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엘리움의 왕이 길목을 열어줘야 가능한 이야기였지만, 샤르망은 소로 숲의 엘프와 손잡을 수 있다면 엘리움의 왕이 기꺼이 길목을 열어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지금의 엘리움에서는 소로 숲의 엘프들이 그런 고충을 갖고 있다는 것은 모를 테니, 소로 숲 엘프들이 거래를 승낙한 후에 알려줄 생각이었다
[그러니 할스레이크와 다리를 놔 달라. 욕심이 과하군.]
그렇게 말했지만 불쾌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이득이 얼마 정도인가 계산을 하는 것 같았다.
[할스레이크와 연결만 해준다면 소로 숲과 아갈 산맥 사이의 티크 교역에 필요한 것들은 모두 엘리움에서 지원할 것입니다.]
[그런 위험 부담을 무릅쓰고 우리가 얻는 이익은 뭐가 있소?]
용활석은 이미 받았고, 할스레이크와 엘리움을 연결만 해주고 티크로 가는 이동 포탈 이용권까지 받으면 이득이 빤히 보이는데도 하라만이 물었다.
샤르망은 그것도 이미 예감하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움은 장차 마법 강국이 될 겁니다.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당신들에게 날을 겨누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는 걸 보장해 드리죠. 더해서.]
샤르망이 말을 하다 말고 머뭇거렸다.
[더해서?]
하라만이 재촉했다.
‘수습은 나중에. 나중에 하자.’
[룬힐의 주인을 아십니까?]
아힐 더프를 말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엘리움의 마탑주라는 단어보다 진짜 마탑의 이름을 말해주는 게 더 알아듣기 쉬울 거라 생각했다.
샤르망의 예상이 정확했는지 하라만의 눈빛에 이채가 돌았다.
“엘리움에 있는 마법사의 탑 주인 말이오? 직접 본 적은 없소만, 들은 적은 있소. 여러 나라에서 탐을 내는 귀한 인재라 들었소.”
[예.]
[세계에서도 손꼽히다 못해 마법으로는 유일무이에 가까운 자라 하더이다. 맞소?]
[예, 맞습니다.]
[다만 이상하더군. 마탑의 마법사들은 어딘가에 귀속되는 존재가 아니라던데, 그는 엘리움에 정착하고 있다고 하던데. 그것도 맞소?]
[그것도 맞습니다.]
샤르망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그자는 왜? 계속 말씀해보시오.]
수습은 나중에.
샤르망이 그 말을 한 번 더 머리에 새겨 넣었다.
[엘리움과 손을 잡아준다면 그의 힘은 언제든 당신들을 도울 것입니다.]
[룬힐의 주인이 우리를 돕는다는 말이오?]
[예, 틀림없습니다.]
적어도 그라면, 엘리움을 아끼는 그라면 정말 그럴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하라만이 다시 용활석만큼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또 있습니다.]
[또 말씀해 보시오.]
샤르망의 방식이 제법 통하고 있었다.
하라만이 한 번 더 재촉할 때까지 잠시 기다렸던 샤르망이 말했다.
[천상의 맛에 가까운 고구마도 언제든 드실 수 있습니다.]
지금껏 말한 것 중에서 가장 확신 있고 자신 있는 부분이었다.
자고로 가장 바닥에서 보자면 먹고, 자고, 싸는 게 중요한 일이 아니던가.
그것과 별개로 그냥, 그냥 자랑하고 싶었다.
알렉산드로의 고구마를.
게다가 이들은 미식가이면서 고기를 즐기지 않았다. 샤르망은 고구마가 분명 통할 거라고 확신했다.
[고구마? 내가 아는 고구마라는 단어는 하나뿐인데?]
[네, 그 고구마 맞습니다.]
샤르망이 또 자신 있게 대답하자 회의장이 술렁였다.
수장 하라만뿐만이 아니라 다른 엘프들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고구마를?’
‘여기서 갑자기 고구마?’
‘고구마 맛있는데.’
주변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렸다.
[지금 맛있는 고구마를 위해서 거래를 하자, 이것이오?]
하라만이 재차 물었다.
아무래도 잘못 들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예. 한번 맛보시면 당장 거래하고 싶으실 겁니다. 진짭니다.]
달아서 목도 잘 안 막힙니다.
샤르망이 덧붙였다.
하라만이 그런 샤르망을 빤히 보며 이목구비를 요목조목 살피더니 의자 등에 몸을 슬며시 기댔다.
[……외향만 신비한 게 아니라 머릿속도 신기하군.]
[농담으로 들리셔도 꼭 말씀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알고 있소. 그대가 지금껏 말할 때 표정 중에서 가장 진정성이 느껴졌소.]
그랬나. 다른 것도 다 진심이기는 했는데.
그 말에 샤르망이 제 볼을 손바닥으로 꾹꾹 문질렀다.
하라만은 동족들과 의견을 나누어야겠다고 했다.
샤르망은 그의 수하가 안내해 주는 대로 방으로 가려다 양해를 구하고 밖으로 나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버키를 살피기도 하고 소로 숲의 향을 마음껏 맡고 싶어서였다.
샤르망은 나오자마자 소로 숲을 온몸에 담는 것처럼 폐부 깊이 숨을 집어넣었다.
몇 번을 그렇게 심호흡을 하고 편안한 표정을 짓자 안내를 해준 엘프가 의아하게 쳐다봤다.
[이곳에 처음 온 자 같지 않습니다.]
[아…….]
샤르망이 몸을 돌려 그를 마주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이 몸은 처음입니다. 숲의 향이 좋아서요.]
[이곳은 생명력이 가득한 곳입니다. 엘리움은 안 그렇습니까?]
숲의 기운을 들이마셔서 그런지 골동품을 만졌을 때와 비슷하게 생명력이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엘프의 목소리에도 자부심이 넘쳤다.
진회색 앞머리가 있는 중단발 헤어스타일로 한쪽 눈을 가리고 있어서 눈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그는 제법 서글서글한 눈매를 갖고 있었다.
수장과 적대적이지 않은 대화를 나누고 난 뒤 적의를 낮춰서 그렇게 보이는지도 몰랐다.
아직 이름은 말해주지 않았지만.
그들은 완전히 이어갈 인연이 아니면 이름을 말하지 않으니 묻는 것도 실례였다.
샤르망은 자신이 느낀 엘리움에 대한 감상을 말해주었다.
[엘리움은 아직 개화하지 않은 꽃봉오리 같은 곳입니다.]
[꽃봉오리라.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
정작 자신은 륀트벨의 사람이면서 엘리움을 칭찬하려니 또 어딘가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륀트벨도 그녀에게는 한때 자랑스러웠던 곳이었는데.
다시 두통이 시작되려고 하자 샤르망이 짧게 고개를 털었다.
멀찌감치 나무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버키가 ‘구륵, 구륵’ 짜증을 냈다.
자신이 거기서 기다리고 있는 걸 알면서 왜 알은체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샤르망이 그걸 눈치채고 팔을 뻗자 기다렸다는 듯 버키가 날아와 착지했다.
또 한 번 몸이 크게 휘청인 샤르망이 어색한 미소를 그렸다.
“조금만 더 기다려 줘.”
“구르르…….”
버키는 옆에 서 있는 엘프를 당장이라도 쪼아댈 것처럼 노려보더니 이내 고개를 털었다.
[세이아크를 이렇게 편안하게 다루는 자는 처음 봅니다.]
엘프는 자신들은 아무리 찾아도 세이아크의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며 아까와 다르게 수다스럽게 굴었다.
[큼, 친우가 훈련을 잘 해서요. 제가 친구의 부탁을 잘 들어줘 그런가 봅니다.]
“구륵?”
뭔 헛소리냐는 듯 버키가 제 머리로 샤르망의 머리를 툭 쳤다.
샤르망은 모른 체 하하 웃었다.
이럴 땐 너무나 똑똑한 버키가 부담스러웠다.
지금은 샤르망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엘프어를 알아들은 거지만, 샤르망 없이도 조금만 노력하면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똑똑하니까.
[주인의 말은 무조건 듣나 보군요. 정말 신기한 영물입니다.]
[예, 그런 것 같습니다. 저도 잘 몰라서…….]
버키가 무슨 소리냐고 다시 발로 샤르망의 어깨를 꽉 쥐었지만 샤르망은 어색하게 웃으며 버키의 발을 슥슥 문질렀다.
조금 더 기다리자 안에서 엘프들이 나왔다.
[수장께서 찾으십니다.]
[예,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버키, 금방 다녀올게.”
샤르망의 말을 듣자 버키가 다시 휘릭 날아 나무에 안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