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1화.
맑고 화창한 어느 날.
카데베르 제국 창공에 갑자기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처음엔 그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얀피르 후작님께서 황궁으로 출근을 하시는가 보다 했으니까.
하지만.
자세히 보니, 그건 한 마리가 아니었다.
“드, 드래곤이 두 마리다!”
제국민들은 놀라 입을 떡 벌렸다.
한 마리는 후작님일 테고, 그럼 나머진 대체 누구지?
그때, 두 마리의 드래곤이 서로를 향해 포효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내뿜은 불꽃이 하늘을 가득 메웠다.
설마 또다시 전쟁인가?
제국민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들은 혼비백산해 서둘러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드래곤들은 어째서인지 서로를 공격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그때였다.
“끄으으으…….”
갑자기 드래곤 한 마리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서럽게 울던 그는 곧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비덴비덴 남작령이 있는 방향이었다.
게다가 홀로 남겨진 드래곤이 몸을 돌려 향한 곳은.
바로 에데카나 공작저였다.
“?!”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래?”
이 전대미문의 사건은 곧 제국의 황제, 프리트에게 보고되었다.
***
제국 황제의 집무실.
한 시종이 프리트에게 일전의 사건에 대해 상세히 보고했다.
그가 놀라 물었다.
“그 새로운 드래곤이 얀피르 놈 딸이었다고?”
“그렇습니다. 며칠 전 갑자기 성체로 자라났다 합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얼마 전에 돌잔치를 치른 아이가 아닌가?
‘뭐, 드래곤의 피를 이어받았으니 인간과는 성장 속도가 다를 수도 있겠지.’
프리트가 물었다.
“그건 그렇다 쳐도, 얀피르 놈이 제 딸이랑 싸울 일이 대체 뭐가 있어? 그놈이 애들을 얼마나 예뻐하는데?”
정말 이해되지 않는 건 바로 이 부분이었다.
얀피르가 제 가족하고 싸웠다고? 다른 놈도 아니고, 그놈이?
시종이 천천히 설명을 이어나갔다.
문제의 그날 아침.
얀피르 후작이 갑자기 공작저를 방문했다.
언제나처럼 휘온의 침실 창문을 통해서였다.
하지만 얀피르가 휘온에게 뭐라 말을 붙이기도 전에, 갑자기 뒤에서 또 다른 드래곤 한 마리가 쳐들어왔다.
그의 딸, 이르히였다.
이후 휘온의 침실 안에서 한동안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고 했다.
어찌나 시끄러웠는지, 공작가 사용인들 모두가 그 대화 내용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르히가 외쳤다.
“이 사람 눈썹 하나라도 다치게 하기만 해 봐. 아무리 아빠라 해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 밖에도 예뻐 죽겠는데! 난 손대기도 아까워서 보고만 있었는데!
……등등의 부연 설명이 이어졌다고 했다.
“이르히 너 지금 아빠 앞에서 휘온 놈 편을 드는 거냐?”
“놈이라뇨, 제 반려가 될 사람입니다!”
“너 아빠가 좋아, 휘온이 좋아!”
“뭘 당연한 걸 물어보시고 그래요?”
사용인들이 몰래 문틈 사이로 지켜본 결과.
이르히 영애는 대답 대신 옆에 있던 휘온 공작을 꽉 끌어안았다.
가엾은 휘온 공작은 그녀의 악력 때문에 저항도 못 했다고 전해졌다.
곧이어 광분한 얀피르가 드래곤으로 변하려던 찰나.
이르히 영애가 제 아버지의 목에 헤드록을 걸고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그 이후의 상황은 제국민 모두가 지켜본 대로였다.
전말을 알게 된 프리트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게 대체 뭔 상황인가.
그러니까, 얀피르 놈 딸이 휘온에게 구애를 하고 있다는 건가?
견원지간이었던 두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 둘이 사돈을 맺게 생겼…… 아니, 심지어 사돈도 아니지.
휘온이 얀피르의 사위로 들어가게 생겼다고?
프리트의 입이 자꾸만 씰룩였다.
그가 시종에게 조용히 명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라.”
“예, 폐하.”
“은밀히 사람을 붙여서, 휘온과 이르히 영애를 뒷조사해.”
“예? 뒷조사라 하시면…….”
“둘이 어디서 어떻게 만나는지, 하나도 빼놓지 말고 모조리 나한테 보고하란 말이야.”
프리트가 씩 웃었다.
지루한 황궁 생활에 오랜만에 재미있는 유희 거리를 찾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그가 받은 보고는 그의 기대를 뛰어넘고도 남는 것이었다.
***
“제국력 000년 0월 3일. 새벽에 에데카나 공작이 은밀히 마차를 타고 의상실로 향했다.”
시종은 황제 앞에서 자신이 조사해온 것을 읽어내려갔다.
“그가 의상실에 들어서는 순간, 먼저 도착해 있던 이르히 영애가 불쑥 튀어나왔다. 놀란 공작이 뒤로 나자빠졌지만, 영애가 가볍게 그를 받아냈다.”
여기까지 듣던 프리트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잠깐, 이르히 영애는 휘온 놈이 의상실에 갈 거란 걸 어떻게 미리 알고 있었던 거지?”
“송구하오나 폐하, 거기까지는 저도 잘…….”
엄청난 정보통을 가진 영애인가?
그때, 프리트의 머리에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설마.
‘휘온 놈…… 설마 그걸 아직 모르고 있나?!’
바로, 드래곤의 비늘에 위치 추적 기능이 있다는 것 말이다.
이르히는 휘온에게 딱 이렇게만 얘기했으니까.
“드래곤의 비늘은 위험으로부터 반려를 보호해요. 그러니 제 비늘을 항상 지니고 다니세요, 공작님.”
위험이라면 뻔했다.
얀피르.
휘온은 살기 위해 비늘 쪽쪽이를 가지고 다닐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프리트는 끅끅대고 웃었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이로군.”
그러자 시종이 고개를 조아리며 물었다.
“폐하, 송구하오나 소인의 귀가 어두워 잘 듣지 못했…….”
“별 내용 아니다. 계속 읽어.”
“예, 폐하.”
시종은 계속해서 보고서를 읽어 내려갔다.
“제국력 000년 0월 10일. 발레아나 황녀님의 티 파티에 이르히 영애가 참석했다. 모두의 앞에서 자신이 에데카나 공작을 마음에 두고 있다고 밝혔다.”
프리트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휘온 놈을 마음에 두고 있는 영애가 이 제국 땅에 한둘이야?”
“그것이…… 이르히 영애께서 어찌나 살벌하게 엄포를 놨는지, 이후 그 어떤 영애도 에데카나 공작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다 합니다.”
“뭐?”
프리트가 놀라 물었다.
“영애들끼리 그날 패싸움이라도 한 거야?”
“다, 당치 않습니다, 폐하! 그저 이르히 영애께서 나머지 영애님들을 한 명 한 명 쳐다본 게 전부였다고 합니다.”
눈빛만으로 제압했다는 거야, 지금?
프리트는 숨이 넘어가도록 웃었다.
그날, 시종은 해가 질 때까지 방대한 분량의 보고서를 읽어야만 했다.
휘온에 대한 이르히의 사랑이 너무나 깊어, 아무리 읽어도 끝나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황제만이 알고 있던 그 은밀한 보고는, 얼마 후 제국민 전체가 아는 기정사실이 되었다.
이제 제국 땅에서 이르히 영애가 휘온 공작을 짝사랑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어찌나 제대로 찜해놨는지, 그 어떤 영애도 에데카나 공작 부인의 자리는 감히 꿈도 꾸지 못했다.
한마디로 휘온의 혼삿길은 완전히 막혀버린 것이다.
“공작님 잘못 넘봤다간 정말 죽을 수도 있어요.”
“이르히 영애님도 후작님처럼 드래곤으로 변하실 수 있다면서요? 어휴, 무서워라.”
이제 이르히 비덴비덴 드 라첸 영애가 아니면, 그 누구와도 결혼할 수 없게 된 휘온.
하지만 그녀의 사랑이 결실을 맺기는 힘들어 보였다.
휘온은 공작저에만 틀어박혀 도통 나오질 않았으니까.
소문에 의하면, 제 방 창문에 판자를 덧대 빛조차 들어오지 못하게 해놨다고 했다.
얀피르가 무서운 건지, 아니면 이르히가 무서운 건지 알 수 없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프리트는 크게 탄식했다.
‘하아, 친우 좋은 게 뭐야. 이럴 때 서로 돕고 살아야지.’
그가 씩 웃으며 시종을 불렀다.
“지금 당장 목욕탕 회의를 소집해.”
***
목욕탕 회의.
그것은 최정예 멤버 네 명만이 참석할 수 있는 회의였다.
프리트는 황궁 목욕탕 안에서 모두를 기다리고 있었다.
곧이어 검은 연기와 함께 루헤가 나타났다.
프리트가 놀라 말했다.
“마왕 네놈이 가장 먼저 도착한 건 이번이 처음인데?”
루헤가 배시시 웃었다.
“이런 재미있는 구경을 놓칠 수야 없죠.”
“그건 그래. 자, 어서 들어오라고.”
루헤는 프리트의 바로 옆 명당에 자리 잡고 앉았다.
그는 연신 하품을 하면서도, 한 장면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로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프리트가 그에게 바나나우유와 팝콘을 건네주었다.
“받아, 역시 이럴 땐 팝콘이지.”
루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두 남자는 바나나우유를 쪽쪽 들이켜며 팝콘을 집어 먹었다.
그리고 곧이어, 첫 번째 주인공이 등장했다.
쾅-!
“휘온 이 쳐죽일 놈 어디 숨었어!”
얀피르였다.
그가 눈을 까뒤집고 목욕탕 안으로 들어왔다.
얀피르는 사실 그간 어떻게든 휘온과 만나 대화를 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공작저 창문까지 걸어 잠그고 숨어버린 그를 만날 방법이 없었다.
프리트가 얀피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이-여기야, 여기.”
“뭐야.”
얀피르가 루헤를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마족 넌 또 왜 와있어. 구경났냐?”
루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니 근데 이 자식들이?”
프리트가 말했다.
“일단 진정하고 들어와라, 얀피르. 자, 받아.”
프리트가 그에게도 팝콘을 건네줬다.
하지만 얀피르의 얼굴은 이미 시뻘게져 있었다.
“폐하 넌 이게 재밌냐……!”
그때,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목욕탕 문이 천천히 열렸다.
휘온이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어 목욕탕 안을 살피던 그는, 얀피르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으, 으아악!”
“휘온 너!”
휘온은 꽁지가 빠지게 달아났지만 소용없었다.
루헤가 마력으로 그를 구속해 목욕탕 앞까지 데려왔으니까.
휘온이 울먹였다.
“루, 루헤 님! 저한테 왜 이러시는 겁니까!”
“왜 이러긴요. 같이 목욕하자는 거죠.”
루헤가 예쁘게 웃었다.
그렇게 결국 목욕탕 안에서 마주 앉게 된 휘온과 얀피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휘온에게 얀피르가 말했다.
“설명해.”
“뭐, 뭘 말이냐.”
“도대체 내 딸을 어떻게 꾀어낸 건지, 제대로 설명하라고!”
그러자 휘온이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꾀어냈다니! 난 정말 억울하다!”
“뭐, 억울하다고?”
얀피르가 소리쳤다.
“멀쩡한 애를 하루아침에 성체로 만들어놓고는 억울하다고?!”
“나라고 영애가 갑자기 성체가 될지 알았겠어? 아니 애초에, 그런 게 가능한지조차 몰랐단 말이다!”
“뭐……?”
얀피르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러니까, 정말로 이르히 혼자서 결정한 거다?”
“그렇다니까! 영애에게서 아무것도 듣지 못한 거냐?”
“들었어. 다만…… 네놈 편을 들어주려는 건 줄 알았지.”
얀피르가 천천히 제 머리를 쓸어올렸다.
“정말로 휘온 네놈은 몰랐단 말이지.”
“그래.”
휘온은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이르히 영애가 미래를 본다는 걸, 다른 사람 앞에서 말해도 되는 건가.’
프리트와 루헤를 곁눈질하며, 휘온은 잠시 망설였다.
얀피르는 그가 왜 이러는지 바로 눈치챘다.
“너, 설마……! 네놈도 아는구나?”
휘온은 말이 없었다.
얀피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이르히 말이 정말 다 사실이었군.”
휘온과의 미래를 봤다는 말.
자신이 막무가내로 들이대고 있는 것이니, 그에겐 책임을 묻지 말아달라던 말까지.
얀피르는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한편, 옆에서 지켜보던 프리트는 어느 순간 두 남자의 대화를 따라갈 수가 없게 됐다.
‘대체 뭘 안다는 거야?’
루헤 역시 묘한 웃음을 지었다.
‘흐응, 이거 뭔가 재미있는 비밀이 숨겨져 있나 보네요.’
얀피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휘온 역시 제 딸이 가진 능력을 알고 있는 눈치인데.
그런데 저렇게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건, 비밀을 지켜주기 위해서인가.
생각해보면 휘온은 예전에도 그랬다.
얀피르가 드래곤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스스로 밝힐 때까지 함구해주지 않았던가.
심지어 제 절친이자 주군인 프리트에게도.
얀피르는 휘온을 빤히 바라보았다.
‘휘온 놈한테 이런 면이 있었나.’
그 시선에 휘온이 몸을 움찔했다.
“왜, 왜 또 그렇게 보는 거냐, 얀피르.”
“야, 휘온.”
“음?”
얀피르는 조금 화가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너, 내 딸 어떻게 생각해.”
하지만 이어지는 휘온의 말에 얀피르는 또다시 광분했다.
“전혀 관심 없으니 안심해라, 얀피르. 네가 걱정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아니 근데 이 자식이? 내 딸이 어디가 어때서!”
“뭐? 그럼 내가 네놈 딸과 결혼하기라도 바란다는 거냐?”
“그건 절대 안 되지!”
“대체 나보고 뭘 어쩌란 거야!”
그렇게 으르렁거리는 두 남자를 보며, 프리트와 루헤는 연신 팝콘을 씹어댔다.
‘쯧. 저들끼리 백날 싸우면 뭐 해. 이미 이르히 영애가 판을 다 짜 놓은 것 같은데.’
‘공작이 넘어가는 건 시간문제 같아 보이는데요…… 하암.’
얀피르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말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휘온 너한텐 내 딸 절대 못 보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얀피르 네놈 딸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내 딸이 어디가 어때서!”
“네놈 딸인 것부터가 문제야!”
두 남자는 서로를 보며 씩씩댔다.
휘온이 얀피르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아버님, 제발 따님을 제게 주십시오!’라고 애원하는 것은.
시간이 조금 더 흐른 후의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