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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국이 너무 따뜻해서 문제다 (27)화 (27/148)

‘어째서?’

이미 목줄을 쥐고서도 부족했나?

샤르망이 묵묵히 라칸의 말을 따를 때 세 제자는 그런 샤르망을 못마땅해했다.

정확히는 샤르망을 사지로 내모는 명을 내리는 황제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들은 그녀를 스승, 더 나아가 주인처럼 따랐으니까.

그런 그들을 타국의 제사에 제물로 보내려고 했다.

그녀가 아끼는 걸 뻔히 알면서.

심지어 7년 전 이쯤이면 라디 피제르타가 제게 합류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이다.

가장 오래 함께 한 펠릭이라면 몰라도 라디까지 보내려 했다니.

‘내 팔다리를 완전히 자르려고 했었군.’

엘리움과의 우호를 빌미로 샤르망 노엘 켄더스의 팔다리를 자르려는 것이다.

샤르망에게 명을 내릴 때마다 그들이 걸림돌이 되니까? 샤르망이 그들을 지키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서?

륀트벨의 입장에서 엘리움은 어차피 삼킬 나라였다.

그런 나라에 우호 관계를 맺는 척하며 거추장스러운 것을 치우려 했었단 말인가.

샤르망은 서서히 차오르는 분노를 애써 가라앉혔다.

지금 여기서 이성을 잃으면 안 된다.

몸에 찬물을 끼얹듯 분노를 천천히 가라앉히자 생각이 좀 더 명확해졌다.

일단 엘리움의 왕이 그런 중요한 의견을 왜 샤르망 페페에게 묻는지 의아했는데, 그 제를 집전하는 게 샤르망 페페라는 사실을 듣고선 금방 수긍했다.

샤르망은 바로 대답하지 말고 며칠 더 고민해보자는 핑계를 댄 후 왕과의 독대를 마치고 나왔다.

복도를 지나는 내내 샤르망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과거에 이런 제안이 왔을 때는 엘리움이 거절을 했을 것이다.

샤르망은 아무런 소식을 듣지 못했으니까.

지금은 어떤가.

‘받아들일까.’

제자들을 모두 이곳으로 데려오면 차라리 나을까.

아힐 더프가 분명 자신은 실종된 상태라고 했는데.

단순히 숨기는 건지 아니면 라칸이 자신의 몸을 가지고 있는 건지 머릿속이 혼란해졌다.

‘조금 더 생각해 봐야겠군.’

라칸이 제 몸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그대로 골치가 아프다.

차라리 몸이 죽어버렸으면.

연회장 문 앞에 선 샤르망은 심호흡을 했다.

굳어진 표정을 지우고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연회장 문을 열었다.

“오, 세상에. 이게 누구야? 페페 후작 아닌가.”

연회장에 들어가 다시 샴페인을 받아들고 아힐 더프를 찾으려는데 누군가 자신을 반갑게 부르며 다가왔다.

아는 척을 해야지, 하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샤르망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케니즈 사디나르.

엘리움의 총사령관.

그녀가 목숨을 앗았던.

그자가 눈앞에 있었다.

“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케니즈 사디나르까지 마주하자 손끝에서부터 피가 차갑게 식어 들어갔다.

아찔함에 방금 건네받은 샴페인을 든 손이 파르르 떨렸다.

샤르망은 금방이라도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는 걸 느꼈다.

얼굴이 창백해지자 케니즈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괜찮나, 후작? 얼굴이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반갑게 웃는 낯, 걱정이 번지는 얼굴에 피범벅이 되어 눈을 희게 뜬 사디나르 사령관의 모습이 겹쳐졌다.

“괜, 괜찮아. 잠시, 잠시만 나갔다 오지.”

샤르망이 빠르게 그를 지나쳐 아무 테이블에나 샴페인을 올려둔 뒤 근처 발코니로 향했다.

몇 번 더 타인과 어깨를 부딪쳤으나 얼굴을 확인할 새도 없었다. 그저 본능처럼 혼자 있을 곳을 찾았다.

다행히 단번에 사람이 없는 발코니를 찾았다.

샤르망은 나가자마자 커튼을 걷고 허억, 허억 숨을 몰아쉬었다.

코끝에 전쟁터에서 느꼈던 탄내와 피비린내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다시 토악질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틀어막았다.

왕과의 독대도 잘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서 사디나르를 만날 줄이야.

당연히 그도 귀족이니 이곳에 참석할 텐데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한참 힘겨워하던 샤르망이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기껏 장식해놓은 머리가 흐트러졌다.

“하아…….”

최대한 정돈을 한 샤르망은 언제 그랬냐는 듯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속은 여전히 울렁거렸다.

‘어차피 한 번은 마주해야 했어. 그래, 뭐든 겪어야 했던 일이야. 이보다 더한 것도 겪어봤잖아. 이번 생에선 저자를 죽이지 않을 거니까. 더는 적이 될 이유가 없어.’

인간성을 스스로 버렸던 과거를 떠올리며 샤르망은 점차 침착해졌다.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감정이 너무 끌어올려졌던 모양이다. 작은 파문에도 허리케인을 마주한 것처럼 휩쓸린다.

자신이 누구였나.

눈앞에서 부하가 죽어도 오직 목표만을 위해 움직이던 괴물이 아니었던가.

그렇게 억지로 다짐하는데, 마음 한구석이 툭 뭉텅이로 잘려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속은 후련해졌다.

샤르망이 양 뺨을 손으로 툭 치고 다시 발코니를 나왔다.

다행히 케니즈 사디나르가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

아까와 달리 걱정스러운 눈초리였지만.

“샤르망, 괜찮은 건가?”

“아, 미안, 미안.”

“속이 안 좋았던 거야? 하긴 이런 자리를 좀 혐오하긴 하지.”

“아침부터 속이 좀 안 좋아서. 이제는 괜찮아졌어.”

어딜 가나 아는 사람들이라니 난감하지만 그래도 한차례 바람을 쐬고 들어왔더니 서글서글한 남자의 얼굴이 이제야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붉은색 머리를 뒤로 깔끔하게 넘긴 처지고 둥근 눈매를 가진 남자.

전장에서는 결코 우습게 볼 사내가 아니었다.

1대1로 붙으면 샤르망은 이기겠지만, 펠릭은 그와 팽팽하게 겨루거나 질 것이다. 그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마탑주와 함께 왔다고 하던데.”

“맞아. 내가 도움을 좀 청했지.”

“놀랄 일이로군. 그대가 연회에 온 것도 모자라 마탑주와 함께 왔다니. 아무래도 내가 꿈을 꾸나 봐.”

어찌나 능글거리는 말투인지, 샤르망은 어느새 키득거리고 있었다.

과거 자신을 찢어 죽일 것처럼 쳐다보던 분노 어린 시선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호감 그 자체.

“자주 얼굴 좀 보여주게. 다음 연회 파트너는 나로 해주면 더 좋고.”

“음?”

이야기가 왜 거기로?

샤르망이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그러자 언뜻 케니즈의 얼굴이 붉어진다.

샤르망이 더욱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큼, 뭐 애인은 안 해준다고 해도 친구는 해준다고 하지 않았나. 친구로서 한 말일세. 나 같은 파트너도 제법 괜찮으니까.”

그리고 헛기침을 한다.

샤르망이 뒤늦게 ‘아’ 하고 깨달았다.

케니즈 사디나르는 샤르망 페페를 마음에 두고 있다.

그것도 이미 한 차례 차인 상태다.

적군의 연애사까지는 굳이 알고 싶지 않았는데.

샤르망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의 얼굴이 붉어진 이유도 이젠 완전히 납득이 되었다.

‘그렇군.’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다음 연회에 함께 하지.”

“정말인가? 농담을 하는 게 아니고?”

“친구로서라면 말이야.”

“……잔인하기는. 뭐, 그대의 파트너라면 그거라도 영광이지.”

샤르망이 미소를 지으며 승낙했다.

그때까지 자신이 이 몸에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소원을 들어줄 생각이다.

그와 제법 한참 대화를 나눴다.

정확히는 그에 대한 조언이 더 많았다.

가령 평소의 샤르망 페페라면 하지 않았을 말들.

“그대, 아니, 너는 하체를 좀 더 정비할 필요가 있어.”

“하, 하체? 무슨 의미지?”

케니즈의 동공이 풍랑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흔들렸다.

“음, 그러니까 하체가 묵직하면서도 가벼워야 해. 무슨 말인지 알겠나?”

그러자 케니즈가 두 손을 들어 샤르망의 말을 막았다. 이미 얼굴은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왜 저러지?

“……페페, 내가 오해하지 않길 바란다면 좀 더 제대로 설명을 해줘.”

말투가 너무 딱딱했나.

샤르망은 잠시 고심하고서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통통 튀는 말투가 나오지 않으니 부드럽게라도 해야겠다.

“너는 검술 능력이…… 무척 좋다고. 빠르고, 화려하고, 강하고. 음, 체형도 타고났고 밸런스가 정말 좋다고 생각해. 다만 하체 방어가 그에 비해 좀 밀리는 것 같으니 조금 더 훈련을 정비하는 게 좋겠다는 뜻이었어. 특히 왼발.”

그가 승패에 굴복하고 그녀에게 목숨을 잃은 이유.

샤르망은 그 이유를 반대로 그를 살리는데 말해주고자 했다.

그러나 케니즈는 어딘가 크게 맞은 듯한 얼굴을 했다.

붉어진 얼굴을 제 커다란 손으로 가리더니 이내 웅얼거렸다.

“고, 고맙군. 하마터면 질 나쁜 농담이라도 하자는 줄 알고 머릿속에 수천 가지 생각이 오갔다고.”

질 나쁜 농담, 하체, 묵직…….

샤르망이 허둥지둥 서둘러 덧붙였다.

“아……. 큼, 절대 그 뜻이 아니었어.”

그러자 케니즈가 여유로운 웃음을 되찾았다.

“뭐,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지. 다만 네게 그런 칭찬을 받다니 오늘을 기념일로 삼아도 되겠어. 그쪽으로 일가견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내 검술이 조금 괜찮았나? 언제 내 검술을 보았지? 훔쳐보기라도 했나?”

“어?”

“아니, 많이 괜찮았나? 어디가 어떻게 멋있었는지 요목조목 말해주면 정말 영광일 것 같은데.”

케니즈는 칭찬받고 싶은 커다란 개처럼 재촉했다. 처진 눈이 더욱 둥글게 휘었다.

그와 검을 맞대고 싸울 땐 이리 정겹게 치대는 사람일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는 기습적인 공격을 잘하는 자였다. 파고들기를 잘하고 검 끝이 날카로웠으며 망설임이 없었다.

샤르망이 뒤로 한걸음 물러나며 손을 저었다.

“이, 이 정도로만 하지.”

몇 번 웃고 떠들자 아까처럼 죽은 모습이 겹치는 기괴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어디 한구석 불편한 마음은 그저 업보다 생각하고 밀어두었다.

“그럼 오늘은 입장 파트너 대신 춤 파트너는 어때?”

“보다시피 샴페인이 아직 남아서.”

“오늘도 실패라는 뜻이군.”

“이해해줘서 고마워.”

“어딜 날파리가 끼어들어.”

아힐이 돌아온 건 케니즈가 춤을 막 권할 때였다.

“날파리? 지금 나한테 한 소린가?”

“그래, 케니즈 사디나르 공작. 너 말일세. 입장 파트너가 뻔히 두 눈 뜨고 있는데 가로채 갈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말도록.”

그도 모자라 샤르망의 어깨를 껴안듯 제 쪽으로 당기기까지 했다.

이렇게 가까웠던 적은 처음이라 샤르망은 당황해서 양쪽을 번갈아 쳐다봤다.

“쳇, 이래서 마법사들은.”

케니즈가 혀를 찼다.

인상을 쓰기에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서 싸우는 건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마정석이 필요하지 않다고?”

케니즈가 움찔하더니 태세를 바꿨다.

“……거짓말일세. 나는 마법사를 아주 좋아해. 특히 자네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으니 빨리 내놓기나 해. 벌써 한 달째 밀렸잖아. 마정석을 박아야 할 검이 벌써 산더미라고.”

“내 파트너를 가로채 갈 뻔했으니 일주일은 더 기다려.”

“저런 개차…… 페페, 제발 도와줘.”

케니즈가 아쉬움에 샤르망에게 도움을 청했다.

샤르망이 저도 모르게 웃음을 작게 터트렸다.

이자들과 이런 대화를 나눌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머릿속, 마음속은 여러 가지 감정으로 혼란스러웠지만 적어도 지금의 대화가 나쁘지만은 않았다.

“근데 그거 들었어?”

케니즈가 아힐에게 물었다.

아힐은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눈썹을 치켜떴다.

케니즈가 아힐과 샤르망 사이에서 몸을 살짝 낮추며 주변을 살피더니 이내 목소리마저 낮췄다.

“그 괴물 아직 못 찾았다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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