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3화.
마왕성으로 돌아간 휴와 듀는 날이 밝는 대로 루헤를 찾아갔다.
그리고 발레아나가 시킨 대로 전했다.
“마왕님! 맛있는 빵 다시 먹을 수 있게 됐다!”
“파티시에 찾았다, 황실에서 일했던 파티시에!”
“데려와도 돼? 맛있는 빵 먹고 싶어!”
그 말을 들은 루헤가 흥미를 보였다.
“흐응?”
저 역시도 제국 황녀가 가져왔던 케이크가 가끔 생각나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짚고 넘어갈 게 있었다.
그가 예쁘게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그 파티시에는 대체 어떻게 찾은 걸까요?”
꿀꺽.
저들을 바라보는 시뻘건 눈동자에, 휴와 듀가 침을 삼켰다.
다리가 와들와들 떨려왔다.
하지만 이 질문 역시 예상한 대로였다.
그들은 천천히, 또박또박 준비해온 대로 말했다.
“그, 그 인간 여자가 알려줬다!”
“빠, 빵 먹고 싶어서 몰래 제국에 갔었어. 미안해, 마왕님!”
인간 여자라.
아마도 산수이를 말하는 것일 터였다.
루헤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크가 먹고 싶어 산수이에게 다녀왔나 보군요.’
하긴 산수이라면 황실에서 일했던 파티시에 정도는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루헤가 휴와 듀를 향해 말했다.
“좋아요, 그 파티시에를 데려오세요.”
“정말?”
“정말이지 마왕님! 야호!”
신나서 파닥거리는 두 박쥐를 보며 루헤 역시 싱긋 웃었다.
그 파티시에가 발레아나 황녀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
그렇게 발레아나는 마법 스크롤을 사용해 단숨에 마왕성에 도착했다.
한 손에는 미리 준비해 둔 케이크를 잔뜩 든 채로.
휴와 듀가 그녀의 머리 위에서 신나게 날아다녔다.
“얼른 가자, 인간!”
“마왕님이 기다리고 계셔!”
“응!”
발레아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마왕성이라니.
어떻게 이런 미친 짓을 벌일 수 있었는지, 저 자신도 놀라웠다.
예전 같았다면 상상조차 못 할 일이었다.
지금 제가 여기 있는 걸 프리트가 안다면, 분명 이곳을 불바다로 만들고도 남을 터.
하지만 이대로라면 다른 왕족과 결혼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남자가 루헤보다 못생겼을 거란 건 안 봐도 뻔했다.
‘절대 싫어!’
일단 루헤를 만나자.
그러고 나서 그 얘기를 하자.
그렇게 발레아나는 마왕의 집무실로 향했다.
휴와 듀가 날개를 부딪쳐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마왕님, 왔어!”
“파티시에가 빵 갖고 왔어!”
“……들어오세요.”
끼이익—
천천히 문이 열렸다.
발레아나의 심장이 몇 배는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아아, 진정하자.’
이윽고 햇살에 비친 그의 옆모습이 보였다.
그가 마치 느린 연극의 한 장면처럼 천천히 몸을 돌렸다.
마침내 그 찬란한 미모가 자신을 향해 섰다.
발레아나는 들고 왔던 바구니를 툭 떨어트려 버렸다.
휴와 듀가 부산스럽게 파닥였다.
“빵-! 빵 떨어트렸어!”
“망가지면 안 돼!”
하지만 발레아나의 마음속엔 이미 케이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녀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하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루헤의 표정은 너무도 차가웠다.
그가 휴와 듀에게 손짓했다.
“……나가 있어요.”
“마, 마왕님!”
“당장.”
휴와 듀는 케이크 바구니를 눈물겹게 바라보며 방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문이 닫히자, 루헤가 발레아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이봐요, 황녀.”
그가 시뻘건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그대가 왜 여기 있는 거죠?”
나를, 나를 알아봤어!
기억하고 있었어!
마음이 너무도 벅차올라서, 발레아나는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눈물을 꾹 삼키고 마음을 다잡았다.
준비해온 말을 하기 위해서.
그녀가 당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국혼을 제안하러 왔습니다.”
“……예?”
황당한 표정의 루헤를 향해 발레아나가 말을 이었다.
“저랑 결혼해 주세요, 대마왕님.”
***
루헤는 자신과 마주 앉아있는 제국의 황녀를 바라보았다.
‘하아, 이건 또 무슨 상황인 거죠.’
결혼이라니?
매우 심각한 귀찮음이 예상됐다.
그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여기에 온 걸 인간의 황제도 알고 있나요?”
“아뇨, 이건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제안. 황제 폐하께선 모르고 계십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루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봐요, 황녀. 국혼 따위는 필요 없어요. 난 전쟁을 일으킬 생각이 추호도 없으니까.”
“물론 그 점은 폐하도, 저 역시도 알고 있습니다.”
“그럼 대체 뭐가 문제인 거죠?”
발레아나는 현 상황에 관해 설명했다.
제국의 관료들이 마계와의 관계를 굳건히 하기 위해, 국혼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루헤가 인상을 찌푸렸다.
‘쯧. 갑자기 누이들한테서 연락이 온다 했어요. 난 관심도 없는데 말이죠.’
물론 그 서신을 읽지도 않고 버렸던 그였다.
온갖 귀찮을 상황들이 예상됐다.
제국에서 사신들이 왔다 갔다 하는 풍경이라든가.
여태껏 교류가 없던 제 누이들이 저에게 하나둘씩 들러붙기 시작하는 모습 따위의.
‘정치란 정말이지 끔찍하다니까요.’
루헤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 그냥 다 죽여버릴까?
제 아비가 남긴 혈육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싹 다.
‘그럼 또 뒤처리해야 하잖아요.’
생각만 한 건데도 벌써 진이 빠졌다.
얼른 침대에 누워 잠이나 자고 싶어졌다.
루헤는 제 앞에 앉은 작은 인간 여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국혼이라.’
확실히 이 귀찮은 상황을 제일 간단히 치워버릴 방법 같긴 했다.
식을 올린 후, 저 황녀란 인간에게 대충 좋은 별관을 내어주면 되겠지.
자신이 그곳을 굳이 찾아갈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아까부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었다.
황녀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지?
혈육을 위해 굳이 제 인생을 걸겠다고?
그게 아니라면 설마.
루헤는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발레아나의 바로 옆에서 다시 현신했다.
“!!”
코앞에서 루헤의 얼굴을 보게 된 발레아나는 그만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루헤는 확신했다.
‘역시.’
자신의 예상대로였다.
루헤가 물었다.
“황녀, 당신 설마 내게 반했어요?”
“예, 예에?”
“하아…….”
최악이네.
이게 이유라면, 국혼은 절대 올릴 수 없다.
보나 마나 애정을 갈구하며 저를 귀찮게 해대겠지.
그런 건 딱 질색이었다.
루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봐요, 황녀. 나에 대해 대체 뭘 알죠?”
“그, 그야 루헤 님께서는 대륙에서 가장 강하시고…….”
“대답이 틀렸어.”
루헤가 자신의 얼굴을 더 가까이 들이댔다.
“내 얼굴 때문이잖아요, 황녀.”
그동안 제 겉모습에 반해 현혹된 자들을 수없이 봐 왔으니까.
발레아나는 숨이 멎은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루헤가 말을 이었다.
“난 당신이 상상하는 멋진 왕자님이 아니에요. 내가 위험하다는 거, 아무도 말 안 해 줬어요?”
그가 날카로운 손톱으로 그녀의 턱을 슥 들어 올렸다.
그의 눈동자가 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그의 숨결에선 차가운 냉기가 돌았다.
발레아나는 처음으로 루헤에게서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루헤의 손톱이 발레아나의 머리카락으로 옮겨갔다.
그가 그녀의 머리를 비비 꼬며 조용히 읊조렸다.
“황녀같이 작은 인간을 파멸시키는 건 나한텐 일도 아니에요.”
“그, 그렇지만 루헤 님은 인간을 해치지 않으시잖아요?”
“누가 해친대요?”
그가 세상 예쁘게 웃으며 말했다.
“나와 결혼하면, 황녀는 평생 첨탑에 처박혀 빛을 못 보게 될 수도 있어요.”
“!”
“아니면 내가 대충 갖고 놀다, 질려서 버릴지도 모르지.”
루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온통 끔찍한 것들뿐이었다.
그가 발레아나를 향해 싱긋 웃으며 마지막 말을 이었다.
“그러니 함부로 마족을 사랑하지 말아요, 아가씨.”
그렇게 말하며 루헤는 발레아나에게서 떨어졌다.
그가 기지개를 켜고 하품했다.
“하암, 아무튼 난 자야겠으니. 할 말이 더 없다면 이만 나가줘요.”
잔다고?
지금 해가 중천인데?
순간 발레아나는 일전에 얀피르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루헤 그놈은 너무 많이 자서 탈이야.’
설마 많이 잔다는 게, 정말 문자 그대로 ‘자는’ 걸 말한 거였나?
그때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온 건, 루헤의 새로운 보좌관이었다.
“마왕님, 결재하실 서류를 들고 왔…….”
하지만 루헤가 그의 말을 잘라버렸다.
“귀찮으니까 아무 데나 대충 놓고 나가세요.”
그렇게 말하는 루헤의 표정은 세상에서 가장 게을러 보였다.
발레아나의 머리에 이번엔 산수이의 말이 떠올랐다.
‘배우자가 될 사람은 적어도 성실해야 해.’
발레아나는 이제야 모든 게 이해됐다.
왜 제 주변인들이 그렇게나 저를 말렸는지.
‘루헤 님이 마족이라, 마왕이라 그런 것이 아니었어……!’
아까 제가 느낀 그 공포감.
뭐든지 귀찮다는 듯한 저 표정.
루헤 슈바츠발트는 정말이지.
‘세, 세상 최악의 남편감……?’
……이었던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 루헤는 집무실 소파 위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정말로 낮잠을 자려는 모양이었다.
그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보였다.
찬란하고, 아름답게만 빛나던 그 남자는 없었다.
그가 세상 게으른 남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발레아나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상냥해.”
“……?”
그 말에 루헤가 눈을 번쩍 떴다.
“지금 뭐라고요?”
“상냥하다고요, 마왕님.”
루헤가 코웃음을 쳤다.
“하! 아까 내가 한 얘긴 뭐로 들은 거지?”
그가 순식간에 검은 연기와 함께 발레아나의 앞에 나타났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황녀 스스로가 목숨을 끊게 만들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렇게 안 했잖아요.”
발레아나가 루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루헤 님의 말처럼, 그냥 저와 결혼하신 후 망가트릴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잖아요.”
“그거야 귀찮…….”
하지만 이미 발레아나가 루헤를 꽉 끌어안은 후였다.
당황한 루헤가 발레아나를 떼어내려 했다.
“이, 이봐요 황녀!”
발레아나가 그의 품에 얼굴을 비볐다.
“상냥해요.”
“미쳤어요?”
“당신은 상냥해요, 마왕님.”
결국 루헤는 다시 검은 연기와 함께 사라져, 제가 누워있던 소파로 이동했다.
발레아나가 아쉬운 듯 그를 돌아봤다.
루헤가 손가락을 치켜들며 말했다.
“귀찮게 하지 말고 당장 돌아가요. 그리고 다시는 볼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요.”
“그래도 케이크는 받아주세요, 마왕님. 일부러 더 신경 써서 만들어 온 거니까요.”
맞다, 케이크.
루헤는 마법을 쓰려던 것도 잊은 채, 바닥에 놓인 케이크 바구니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보며 발레아나가 씩 웃었다.
“얼른 드셔보세요. 뭘 좋아하시는지 알아야 다음에 더 많이 가져오죠.”
“설마 여길 또 오겠다고요?”
“네.”
“누구 맘대로.”
하지만 발레아나도 물러서지 않았다.
“제 출입을 막는 결계라도 치실 거라면, 그렇게 하세요. 그럼 저도 다 생각이 있으니까요.”
루헤가 불안한 눈빛으로 발레아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어차피 기왕 여기 못 오게 된 거, 오라버니께 다 얘기하려고요. 나는 대마왕을 사랑한다……!”
“그만!”
그건 정말이지, 매우 매우 매우 귀찮을 거라 예상되는 시나리오였다.
인간의 황제 놈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시끄럽게 날뛸지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루헤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다시 말하지만 난 당신과 결혼할 생각이 없어요, 황녀.”
발레아나가 씩 웃으며 말했다.
“바로 결혼해달라고 하지는 않을게요. 대신 가끔 이곳에 케이크를 들고 찾아오는 걸 허락해 주세요.”
“뭐라고요?”
“루헤 님께도 나쁠 것 없는 거래잖아요? 그냥 저랑 함께 케이크를 드시는 것뿐인걸요.”
루헤가 발레아나를 서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지만, 그녀 역시 지지 않았다.
꽂힌 상대가 있으면 일단 결혼부터 하자고 들이댄다.
상대가 뭐라고 하든 일단 물고 늘어져 본다.
‘인간 황제 놈이랑 하는 짓이 똑같잖아요……!’
그녀의 얼굴에서 프리트가 겹쳐 보였다.
발레아나가 푸른 눈동자를 이글거리며 다짐했다.
‘오라버니, 두고 보세요. 전 오라버니처럼 사랑에 실패하진 않을 거예요.’
그녀가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였다.
제 상냥한 남자를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