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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국이 너무 따뜻해서 문제다 (6)화 (6/148)

“으…… 샤, 샤르망.”

털썩 주저앉는 소리와 함께 딱 봐도 어려 보이는 너구리와 널브러진 바구니가 보였다.

기척을 낸 이는 자신을 알렉산드로라고 소개했던 너구리와 똑같은 종의 너구리였다.

짙은 털 무늬 때문인지 눈 밑이 며칠 못 잔 사람처럼 퀭해 보였다.

그 바구니에는 몇 가지 구운 채소와 구황작물이 쏟아져 나와 있었다.

샤르망이 눈을 깜박였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여긴 엘리움인데.’

샤르망은 뒤늦게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떠올리고 빗자루를 저 멀리 집어던졌다.

“미안합니다!”

샤르망이 빠르게 사과하며 손을 내밀자 작은 너구리가 손을 잡고 일어서더니 털을 탈탈 털었다.

“괜찮아, 조금 놀랐을 뿐이야. 이 시간에 뒤에서 소리가 나길래 와봤거든. 그런데 네가 이 시간에 깨어 있을 줄이야. 무슨 일이야?”

샤르망의 무릎까지 오는 작은 너구리는 괘념치 말라며 손을 저었다.

목소리도 어린아이 같은데 행동은 어른인 샤르망보다 훨씬 나았다.

“그게…….”

“이런, 어쩌지? 네 아침이 다 쏟아졌어. 알렉산드로 님이 화내시겠다. 으으.”

어린 너구리가 울상을 짓고 있었다.

전쟁통이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아는데도 몸이 움직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또한 자신의 실수임이 분명했다.

샤르망이 무릎을 굽히고 앉아 쏟아진 음식들을 털어 바구니에 다시 담기 시작했다.

뒤쪽으로 오는 길은 미리 치워 두어 흙만 조금 묻었을 뿐이었다.

전장에서는 곰팡이가 피거나 상한 음식도 먹곤 했으니까 이 정도는 진수성찬인 편이었다.

쏟아진 것 중에는 어제 먹었던 고구마도 있었다.

지금껏 아침 식사는 물 한잔이나 겨우 허기만 채우는 용도로 챙겨 먹곤 했는데도 불구하고 괜히 마음이 들떴다.

“이렇게 털어먹으면 됩니다.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제 명백한 실수입니다.”

“어…… 어? 그런데 샤르망 말투가 이상해. 왜 존댓말 해? 이번엔 무슨 놀이야?”

어린 너구리가 옆에서 함께 구운 고구마와 감자를 탈탈 털어 바구니에 넣으며 물었다.

아. 맞다. 말투!

말문이 막힌 샤르망은 잠시 고민했다.

역시 너무 이상하면 의심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샤르망은 한참 만에야 핑계거리를 찾아냈다.

“자, 자다가 침대에서 떨어져서 머리를 다쳐서…….”

“헤에? 진짜? 그래서?”

어린 너구리가 깜짝 놀라며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뒤로 펄쩍 뛰었다.

자그마한 몸에서 어찌 저렇게 풍부한 표정과 행동이 나오는지 부러울 정도였다.

“……그래서 기억을 잃었습니다. 그러니 이해 부탁합니, 아니, 부탁해.”

“허억! 정말로? 기억을 잃으면 어떻게 돼?”

샤르망은 잠시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기억을 잃으면 아무것도 모르게 돼.”

“그럼 바보가 된 거야, 샤르망?”

해맑은 질문이었으나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이 몸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니 바보가 된 걸 수도 있겠다.

샤르망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로 왔어?”

샤르망의 질문에 어린 너구리가 고개를 갸웃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진짜 하나도 기억에 없구나? 나는 거의 매일 오는데? 네가 주문한 아침을 전달해야 하니까. 알렉산드로 님이 가져오시는 날 외에는 거의 내가 오는 편이야.”

아침을 주문한다라. 샤르망은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매일?”

“응, 안 그럼 샤르망이 굶으니까. 굶으면 사나워지고 사나워지면 가게 문을 안 열어. 그러면 곤란한 사람들이 많거든. 그러니까 가져와야 해.”

아침을 챙겨 먹는 일이 그 정도로 중요한 일이라고?

거울을 봤을 땐 전혀 화를 내지 않을 사람처럼 보였다.

아무리 화가 난 모습을 떠올리려고 해도 상상이 되지 않았다.

“굶으면 사나워진다. 짐승처럼 변한다는 뜻?”

어린 너구리가 샤르망을 빤히 올려다보며 눈을 깜박였다.

“……기억 돌아오면 때릴 거야?”

그러자 샤르망이 깜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때리지 않습니다.”

그러자 어린 너구리가 안도의 한숨을 쉬고 말했다.

“되게, 되게 사나워져! 100가지가 넘는 욕을 하고 힘도 되게 되게 세져! 그땐 절대 건들면 안 돼.”

“100가지가 넘는 욕을……?”

“응. 알렉산드로 님이 500년 만에 처음 듣는 욕이랬어. 먹을 거 안 주면 큰일 나. 어릴 때 맨날 굶어서 그런 거라며. 그것도 기억 안 나?”

샤르망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500년이라니.

비범한 상대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녀의 생각보다 훨씬 오랜 세월을 산 너구리였다.

그럼 이 너구리도 제법 나이가 많을지도 몰랐다.

어린 너구리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럼 가게는 어떡해?”

“수칙은 알고 있어. 최대한 노력해 볼 생각…… 이야.”

샤르망이 진지하게 어린 너구리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정말 아무것도 기억 안 나는 거야? 흠, 좋은 방법이 없으려나?”

꼬르르르륵.

심오한 대화 중에 낯선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샤르망은 얼어붙은 것처럼 그 자리에 딱딱하게 굳었다.

퀭해 보이던 눈을 동그랗게 뜬 어린 너구리가 샤르망의 얼굴과 배를 빠르게 번갈아 보더니 바구니를 덥석 들었다.

“우선 아침부터 먹자. 사나워지기 전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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