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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세신사 영애님-134화 (134/150)

외전 8화.

비록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확실했다.

저 얼빠진 말투, 느릿한 걸음걸이.

항상 데리고 다니는 화동들과, 정신 나간 음악 소리까지.

틀림없는 사우나스였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등장에 모두는 할 말을 잃었다.

그 침묵을 먼저 깬 건 빨간 머리 여자였다.

“사우나스 님? 맞으시죠?”

“네에, 반갑습니다. 제가 바로 목욕의 신, 사우나스입니다.”

뭐야, 자기들끼리도 서로 모르는 사이였어?

온천 속에 있는 다섯 명, 아니.

잠들어있는 프리트를 제외한 네 명은 더욱더 혼란스러워졌다.

빨간 머리 여자가 사우나스에게 물었다.

“사우나스 님, 저 이상한 조합의 무리와 아는 사이신가요?”

이상한 조합이란 설마 자신들을 일컫는 것인가.

‘너희들이 훨씬 더 이상해 보여!’

사우나스가 빨간 머리 여자에게 대답했다.

“네에, 저분들은. 으응, 그러니까. 저의 구 사도님과 나머지들입니다만?”

나머지들은 뭔데!

하지만 그 말을 듣자, 수상한 두 남녀는 크게 당황했다.

“사, 사도님이셨다고요? 저희는 그것도 모르고!”

빨간 머리 여자가 서둘러 새하얀 바람을 일으켰다.

그러자 온천수 안에 갇혀있던 다섯 명이 물 밖으로 풀려났다.

이어서 빨간 머리 여자가 말했다.

“오해해서 죄송합니다. 저는 사실 먼 타국땅에서 온 과일의 신.”

초록 머리 남자 역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는 채소의 신입니다. 저희가 여러분께 큰 결례를 범했군요.”

뭐? 과일하고 채소의 신?!

과일의 신이란 자가 덧붙였다.

“저희는 여러분이 신의 목욕탕에 침범한 사악한 무리인 줄 알고 그만…….”

산수이가 놀라 물었다.

“신의 목욕탕이요?!”

아니, 신의 목욕탕이 왜 이 밀림 한복판에 있는 건데?

사우나스가 답했다.

“네에. 사실 타국의 신들께서 방문하신다기에, 귀빈 접대를 위해 잠시 이곳에서 온천이 나오게 해 두었답니다?”

“아니, 손님 접대는 천계에서 하시면 되잖아요?”

“우웅, 하지만 말씀드렸다시피. 천계의 목욕탕은 영 별로인걸요.”

“에휴, 그래도 비덴탕으로 안 오신 게 어디…… 아니 잠깐. 그럼 우리 능력이 뒤바뀐 것도 설마, 다 사우나스 님 때문인가요?”

“사도님? 조금 전에 제가 엄청 섭섭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요?”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거든요?”

사우나스가 축 처진 채 중얼거렸다.

“저것 봐. 역시 비덴탕으로 안 가길 잘했어…….”

“아니 빨리 설명 좀 해 보시라니까요?!”

그러자 나머지 남자들도 사우나스를 둘러싸고 다그치기 시작했다.

“주인이랑 내 몸 바뀐 거, 빨리 해결해!”

“쿠울…… 쿨.”

“……어서 원래대로 돌려놓으세요, 잠 좀 자게.”

“빨리 이 미혹술 좀 어떻게 해 주십시오, 사우나스 님.”

그 말에 산수이와 얀피르가 일제히 휘온을 돌아보았다.

“미혹술?!”

“휘온 공작님, 그게 무슨 소리세요?!”

“커흑.”

사우나스가 나서서 교통정리를 했다.

“자자, 설명해 드릴게요. 혹시라도 신성한 목욕탕에 몰래 출입하는 자가 있을까 봐, 제가 여러 가지 장난을 쳐 둔 것뿐이랍니다?”

사우나스는 ‘에헷!’ 하고 웃는 걸 잊지 않았다.

산수이가 외쳤다.

“그래서 원래대로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우웅? 어차피 열두 시가 지나면 마법이 풀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모두들 뚜껑이 열리기 직전이었다.

그럼 진작 그렇다고 말을 해 주든가!

특히나 산수이가 이를 갈았다.

‘열두 시는 뭔데!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 와 가지고!’

그때 루헤가 나서서 물었다.

“……그럼 이 밀림 안에 괴식물들이 자라난 건 무엇 때문이죠?”

그러자 이번에는 과일의 신이 앞으로 나섰다.

“아! 사실 저희가 흥분하면 주변에 과일하고 채소가 막 피어오르거든요…… 목욕할 생각을 하니 너무 신나서 그만.”

채소의 신이 이어서 말했다.

“하지만 그 역시 저희가 이곳을 떠나고 나면 사라지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자 산수이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안 되는데?

아직 배추 못 찾았는데?!

그녀가 얀피르를 돌아봤다.

얀피르 역시 같은 표정이었다.

배추, 배추를 사수해야 한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휘온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휘온은 대체 미혹술과 무엇을 맞바꾼 것인지, 눈동자에서 영민함이 사라져 있었다.

산수이가 생각했다.

‘설마 뇌를 내어준 건가.’

이번에는 프리트를 쳐다보았다.

제국 황제가 나서서 큰 소리를 한번 내줬으면 좋겠는데.

“쿠울…… 쿨.”

뭘 얼마나 많이 내어줬길래 저렇게 오래 자는 거야?!

‘루헤도 저렇게는 안 자!’

마지막으로 루헤를 바라봤다.

‘루헤, 뭐 좋은 생각 없어요?’

‘귀찮아요, 수이.’

생긋 웃는 그의 표정만 봐도 대답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건.

아니, 배추가 필요한 건.

산수이가 슬픈 눈으로 얀피르를 바라보았다.

‘나뿐이야, 얀피르.’

얀피르는 그녀의 마음이 들리는 듯했다.

‘아니? 이건 우리가 함께 해결해야 하는 문제야, 주인.’

얀피르가 산수이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나만 믿어, 수희야. 내가 배추 구해다 줄게.”

“어떻게?!”

그는 대답 대신 씩 웃었다.

얀피르가 사우나스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말이야, 사우나스. 너희들 지금 엄청난 짓을 저지른 거 알아?”

사우나스가 움찔했다.

“으, 으응? 무엇이 말인가요?”

“제국의 황제에, 마왕에, 고위 귀족들까지 싹 다 납치해서 감금했던 거잖아.”

그러자 과일과 채소의 신이 소리쳤다.

“아, 아니 납치와 감금이라니요! 그건 저희 측 오해였다고 말씀드렸는데요!”

“모르고 지은 죄도, 죄야.”

사우나스가 다급히 외쳤다.

“사람이 살다 보면 그 정도 실수는 할 수도 있는 거죠!”

“……너희들, 사람 아니잖아.”

“크윽!”

“근데 그게 끝이 아니야. 사우나스 너, 이 밀림에 온천이 나오게 했잖아?”

“으응? 그게 뭐가 잘못된 거죠?”

사우나스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이었다.

“인간계와의 조약에 따르면, 천족은 언제든 인간들에게 은총을 내릴 수 있는데요? 이것 역시 온천의 기적이라 볼 수 있죠!”

“응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조약 42항 제 11조에 따르면 말이야.”

그동안 프리트에게서 개처럼 굴려졌던 얀피르.

어느새 그의 공무원 짬밥은 무시 못 할 수준이 되어있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그 은총, 마계에는 내릴 수 없어.”

“예? 그게 이 일과 무슨 상관이죠, 드래곤 님?”

“여긴 마계니까.”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지 모르겠…….”

산수이 역시 옆에서 거들었다.

“사우나스 님, 여기 전쟁 후에 마계에 귀속됐어요.”

“……!”

사우나스의 눈빛이 흔들렸다.

얀피르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사우나스 너, 평소에 인간계 소식지 안 보는구나?”

그러자 갑자기 사우나스의 등 뒤로 새하얀 빛의 계단이 거꾸로 생겨났다.

악단들이 음악을 뒤로 감아 연주하기 시작했다.

란라라라라딴~! 라라딴!

화동들은 열심히 꽃가루를 바구니에 도로 담았다.

릭리휘 릭리휘 휙휙~!

그리고 사우나스는 재빨리 문워크 스텝을 밟아 뒤로 사라지…….

그때 얀피르가 루헤를 향해 말했다.

“어이, 마족. 이런 은총을 받고도 가만히 있을 거야? 어서 주신께 감사하다고 전령이라도 좀 보내 봐.”

주신은 천계에서 가장 높은 자.

다른 말로 사우나스의 상관이었다.

얀피르가 씩 웃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마. 왕. 의 이름으로.”

“꺄아아악-!”

결국 세 명의 신들은 그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원하는 게 대체 뭐죠?!”

얀피르가 씩 웃었다.

“여기 자란 식물들, 싹 다 두고 가.”

***

그렇게 산수이는 공갈 협박…….

아니, 협상을 통해 배추뿐 아니라 각종 농작물을 얻어냈다.

마침내 도착한 배추밭에서 산수이가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이제 정말 김치 장사까지 할 수 있다아-!”

얀피르가 뿌듯하게 제 코를 문질렀다.

드디어 제 여자가 원하는 걸 구해다 준 것이다.

그때였다.

산수이의 몸이 벅차오르는 기쁨을 감당하지 못하고, 갑자기 변화하기 시작했다.

새파란 빛과 함께 성체 드래곤의 모습으로 변한 산수이가 얀피르의 앞에 내려앉았다.

연푸른빛 비늘을 가진 그녀가 보라색 눈동자를 깜빡였다.

“주, 주인?”

드래곤이 된 제 반려를 보자, 얀피르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네가 나처럼 드래곤이 되면 이런 모습이었구나.”

산수이가 얀피르의 볼을 기분 좋게 핥았다.

얀피르가 그녀를 어루만졌다.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워.”

둘은 천천히 입을 맞추었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그러자 산수이의 몸을 감싸던 푸른 빛이 사라지며, 그녀는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중심을 잃은 그녀가 얀피르의 품으로 넘어졌다.

두 사람이 배추꽃밭 위로 함께 쓰러지자, 향긋한 꽃내음이 피어올랐다.

산수이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얀피르, 내가 필요한 걸 구해다 줘서 고마워.”

***

그렇게 모두는 원래의 능력을 되찾았다.

프리트는 드디어 잠에서 깨어났다.

그가 놀란 표정으로 두리번거렸다.

“뭐, 뭐야? 저거 목욕의 신 아니야? 저 파 대가리 한 놈은 또 뭐고?”

모두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대혼란 속에서 혼자 속 편하게 잘 수 있어서 참 좋았겠다.

휘온이 다가가 말했다.

“……폐하, 제가 나중에 다 설명하겠습니다.”

“뭔진 몰라도 일단 휘온 네놈 미혹술은 사라진 모양이군. 천만다행이야.”

“폐, 폐하!”

얀피르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러니까, 그 미혹술이란 게 대체 뭔데?”

“넌 몰라도 된다, 얀피르.”

“설마 루헤 놈 미혹술이 휘온 너한테 옮겨갔던 거냐?”

“크, 크흠!”

얀피르가 질색했다.

“정말 끔찍하군. 뭐, 미혹술 아니라 어떤 거로 유혹해도 내가 휘온 네놈한테 반할 일은 없겠지만.”

“아니 이 자식이? 해 보자는 거야?”

휘온의 미혹술이 빨리 사라져서 천만다행이었다.

두 남자가 옥신각신하는 사이.

사우나스가 루헤를 향해 간절히 부탁했다.

“정말이시죠, 대마왕님? 정말 주신께 이번 사태에 대해 보고드리지 않으실 거죠?”

“흐아암, 귀찮게 그런 걸 왜 해요.”

“정말 약속하신 거예요? 나머지 네 분께서 증인이 되어주시…… 어라?”

사우나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네 명이 아니라, 여섯 명이었네요?”

여섯 명?

그땐 그게 무슨 뜻인지,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 말의 의미는,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

산수이는 김치 사업으로 연일 큰 수익을 내고 있었다.

집사가 산수이의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남작님, 정찬이 준비되었습니다.”

“네, 금방 갈게…… 윽.”

자리에서 일어나던 산수이가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얀피르가 깜짝 놀라 그녀에게 달려갔다.

“주인, 괜찮아?”

“응. 너무 과로해서 그런가 봐. 갑자기 어지럽네.”

산수이가 파리해진 얼굴로 집사를 향해 말했다.

“죄송해요, 오늘은 식사를 못 하겠어요.”

“그럼 수프라도 준비해 오겠습니다, 남작님.”

“아니 그거 말고…… 속이 느끼해서 그런데, 김치 좀 갖다 주실래요?”

“!”

순간 얀피르의 눈이 번쩍 뜨였다.

매워서 못 먹던 김치를 갖다 달라니.

설마, 설마?

얀피르는 산수이의 배에 손을 올린 후, 마력으로 파동을 일으켰다.

그러자 손끝에서 두 개의 심장이 세차게 뛰는 게 느껴졌다.

“……!”

그의 손이 덜덜 떨렸다. 눈에선 눈물이 마구 차올랐다.

산수이가 놀라 물었다.

“얀피르? 갑자기 왜 그래?”

“수희야아-!”

그가 산수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왜? 왜 이러는데 갑자기!”

집사 역시 무슨 상황인지 곧바로 눈치챘다.

그가 빛의 속도로 집무실을 뛰쳐나갔다.

“유모, 유모-!!”

멀어지는 집사를 보며 산수이는 당황한 모습이었다.

“집사님?! 아니 둘 다 갑자기 왜 이러는…….”

그때 산수이는 보고 말았다.

얀피르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는 것을.

“얀피르, 울어?!”

그가 산수이를 꽉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사랑해, 정말로 사랑해 수희야.”

그리고 이듬해.

산수이는 건강한 쌍둥이 남매를 출산했다.

자신을 꼭 닮은 아들과,

얀피르를 쏙 빼닮은 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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