있는 새하얀 천마를 다룬다는 천마인이 그랬다.

그들은 사람의 음식을 먹지 않고 추억이나 기운을 먹고 산다고 했다.

하지만 문제는 요정족, 천마인 모두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순히 엘리움에 없는 것이 아니라, 두 종족 모두 멸족되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이따금 혼자 다니는 천마가 목격된다고 하지만 그건 환상이거나 길들이지 않은 야생 천마일 뿐 천마인이 데리고 다니는 천마가 아니었다.

옛 살리드의 신을 모시던 요정족은 이미 멸족한 지 오래였다.

이후에도 신의 화를 입지 않기 위해 인간이 대신하여 제물까지 바치고 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또 다른 종족이 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 특징에 맞는 종족은 요정족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알렉산드로 님은 알고 계시려나.”

샤르망 페페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나이가 많다고 했으니.

알론소의 말로는 500세가 넘었다고 했으니까.

샤르망은 자꾸만 처지는 기운을 떨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 기지개를 켰다.

손에 잡히는 골동품 하나로 기운을 끌어올 순 있었다.

하지만 샤르망은 아직 그게 익숙하지 않았다.

기운을 끌어올리기 위해 슬픈 기억이라도 집어 올리면, 심한 감정 소모를 대가로 치러야 했다.

겉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그것이 행복한 기억을 가진 골동품인지 아픈 기억을 가진 골동품인지 알 길이 없었다.

잘못 집었다간 그 후유증이 지금 떨어진 체력만큼이나 버겁게 느껴질 것 같아 건드리기는 꺼려졌다.

차라리 조금 더 휴식을 취하자.

오늘은 이 기분 좋은 느낌을 잃고 싶지 않아 추억을 흡수하는 걸 그만두기로 했다.

그러나 그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깨질 듯한 두통이 시작됐다.

“윽.”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쿵! 온몸에 한차례 큰 진동이 느껴지더니 흠칫 몸서리 칠만큼 오한이 들었다.

시야의 사물들이 서너 개로 갈라지며 눈앞이 흐릿해졌다.

마치 몸에서 영혼이 억지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 끔찍한 공포에 샤르망이 제 팔로 온몸을 껴안았다.

“흐윽.”

온몸이 지진이 난 것처럼 심장박동을 따라 흔들렸다.

아득해져 가는 정신 속에 결국 샤르망은 바닥에 고꾸라지며 의식을 잃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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