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9화.
언제나처럼 야근이 예상되는 날이었다.
얀피르는 또다시 황궁을 탈출해 창문 밖으로 날아갔다.
임신한 제 반려가 기다리고 있는 홈 스위트 홈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프리트가 불만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얀피르 저놈 요새 영 마음에 안 들어. 예전처럼 다 같이 밤새 술 마시고 그러면 좀 좋아? 엉?”
그러자 휘온이 조용히 말했다.
“……아이까지 생겼으니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휘온 네놈 얼굴에서 왜 이렇게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느낌이 들지?”
“미련이라니요, 폐하!”
“이러다 언제 한 번 산수이 남작한테 ‘주무십니까?’라고 서신이라도 날리겠어? 엉?”
하지만 휘온 역시 지지 않았다.
“결혼식 주례 때 남편 십계명을 읊으신 폐하께서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제국 황제가 주례를 서 줬으면 영광스러운 줄 알아야지! 하여간 얀피르 놈이나 휘온 너나.”
“……아무튼 미련 같은 거 아니니, 오해 마십시오.”
“그럼 왜 허구한 날 궁에 틀어박혀 일만 하고 있어? 그 죽상인 얼굴 꼴 보기 싫으니까, 나가서 연애라도 좀 해.”
그러자 휘온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한테 일을 제일 많이 시키시는 게 누구인지 정말 모르십니까? 게다가, 폐하께서야 말로 어서 황후를 들이셔야죠.”
“잔소리하지 마, 휘온.”
“제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그날 결국 두 남자는 밤새 술잔을 부딪쳤다.
휘온이 입을 열었다.
“역시 예전이 좋았습니다. 아무와도 깊은 마음을 나누지 않고, 일에만 매달려 살던 때 말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누가 봐도 지금이 훨씬 나은데. 휘온 너, 그때 얼마나 인간미가 없었는지 알아?”
휘온은 말없이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가 쓸쓸한 얼굴로 말했다.
“인간미가 좀 없으면 어떻습니까? 다시는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
그렇게 약 이 년의 세월이 흘렀다.
휘온 에데카나 공작은 정말 자신의 말처럼 되어있었다.
마계와의 마도구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끈 그는 예전보다 더 큰 재력가가 되었다.
하지만 휘온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고, 오로지 일에만 몰두했으니까.
산수이와의 사업도 모두 정리한 지 오래였다.
그녀가 아이를 낳았다 들었을 때도 축하 선물만 보냈던 그였다.
그날도 역시 휘온은 밤늦게까지 서류를 보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서신들을 확인했다.
그중에는 비덴비덴 남작가에서 온 것도 있었다.
‘비덴비덴이라, 오랜만이군.’
휘온이 천천히 봉투를 뜯었다.
[쌍둥이 돌잔치에 초대합니다.]
‘돌잔치?’
아마도 산수이 남작의 원래 세계 문화인 듯싶었다.
게다가, 마음이 담긴 작은 선물을 준비해 달라고 적혀있었다.
아이들의 미래를 점치는 이벤트를 열 예정이라 했다.
“마음이 담긴 작은 선물이라.”
잠시 고민에 잠겨있던 휘온이 금고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번쩍-!
“뭐, 이 정도면 작으려나.”
금괴였다.
휘온은 무표정한 얼굴로 선물을 포장했다.
그 돌잔치란 곳에서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채.
***
비덴비덴 남작저에는 수많은 손님이 모여있었다.
황실의 일원부터, 마계의 귀족들까지. 저마다 손에 자그마한 선물을 든 채로 말이다.
한쪽에 준비된 바구니 안에는 이미 수많은 선물이 쌓여있었다.
‘저기에 갖다 놓으면 되는가 보군.’
휘온은 준비해 온 금괴를 턱 하니 내려놓았다.
그 선물을 본 손님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저, 저거 금괴잖아?!”
“역시 에데카나 공작님!”
그 수군거림을 놓칠 휘온이 아니었다.
‘뭐, 이 정도면 성의 표현으론 충분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뒤돌려던 찰나.
뒤에서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휘온 공작님-!”
산수이였다.
양팔에 쌍둥이를 안은 그녀가 휘온을 향해 걸어왔다.
“바쁘신데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해요!”
“무슨 말씀입니까. 당연히 참석해야죠.”
휘온은 그녀의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이란성 쌍둥이라더니, 두 아이는 닮은 구석이 정말 하나도 없었다.
‘아들 하나, 딸 하나라고 했던가.’
뽀얀 피부의 예쁘장한 아이는 물빛 머리카락에 자안을 가졌고.
‘산수이 남작을 쏙 빼닮은 딸이군.’
그리고 흑발의 아이는 휘온을 향해 황금빛 눈동자를 맹수처럼 빛내고 있었다.
휘온은 본능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이건 누가 봐도 얀피르 놈 아들이잖아? 정말 끔찍할 정도로 똑같이 생겼는데.’
아무튼 그 쌍둥이는 지나가던 개가 봐도 뉘 집 애인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휘온이 대외용 미소를 지어 보였다.
“따님이 정말 남작님을 쏙 빼닮았군요.”
그러자 산수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뇨, 얜 아들인데요?”
“……예?”
산수이가 물빛 머리의 아이를 보며 말했다.
“얘는 막내아들, 얀이고요.”
“꺄아!”
얀이 방끗 웃으며 휘온에게 잼잼을 해 보였다.
“?!”
휘온은 혼란스러웠다.
얘가 아들이라고?
그렇다는 건.
이어서 산수이가 흑발 아이를 들어 올렸다.
“얘가 첫째 딸, 이르히예요.”
이르히는 휘온을 향해 썩소를 지었다.
당황한 휘온이 물었다.
“이, 이쪽이 딸이란 말입니까?!”
그러자 이르히가 휘온을 노려보았다.
‘서, 설마 내 말을 알아들은 건가? 고작 한 살 된 아이가?’
도저히 아이라곤 믿을 수 없는 강렬한 눈빛이었다.
얀피르 놈의 얼굴을 그대로 갖다 붙인 듯한 여자아이라니.
‘안타까운 일이군.’
그때, 갑자기 얀피르가 그들에게 달려왔다.
그가 서둘러 산수이에게서 아이들을 받아들었다.
“애들은 내가 안겠다고 했잖아, 주인. 팔 아프면 어떡해.”
“아직 어린데 뭐, 하나도 안 무거워.”
아이들을 안은 얀피르가 휘온을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뭐야, 휘온 너도 왔냐?”
“이 자식이……! 그게 초대한 손님에게 할 말이냐!”
“난 초대한 적 없는데?”
그러자 산수이가 얀피르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아 왜, 주인!”
“축하하러 와 주셨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휘온 놈 축하는 필요 없…… 아야.”
“나도 네놈 따위를 축하해 주러 온 게 아니거든?”
두 남자는 몇 년이 지나도 여전히 사이가 참 좋았다.
이윽고 본격적인 돌잔치가 시작되었다.
오늘의 가장 큰 이벤트는, 역시나 돌잡이였다.
넓은 정원 한가운데 천을 깔고 선물을 쌓아둔 후.
아이들이 스스로 기어가서 원하는 걸 잡는 것이었다.
무슨 물건을 잡는지를 보면 아이의 미래를 알 수 있다고 했다.
가령, 깃펜을 잡으면 장차 위대한 학자가 된다거나.
그리고 남은 선물은 추첨을 통해 손님들에게 나눠드릴 예정이었다.
하지만 미신 따위를 믿지 않는 휘온에겐 지루한 이벤트일 뿐이었다.
‘그럼 왕관을 잡으면 황제가 되기라도 한다는 건가.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로군.’
휘온은 쌓여있는 물건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화려한 보석들로 세공된 저 단도는.
‘딱 봐도 폐하의 선물이군. 아니 누가 위험하게 한 살짜리 애한테 저런 걸 선물하느냔 말이다!’
휘온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보기만 해도 바로 눕고 싶어지는 저 비단 베개는.
‘보나 마나 루헤 님이 가져온…… 아니, 평생 잠만 자라는 뜻인가?!’
역시나 루헤는 맞은편 테이블에서 졸고 있었다.
그 밖에도 이태리타월부터 시작해 온갖 크고 작은 선물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마침내, 얀피르와 산수이가 아이를 안고 나왔다.
사회자가 외쳤다.
“자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여러분! 드디어 오늘의 하이라이트, 돌잡이이-!”
부부는 사회자의 안내에 따라 쌍둥이를 천 위에 내려놓았다.
곧 아이들은 신나게 기어 다니기 시작했다.
맞은편에서 프리트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자, 어서 기어가서 내가 준비한 선물을 잡아라, 얀! 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 제국의 대장군이 되는 거다!”
그는 무슨 경기를 관람하듯 연신 손뼉 치며 얀피르의 아들을 응원하고 있었다.
얀피르가 씩씩대며 외쳤다.
“내 아들 앞길을 왜 네가 정해, 이 폐하 놈아!”
하지만 정말 프리트의 말처럼, 얀이 몸을 돌려 단도 쪽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옳지, 잘한다!”
프리트의 눈이 기대감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휙—
아이는 금세 흥미가 떨어졌다는 듯 다시 몸을 돌려서.
덥석-!
얼마 전 새로 개발된 마도구를 잡았다.
“!”
“와아아-!”
손님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그것은 긴 손잡이 위에 구 형태의 확성기가 달린.
마이크라는 물건이었다.
사회자가 외쳤다.
“남작가의-귀염둥이! 얀 비덴비덴 드 라첸이 잡은 건 바로오-마이크!”
환호성이 더욱더 커졌다.
이어서 사회자가 아이의 미래를 점쳤다.
“자-! 과연 마이크를 잡은 아이는 어떻게 자랄까요-! 장차 그의 목소리로 세상에 널리 이로운 일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자 산수이가 흥분해 소리 질렀다.
“그게 아니라 아이돌……! 아니, 아닙니다.”
옆에 선 얀피르는 허망한 표정이었다.
‘주인, 여태 아이돌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었던 거야……?’
“꺄아-!”
아이는 그저 해맑게 웃었다.
하지만 그들의 딸 이르히는 여전히 제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는 것이,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도 보였다.
모두가 박수 소리로 남은 아이를 자신의 선물 쪽으로 유인하려 했다.
“이리 와, 착하지?”
특히나 프리트가 열심이었다.
“그래, 이르히! 동생 대신 네가 대장군이 되는 거다! 가서 내 단도를 잡아!”
이벤트가 신기했는지, 루헤 역시도 어느새 열심히 구경 중이었다.
그때 갑자기 이르히의 눈이 먹잇감을 찾은 맹수처럼 빛났다.
드디어 그녀가 어디론가 기어가기 시작했다.
사회자가 외쳤다.
“여러분, 드디어 이르히 양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무엇을 집으려는 걸까요?”
모두는 숨죽여 아이를 지켜보았다.
휘온 역시도 흥미롭게 기다렸다.
그런데.
엉금엉금.
이르히가 향한 곳은, 선물이 쌓여있는 쪽이 아니었다.
어느새 휘온 쪽으로 빠르게 기어 온 그녀가, 그의 바짓단을 턱 잡았다.
“?!”
갑작스러운 상황에 모두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가장 놀란 건 역시 휘온이었다.
“어, 저기? 저쪽으로 가야지.”
하지만 아이는 여전히 그의 옷깃을 붙잡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끄응…….”
사회자는 당황한 기색이었다.
“이, 이르히 비덴비덴 드 라첸 양이 잡은 건 바로오-음…… 고, 고위 귀족?”
그때 사회자는 얀피르와 눈이 마주쳤다.
얀피르가 그를 노려보며 손으로 목을 써는 시늉을 했다.
살기를 느낀 사회자가 서둘러 아이를 휘온에게서 떼어냈다.
그리고 다시 선물 더미 가까이에 내려놓았다.
사회자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했다.
“자, 자아-! 과연 이르히 양은 무엇을 잡을 것인가……!”
모두의 눈은 다시 이르히에게로 쏠렸다.
그녀가 과연 뭘 집을 것인가?
그리고 얼마 후, 이르히는 휘온이 가져온 금괴를 집어 들었다.
번쩍-!
아이의 손에 들린 금괴가 눈부시게 빛났다.
사회자가 흥분해 소리쳤다.
“그, 그녀가 잡은 건 바로오-! 금괴! 장차 제국 최고의 부자가 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모두가 박수를 치며 축하했다.
하지만 얀피르는 여전히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
마침내 돌잔치가 끝났다.
남은 선물은 약속대로 추첨을 통해 손님들에게 돌아갔다.
루헤가 가져온 베개를 받게 된 프리트가 광분해 소리쳤다.
“왜 하필 나한테 저 마족 놈 선물이 걸린 거야-!”
반대로 단도를 선물 받은 루헤의 표정 역시 좋지 않아 보였다.
“……전 이런 거 없어도 충분히 굵고 짧게 죽여드릴 수 있는데요.”
한편 아까의 돌발상황 때문에 진이 다 빠져버린 휘온.
그는 서둘러 공작저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저쪽에서 아이 하나가 사라졌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알게 뭐란 말인가.
‘얀피르 놈이 알아서 찾겠지.’
그렇게 서둘러 제 마차에 올라타기 위해 문을 열었을 때였다.
벌컥-
“뺘.”
그 안에는 이르히가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