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미야 벨킨슨이 열린 문을 대충 두드리고 불쑥 문으로 들어왔다.
손에 든 바구니에는 빵가게에서 사왔는지 샐러드 빵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페페, 웬 애야? 점심은 먹었어?”
“아, 미야. 어서 와. 아침에 음식이 남아서 그거 챙겨 먹었어. 이 아이는 사정이 있어서 잠시 여기 있게 됐어.”
“그걸로 끼니가 되겠어? 이거 먹어, 방금 구워서 만든 거라고 하더라.”
미야는 아이를 보며 테이블 위에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샤르망은 이제는 제법 친해진 미야에게 인사하며 바구니를 끌어 제스퍼가 더 먹을 수 있도록 한쪽에 밀어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야 벨킨슨은 이곳에 올 때마다 따뜻한 차를 좋아하니 물을 올려 두려는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주전자로 물을 끓여 차를 내리는 건 손으로 직접 해야 그 맛이 나니까.
이것도 그녀에게 배운 것이다.
“흐응, 땟국이 줄줄 흐르네. 꼬마야, 너 이름이 뭐니?”
“알아서 뭐하게.”
열심히 비질을 하던 제스퍼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어머, 쬐끄만 게 당돌하네. 그래서 여기서 지내게 한다고? 세상에, 그러고 보니 집 구조도 바뀌었잖아?”
“응, 저 아이가 지낼 곳이 필요할 것 같아서 임시로.”
“너 기억도 잃었으면서 괜찮겠어?”
그 말에 물을 올리던 샤르망이 잠시 멈칫했다.
게으른 샤르망, 게으른 샤르망.
환상 속에 떠올랐던 샤르망의 통통 튀던 음성도 같이 떠올랐다.
샤르망이 눈을 반짝 떴다.
“큼, 기억이야 뭐 돌아오면 되고. 안 그래도 귀찮았었는데 잘 됐지 뭐! 청소하기도 귀찮아 죽겠는데 먼지는 왜 자꾸 생기는지!”
말 한 번에 기운이 쑥 통째로 빠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스스로도 이렇게 방방 뛰는 소리를 낼 수 있는지 속으로 놀랐다.
아마도 원래 주인의 꾀꼬리 같은 목소리 덕분이리라.
그래도 약간은 의심스러운 눈초리였던 미야의 눈빛이 편안하게 변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기야 너는 아이들한테 무른 편이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너 몸 하나 간수하기도 힘들면서 애 데리고 정말 괜찮겠어?”
“당분간만인데 뭐. 걱정해 줘서 고마워, 미야.”
조금 더 기다리자 주전자 물이 끓었다.
샤르망은 불을 끄고 찻잔 세 개를 꺼내 허브차를 연하게 우렸다.
“제스퍼, 너도 와서 마셔.”
“……그래도 돼?”
“안 될 거 뭐 있어. 이리 와.”
그러자 제스퍼가 빗자루를 구석에 세워놓고 쭈뼛쭈뼛 다가와 앉았다.
미야의 흥미는 온통 제스퍼에게 꽂혀 있었다.
“꼬마 녀석아, 너 이름이 제스퍼구나? 몇 살이니?”
“알아서 뭐하게.”
“어머, 버르장머리 집 나간 거 봐.”
제스퍼가 또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미야가 기가 찬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제스퍼.”
샤르망이 짐짓 저음으로 말하자 재스퍼가 움찔했다.
“……열넷.”
미야가 입을 헤 벌렸다.
“세상에, 너 사람 가리니?”
“마, 말했잖아.”
“까칠하긴. 너 샤르망 말 잘 들어야 한다? 안 그럼 엉덩이에 독침을 쏠 줄 알아.”
미야가 깔깔 웃으며 제스퍼에게 겁을 줬다.
그 후 샤르망에게 이것저것 묻던 미야가 ‘아!’ 하고 화제를 바꿨다.
“요즘 마법사 자주 온다면서?”
“마법사? 아, 아힐?”
미야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눈을 반짝인다.
“자주…… 라기보다 내가 부탁한 게 있어서. 황궁 연회에 가야 하는데 알다시피 기억에 없어서. 알론소가 연회에 가장 많이 참석한 사람이라기에.”
샤르망의 입에서 변명이 줄줄 이어졌다.
“흐음, 틀린 말은 아니네. 그래도 의외인걸. 그거 봐. 아니라고 하더니 또 부탁을 들어주고 있었단 말이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미야를 보고 샤르망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녀석은 널 싫어하니까!”
샤르망의 눈썹이 휙 올라갔다.
“싫어한다고?”
“응, 게으르고 잘 안 씻어서 별로라나 뭐라나. 그래서 싫어했는데? 마법사가 좀 까탈스럽긴 해, 그렇지?”
흉에 가까운 말을 서슴없이 내뱉은 미야의 말에도 샤르망은 의심스러운 눈빛을 거두지 못했다.
그럴 리가.
전혀 싫어하는 기색이 아니었는데.
금화에 신호 한 번 보냈다고 당장 달려온 사람이 샤르망 페페를 싫어한다고?
싫어하기는커녕 가장 절친한 친구일 거라고 확신했는데 그게 아니었다니 혼란스러웠다.
그렇지만 혼란은 혼란이고 잘못된 사실을 정정할 필요가 있었다.
“아니야.”
“응? 뭐가 아닌데?”
손가락을 구부려 연신 손톱을 살피던 미야의 고개가 홱 샤르망을 향했다.
“나 오늘 씻었어.”
“응?”
“어제도 그리고 그 전날에도 계속 하루에 두 번씩…….”
미야가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아!’ 감탄과 함께 짝하고 손뼉을 쳤다.
“어쩐지 기억을 잃은 후로 계속 좋은 냄새가 나더라!”
“…….”
“기억을 잃는다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니구나? 혹시 운동도 하니? 아침에 매일 일찍 일어나고 있고? 요즘 소식한다면서.”
어쩐지 샤르망의 귀와 턱밑이 뜨끈뜨끈한 기분이었다.
여태 안 씻었다고 오해받고 있었다니.
그나저나 매일 일찍 일어나 운동한다는 건 또 어떻게 알았지.
샤르망은 물비누로 두 번씩 빡빡 씻는다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대신 미야의 물음에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야는 그 후로도 뭐가 궁금한지 이것저것 꼬치꼬치 묻다 돌아갔다.
제스퍼도 미야의 질문 세례를 받고 피곤했는지 소파에 앉아 조는 걸 방으로 들여보내 재웠다.
샤르망은 테이블에 앉아 제스퍼의 회중시계를 만지작거렸다.
‘틀림없어.’
샤르망은 처음 코끼리 조각상을 만졌을 때도, 첫 번째 손님이 팔고 간 반지를 만졌을 때도.
그리고 오늘 제스퍼의 추억이 남긴 회중시계를 만졌을 때도 똑같은 걸 느꼈다.
처음 능력을 깨달았을 때는 환상을 봤다는 충격에 잘 못 느꼈는데 세 번째 똑같은 현상을 겪고 나자 알아채지 않을 수 없었다.
물건의 추억을 보고 나면 몸에 마나가 차오른다.
정확히 말하면 마나가 아니라 생명력이 차는 기분이 들었다.
특히 오늘 확실하게 느꼈다.
아침에 운동을 끝내고 유난히 몸이 가라앉는 느낌이라 잠을 잘 못 잤나 싶었는데, 회중시계의 추억을 보고 나서는 그 느낌이 싹 사라졌다.
그 모자란 부분이 채워진 기분.
물건의 추억을 보는 특별한 능력.
‘이 가게를 운영하는 이유가 소모되는 생명력을 채우기 위해서인가?’
실상 돈이 벌린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가게는 멋대로 운영이 되고 있었다.
아힐 더프와 알론소가 말한 것처럼 돈에 환장한 사람이라기엔 몹시 허술한 운영이지 않은가.
‘실상 돈을 위한 게 아니라면 이런 가게 운영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데.’
샤르망은 아직 추억을 보지 않았던 물건 몇 개를 가져와 똑같이 추억을 열어보았다.
검게 변색된 낡은 은 나이프.
이가 빠진 고대 유물 같은 찻잔.
하나하나 직접 깎고 만든 것 같은 금속 보관함까지.
모두 제각기 추억이 담겨 있었다.
“아.”
정말이다.
다 보고 나자 몸이 날아갈 듯한 느낌이 들고 방대한 마나가 느껴졌다.
‘마치 추억을 먹고 사는 존재 같아.’
정말 특이한 능력. 샤르망은 그간 보지도 듣지도 못한 능력이었다.
그리고 오후 6시.
샤르망은 오늘도 무사히 가게를 지켜냈다고 안심하며 가게 영업을 종료했다.
미야의 꽃가게도 굳게 닫혀 있고, 이쪽을 주시하는 사람도 없다.
샤르망은 주변을 철저하게 확인한 뒤, 돌아올 때까지 제스퍼가 깨지 않도록 마법을 걸어두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곤 집에도 마법을 걸어 보호한 뒤 후드를 뒤집어쓴 채 골목을 빠르게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