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국 한복판에서 지내고 있는 것만으로도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인데 적국 우두머리 앞까지 가야 한다니.
이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선 너무 위험한 일이었다.
샤르망은 그저 주인이 이 몸에 돌아올 때까지 무사히 가게를 지켜내고, 과오를 청산하고 싶을 뿐이다.
그러니까 눈에 띄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는 뜻이다.
심지어 원래도 공식적인 자리는 꺼릴 정도로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하도 그런 곳에 참석하지 않아 어느 날은 제자들에게 끌려가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 후 제자들에게 연병장 100바퀴라는 벌을 주긴 했지만.
샤르망은 빠르게 머릿속에서 계산을 끝내고 입을 열었다.
안 되겠다.
이건 자신이 해결할 일이 아니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이번 연회에 갈 수 없…….”
“—다고 거절하실 것 같아서 폐하께서 이번에는 꼭 참석해 달라는 첨언이 있으셨습니다.”
말을 가로막힌 샤르망이 눈을 깜박였다.
뭐지?
샤르망은 서둘러 다른 핑계를 찾았다.
“그렇지만 연회에 입고 갈 드레스조차 준비되지 않아서…….”
뒤에서 붉은 제복을 입은 남자 하나가 넓적한 상자 하나를 가져왔다.
“—곤란하실까 하여 연회에 입으실 드레스를 미리 준비해 왔습니다. 아, 물론 구두도 있습니다. 보시고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다른 디자인으로 바꿔 드리겠습니다.”
앞에 남자가 반쯤 상자를 열자 호화로운 드레스가 보였다.
‘아니, 대체 저건 언제부터 들고 있었던 건데……?’
“준비까지 해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만, 중요한 손님을 맞아야 하기에 제가 자리를 비울 수가…….”
“—없다고 하시기엔 연회는 주말에 열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주말에는 손님을 받지 않으신다는 철칙 엄수가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후작 각하.”
더 필요한 게 없냐는 듯 남자가 턱을 치켜세웠다.
그의 표정에는 그 어떤 거절이라도 원천 봉쇄하겠다는 뜻이 굳건했다.
‘거절을 한두 번 해본 것이 아니야, 이건.’
수많은 거절 끝에 당도한 결과다.
‘엘리움에 제법 인재가 많…… 이게 아니지.’
샤르망이 고개를 저었다.
“폐하께서 만남을 고대하고 계십니다, 각하. 이번에 참석하면 앞으로는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겠다는 말씀도 있으셨습니다.”
귀찮게라. 왜 저 말이 협박으로 들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마치 이보다 더 거절하기 힘들도록 곤란하게 만들겠다고 미리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해서든 거절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남자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가 샤르망의 귓가에 은밀히 속삭였다.
“폐하께서 저번 륀트벨 건으로 꼭 다시 한 번 조언을 구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샤르망이 그의 말을 막으려다 멈칫했다.
“륀트벨……?”
엘리움의 왕이 륀트벨을 왜?
엘리움에서 이맘때쯤 륀트벨에 대해 뭔가 준비하는 게 있었나?
보아하니 이곳까지 직접 찾아와 초대장을 건넨 진짜 이유는 이것인 것 같았다. 그럼 제법 중요한 이야기라는 뜻인데.
“예. 몹시 중요하다, 정말 중요하다 하셨지만 정말 안 되겠다 하시면…….”
“잠시만.”
샤르망이 돌아서려고 하는 남자의 팔을 덥석 잡았다.
풍성한 수염을 매단 남자가 눈을 끔벅였다.
“예, 참석하겠습니다. 연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