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의 세신사 영애님-143화 (143/150)

외전 14화.

산수이는 옛날부터 대가족을 이루는 게 꿈이었다.

살면서 한 번도 가족이란 걸 가져본 적이 없으니 당연했다.

특히 목욕탕에 엄마 손을 잡고 오는 아이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저에게는 서로 등을 밀어줄 수 있는 엄마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쌍둥이가 태어났을 때 뛸 듯이 기뻤다.

‘애들이 좀 더 자라면, 내가 직접 때를 밀어줘야지!’

특히, 딸인 이르히를 보며 산수이는 기대감에 부풀어있었다.

딸과 함께 손을 잡고 여탕에 가는 상상을 수도 없이 했다.

내 딸에게는 꼭 행복한 기억을 만들어 줘야지.

어려서부터 엄마가 등을 밀어주는 추억 말이다.

그러다 아이가 자라면 반대로 내 등을 밀어주고…….

그랬는데.

“엄마, 저는 휘온 공작님하고 결혼할 거예요.”

그녀의 꿈은 와장창 깨져버렸다.

그 사랑스러운 고사리손을 잡고 목욕탕에 가 보기도 전에 딸은 성인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딸을 잃…… 아니, 딸이 둥지를 떠나버리자, 산수이의 상실감은 너무나 컸다.

허망함에 빠진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얀피르는 시름시름 앓으며 말라가고 있었다.

매일 휘온의 공작저로 출석 도장 찍으러 가는 이르히를 보며, 얀피르는 눈물을 훔쳤다.

그 모습을 보며 산수이는 결심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고.

산수이는 슬퍼하는 제 반려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얀피르.”

그러자 얀피르가 태연한 척 웃었다.

“응, 왔어?”

하지만 산수이는 그 웃음 속에 담긴 제 반려의 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우리, 셋째 낳자.”

그러자 얀피르의 눈이 커졌다.

“뭐? 그건 안 돼, 주인.”

“왜?”

“네가 고생하는 거 또 보기 싫으니까.”

그랬다.

드래곤의 피를 이어받은 아이들은 탄생부터가 우람했다.

출산 때 산수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얀피르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소리를 지를 때마다 제 심장이 한 덩어리씩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는데.

그 경험을 또 하라니.

그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산수이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나 안 죽어, 걱정하지 마. 루헤가 우리 오래 산댔어.”

“그렇다고 안 아픈 건 아니잖아.”

“지나고 나니까 아픈 건 다 까먹었는데?”

“그래도 안 돼.”

“난 정말 괜찮다니까? 우리 딸 하나만 더 낳자아, 응?”

“아들 하나로 충분해.”

어느새 이르히는 이 집에서 없는 딸 셈 쳐지고 있었다.

실제로도 매일 집에 없었다.

산수이가 말했다.

“나도 딸 키우는 재미 좀 느껴보자.”

“아들 재밌게 키우면 되지.”

“얀이는 더 크면 여탕에 못 데려가잖아.”

그러자 얀피르가 산수이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나랑 둘이 들어가는 거로는 부족해?”

윽, 또 미남 공격이냐.

하지만 이번엔 절대 질 수 없었다.

산수이가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얀피르, 넌 나 닮은 딸 보고 싶지 않아?”

그러자 얀피르의 눈이 흔들렸다.

“너, 너 닮은 딸……?”

더 이상의 긴말이 필요 없었다.

이듬해, 정말로 산수이를 쏙 빼닮은 셋째 딸이 태어났다.

수리얀 비덴비덴 드 라첸.

물빛 머리에, 빛나는 자안을 가진 그녀는.

사내아이나 다름없었다.

응애애—

울음소리가 얼마나 우렁찬지, 저택 밖에서도 아이의 탄생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각종 운동을 섭렵했고, 얀피르와의 대련에서도 힘으로 밀리지 않았다.

“아빠! 오늘도 훈련하러 가요!”

두 살 터울의 오라버니 얀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소유자였다.

사교성 좋은 얀이 천생 연예인이라면, 수리얀은 털털한 운동선수랄까.

아무튼 이번 두 아이는 정상적인 발달 과정을 거쳐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런데 산수이의 욕심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으음, 얀에게 남자 형제를 만들어 줘야겠어. 혼자 심심해 보이네.’

꼭 그 이유뿐만이 아니더라도, 그녀의 꿈은 ‘대가족’을 이루는 것이었으니까.

아이를 많이 낳아 북적북적한 집안 분위기를 만드는 게 그녀의 소망이었다.

그녀가 또다시 얀피르에게 말했다.

“얀피르, 우리 딱 아들 하나만 더 낳자, 응?”

“너 닮은 아들은 이미 있어, 주인.”

하지만 산수이는 고개를 저었다.

“너랑 나를 반반씩 닮은 아이가 태어난다면, 정말 얼마나 귀여울까?”

“우, 우리를 반반씩 닮은 아이라고……?”

얀피르는 또 넘어갔다.

그렇게 시작된 산수이와 얀피르의 마지막 가족계획.

그 계획은 딸만 셋이 줄줄이 태어나면서 와르르 무너졌다.

응애애—

네 번째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리스 비덴비덴 드 라첸.

그녀는 휘온도 인정한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였다.

글자를 읽을 수 있게 되던 순간부터, 아이리스는 종일 도서관에만 틀어박혀 살았다.

졸지에 딸이 둘…… 아니, 셋이나 생긴 얀피르는 매일 싱글벙글했다.

하지만 산수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듬해 다섯 번째 아이가 태어났다.

빼애액—

앤 비덴비덴 드 라첸.

미워할 수 없는 사랑스러운 장난꾸러기였다.

앤은 아빠랑 노는 걸 가장 좋아했다.

그래서 가끔 아빠를 두고 엄마와 싸웠다.

산수이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고, 그날 밤 얀피르는 제 반려 앞에 또다시 무너졌다.

여섯 번째 아이가 태어났다.

앨리스 비덴비덴 드 라첸.

예술적 감각을 타고난 여자아이였다.

앨리스는 남과는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그걸 캔버스 위에 그려내곤 했다.

이렇게 아이가 여섯이 되자, 얀피르는 결단을 내렸다.

육아휴직만으로는 도저히 여섯 아이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저택에는 수많은 사용인이 있었지만, 얀피르는 아이들을 제 손으로 직접 키우고 싶었다.

그래서 아예 장기 휴직계를 내버렸다.

프리트가 노발대발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렇게 육아에 전념할 수 있게 된 얀피르는, 비덴산 한쪽을 아예 놀이터로 바꿔버렸다.

분명 그네, 미끄럼 같은 간단한 시설만 설치할 예정이랬는데.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그곳은 꿈과 환상의 나라가 되어있었다.

때아닌 디즈니 월드를 본 산수이가 입을 쩍 벌렸다.

“얀피르…… 이게 다 뭐야?”

“어때, 굉장하지? 재밌겠지?”

어째서인지 아이들보다 얀피르가 더 신나 보였다.

그렇게 남작령에선 항상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아이들은 특히나 제 아빠를 좋아했다.

그가 언제나 지칠 줄 모르는 무한 체력으로 애들과 놀아줬기 때문이다.

“아빠! 오늘도 비덴산 놀러 가요!”

얀피르가 아이들을 번쩍 들어 올렸다.

“좋아, 가자!”

아이들이 얀피르를 놓고 싸우기 시작했다.

“내가 아빠 손 잡을 거야!”

“아니야 내가!”

“나중에 커서 아빠랑 결혼할 거야!”

“아니야! 나랑 결혼하기로 했어! 그쵸, 아빠?!”

이미 한 번 도둑놈한테 딸을 뺏겨본 적 있는 얀피르로서는 이보다 더 행복할 수가 없었다.

그가 찡해져 오는 코끝을 슥 문질렀다.

하지만 산수이는 만족할 수 없었다.

원래 바람과는 다르게 딸부잣집이 되는 바람에, 아직 얀을 위한 남자 형제는 만들어주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얀피르는 그런 제 반려가 걱정됐다.

“주인, 이제 아이는 충분하지 않을까?”

“무슨 소리야! 한 번만 더 해보자!”

“벌써 여섯인데? 나 정말 네가 너무 걱정돼. 난 지금도 충분히 행복하다고.”

“행운의 일곱까진 가야지!”

그리고 마침내 산수이의 바람대로 아들이 태어났다.

야니 비덴비덴 드 라첸.

얀피르를 쏙 빼닮은 그는, 낙천적이고 유쾌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렇게 놀이터에서 뛰노는 일곱 남매, 아니.

집 나간 한 명을 제외한 여섯 남매를 바라보며, 산수이는 흡족하게 끄덕였다.

‘이제 됐어!’

자신이 바라던 행복한 대가족의 모습이었다.

더는 바랄 것이 없었다.

하지만, 인생은 결코 원하는 대로만 흘러가는 것이 아니었다.

***

‘이건 말도 안 돼.’

여덟 번째 아이가 들어서고 나서야 산수이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분명 얀피르와 함께 조심하고 또 조심했는데.

이 시대에서 할 수 있는 피임법이 극히 제한적이라는 게 문제였다.

뭘 먹거나, 바르거나.

혹은 리넨을 사용하는 게 전부였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얀피르의 마법으로, 그들은 산수이의 배 속에 또다시 두 개의 심장이 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얀피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주, 주인. 또…… 쌍둥이네?”

“그럼 아, 아홉 남매라고?!”

그렇게 여덟 번째로 얀리 비덴비덴 드 라첸이 태어났다.

응애애—

산수이의 사업가 기질을 그대로 물려받은 아들이었다.

아홉 번째 아이인 수 비덴비덴 드 라첸은 호탕한 성격의 여자아이였다.

어째 이름이 반복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겠지만 절대 귀찮아서 대충 지은 이름이 아니었다.

그렇게 졸지에 아홉 남매의 부모가 된 산수이와 얀피르.

이 이상은 안 된다.

그들은 서로를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부터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사랑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결국 열 번째 딸까지 태어나고야 말았다.

수이 비덴비덴 드 라첸.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운 응석받이 막둥이였다.

산수이는 할 말을 잃었다.

부부는 더 이상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

“이르히, 수리얀, 아이리스, 앤, 앨리스, 수 아가씨! 얀, 야니, 얀리 도련님! 어서 식사하세요!”

점심시간이 되자 유모가 목청 높여 아이들을 불렀다.

옆에서 집사가 말했다.

“이르히 아가씨께선 이곳에 안 계시잖습니까.”

“어머, 내 정신 좀 봐!”

곧이어 정원에서 신나게 뛰놀던 개구쟁이들이 우당탕 뛰어 들어왔다.

“밥!!!”

“배고파!”

“아빠 옆에서 먹을래!”

“안 돼! 아빠는 내 거야!”

“아니야! 아빠는 엄마 거야! 그쵸, 엄마?”

“잘 먹겠습니다!”

“큰언니네는 또 언제 온대?”

“앗 뜨거워!”

쨍그랑!

“우애애앵-!”

“아앗, 도련님! 케이크에 손가락 찍으시면 안 돼요!”

혼돈의 카오스였다.

모두가 아이들을 하나씩 전담 마크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프로 아빠 육아러가 된 얀피르는, 이 혼란 속에서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가 능숙한 손길로 밥을 떠먹여 주고, 애들 입가를 닦고, 마법으로 깨진 그릇을 치우고, 편식하는 애들을 잡아냈다.

“당근 안 먹는 사람은 이따가 아빠 등 안 태워줄 거야.”

드래곤 모습으로 애들을 태우고 하늘을 나는 걸 말하는 거였다.

“잘못했어요, 아빠!”

애들은 순식간에 온순한 양으로 변했다.

그런 제 남편을 산수이는 경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난 육아의 신과 결혼했다……!’

그렇게 또 전쟁 같은 하루가 지났다.

늦은 저녁.

드디어 부부는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됐다.

산수이가 침대에 걸터앉아 얀피르의 얼굴을 사랑스럽게 쓰다듬었다.

“얀피르, 오늘도 힘들었지?”

“전혀. 오늘도 너무 행복했어.”

……라고 말하는 얀피르의 얼굴은 이미 핼쑥해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산수이는 탄식했다.

‘아, 안 돼. 내 남편 미모가 상하기 시작했어.’

얀피르의 소년미를 잃을 순 없는데!

하지만 얀피르는 지쳐 쓰러지긴커녕, 또다시 그녀를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수희야, 그럼 우리 이제…….”

“자, 잠깐! 잠깐만 얀피르!”

“응? 왜, 오늘 안전한 날 아니었어?”

마, 맞긴 하는데!

‘너랑 나는 정말 손만 스쳐도 사랑이 꽃피는 수준이란 말이야!’

열한 번째 아이는 절대 안 돼!

하지만 이렇게 매번 얀피르랑 손만 잡고 잘 수는 없었다.

결국 산수이는 결단을 내리고야 말았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라고, 없으면 내가 만든다.’

그렇게 산수이는 훗날 제국 최고의 발명품이라 불리는, ‘그것’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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