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의 세신사 영애님-128화 (128/150)

외전 2화.

프리트의 명을 받아 휘온이 가져온 것은.

바로 와인 한 병이었다.

얀피르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웬 와인?’

하지만 와인을 본 프리트의 눈빛은 경탄으로 물들고 있었다.

그가 병에 붙은 라벨을 보며 중얼거렸다.

“하, 다시 봐도 놀랍군. 휘온 네 놈이 정말로 이걸 구해올 줄은!”

그러자 휘온이 뿌듯한 표정으로 답했다.

“이 최고급 상품을 알아봐 주시다니, 역시 폐하의 안목은 남다르십니다.”

그때 얀피르가 다급히 둘 사이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자, 잠깐만. 지금 이게 대체 다 뭔데?”

휘온이 혀를 쯧 찼다.

“하여간 무식하긴. 우리 제국의 자랑인, 남카데베르산 ‘핑도네’도 모르는 거냐? 달콤한 피니시가 일품인, 최고급 와인이다.”

프리트 역시 만족스러운 듯 끄덕이며 말했다.

“게다가 이 2백 년산은 지금 이 대륙에 딱 두 병밖에 남지 않은, 아주 진귀한 것이지. 돈을 주고도 구하기 힘든 거라고.”

“루헤 님께서 한 병을 양보해 주시지 않았다면, 저 역시도 구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그 대마왕 자식이 이렇게 기특한 짓을 할 줄 몰랐는데 말이야.”

신나서 떠들고 있는 두 남자를 향해 얀피르가 인상을 썼다.

“그게 아니라, 지금 그 술이 귀한 것과 휴가 낸 나를 여기까지 불러낸 게 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 거냐고 묻는 거다.”

그러자 프리트가 이상한 질문을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야 당연하잖아? 얀피르 네놈도 함께 이 술을 마시게 해 주려고…….”

“야, 이 황제 놈아!”

얀피르가 큰 소리로 그르렁댔다.

“고작 술 마시자고 퇴근한 지 열 시간 만에 날 다시 불러낸 거라고? 그럼 어제 미리 말을 해 주든가!”

프리트가 얼굴을 찌푸렸다.

“고작이라니, 너무한 거 아냐? 이게 얼마나 구하기 힘든 술인지나 알아? 오랜만에 다 같이 오붓한 시간 좀 보내자는데!”

“오붓한 시간이라니, 무슨 끔찍한 소리야!”

그러자 휘온이 말을 덧붙였다.

“하, 누군 드래곤 네놈과 같이 있는 게 좋아서 이러는 줄 아냐.”

“와인 구하러 마계까지 갔다 온 놈이 할 소리야?”

“그야.”

휘온은 어느새 테이블 위에 와인 잔 세팅까지 마친 후였다.

“이 제국 땅에서 내 주량과 맞먹는 자가, 폐하 외에는 네놈밖에 없는 걸 어쩌겠어.”

프리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귀한 술은 친우와 함께 마셔야 제맛이지.”

하지만 그 말에 얀피르와 휘온이 동시에 그를 돌아보았다.

“친우……? 넌 친우를 이렇게 밤낮으로 굴려 먹냐?”

“제가 폐하의 진정한 친우라면, 이제 그만 보좌관 자리에선 물러나도 되겠습니까?”

“공과 사는 구분할 줄 알아야지!”

그게 황제 네가 할 말이냐?

하지만 프리트는 두 남자의 시선을 무시한 채, 와인 잔에 술을 따라 얀피르에게 건넸다.

“먼 길 다시 날아오느라 목말랐을 텐데, 일단 얼른 받아. 원래 술은 낮술이지.”

“난 안 마신다니까!”

“어허, 황명이다!”

***

결국 산수이를 걸고 하는 협박에, 얀피르는 그들과 낮술 판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얀피르가 도망갈까 걱정되었는지, 두 남자는 술병을 최대한 천천히 비웠다.

프리트가 시중을 향해 명령했다.

“가서 캐비아를 더 가져와. 금가루 팍팍 뿌리는 거 잊지 말고.”

얀피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폐하 너, 여기서 안주를 또 추가하겠다는 거야? 빨리 술이나 비우라니까?”

휘온이 혀를 찼다.

“이 술은 그렇게 무식하게 들이붓는 게 아니다, 얀피르.”

“너희들 지금 술 대신 안주를 무식하게 들이붓고 있거든?!”

얀피르의 의도와는 다르게, 술자리는 점점 길어졌다.

그 귀하다는 와인 한 병만 다 비우면 순순히 놓아줄 줄 알았다.

하지만 술잔이 비기가 무섭게, 휘온은 다른 와인을 연달아 들고 왔다.

“이건 페니아에서만 나는 포도로 담근, ‘도카뉴’다. 아까 마신 것보다 산도가 높지. 그리고 이건 ‘망나르뇽’ 100년산인데…….”

“그만, 그만!”

얀피르가 온몸으로 저항했다.

“네놈들 날 음주 비행시킬 참이야?”

프리트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여기서 자고 가면 되잖아, 드래곤. 황궁엔 빈방이 아주 많다고.”

“웃기지 마. 그리고 네놈이 까먹은 내 휴가, 내일 대신 쓴다.”

“무슨 소리야? 얀피르 네놈이 오늘 여기서 일을 했어, 엉? 다 같이 술 마시고 놀았잖아!”

“회식도 업무의 연장선인 거 몰라?”

그렇게 한참을 실랑이한 끝에 얀피르는 겨우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가 다시 남작저로 날아가며 치를 떨었다.

긴급한 일이라며!

‘내가 다시는 프리트 저놈 서신을 믿나 봐라.’

***

얀피르는 마침내 평화를 되찾았다.

궁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 듣자, 산수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와인 마시자 부르신 거였다고? 정말 폐하답다.”

“그 자식, 분명 일부러 그런 거야. 주인 너하고 날 떼어놓으려고.”

“에이, 설마. 내가 보기엔 폐하께서 이제 너를 그냥 친구로 생각하시는 거 같은데?”

그러자 얀피르가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친구우? 프리트 그놈이?”

산수이가 웃으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휘온도.”

“그놈은 왜 껴!”

“뭘 아닌 척하고 그래. 셋이 이 동네 삼총사잖아.”

“삼총사?!”

“응. 다들 그렇게 부르는 거 정말 몰랐어?”

그가 끔찍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삼총사는 얼어 죽을. 거기에다 휘온 놈까지 친구라니? 주인, 설마 여기다 그 마왕 놈까지 얹을 생각은 아니겠지?”

“맞는데?”

“뭐?!”

“그렇게 네 명으로 묶어서 부르는 사람들도 많은데? 너네 맨날 넷이 모여서 목욕하잖아.”

얀피르는 경악했다.

“모이고 싶어서 모인 거 아니거든?”

“무슨 소리야, 저번에 황궁 목욕탕에서 넷이 같이 놀았다는 소리 나도 다 들었는데.”

사실이었다.

하지만 얀피르는 강하게 부정했다.

“그건 황제 놈이 기왕 야근하는 거 목욕탕에서 일하자고 해서……!”

“그리고 저번에 마계에서 회담이 열렸을 때도, 거기 왕궁 목욕탕에서 회의했다며.”

“크읏…….”

얀피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 그 넷이 모여서 함께 목욕을 즐기는 건 꽤 즐거웠으니까.

물론 산수이가 결혼한 후, 그들의 때를 밀어주는 건 전적으로 얀피르의 몫이 되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친구라니.

‘그놈들을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얼마 전까지 연적이었던 놈들이 아닌가.

하지만.

‘……뭐, 오늘 마신 와인 맛이 꽤 좋았던 것 같기도 하고.’

얀피르는 저도 모르게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이를 눈치챈 산수이가 혼자 웃었다.

‘다들 사이가 좋아 보여 다행이네.’

산수이와 얀피르는 손을 꽉 맞잡은 채, 산책을 즐기며 많은 대화를 나눴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산수이가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고는 지는 해를 말없이 바라보기 시작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얀피르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가끔 그녀가 저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그는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또 원래 살던 곳을 떠올리고 있나.’

얀피르가 자신의 재킷을 벗어 산수이에게 걸쳐주었다.

“주인.”

“응?”

“그 한국이라는 나라 생각해?”

“아니? 그런 거 아닌데.”

“괜찮으니까 나한테 말해 봐. 거기서 쓰던 것 중에 필요한 건 없냐니까? 마법으로 만들 수 있는 거라면, 내가 만들어줄게.”

산수이가 피식 웃었다.

“벌써 몇 번째 물어보는 거야. 정말 없다니까.”

“잘 생각해 봐. 물론 그 최애라는 놈만 빼고.”

잊고 있던 기억을 강제 소환시키다니.

산수이의 얼굴이 빨개졌다.

“최, 최애는 이제 생각도 안 난다니까!”

얀피르가 산수이에게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왜, 네 반려 얼굴이 더 좋아서?”

“으아악!”

당황하는 산수이를 보며 얀피르가 키득거렸다.

하지만 사실 그의 마음속은 복잡했다.

산수이가 그리워하는 것들이 뭔지 대충 짐작은 갔다.

그녀의 세계로 찾아갔을 때, 저 역시 보지 않았던가.

번쩍이는 빛을 내던 작은 상자. 이름이 스마트 뭐시기라 했는데.

말보다 빠르게 달리던 금속 마차도 있었고.

그런 것들은 제가 아니라 마왕이라 해도 구현할 수 없었다.

산수이가 얀피르를 향해 씩씩하게 웃어 보였다.

정말로 없어, 그러니까 이제 그만 물어봐.”

“하지만……!”

산수이가 그의 손을 꽉 잡았다.

“얀피르, 말했잖아. 난 너만 있으면 돼.”

결국 얀피르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닌데.

분명 그녀의 눈동자 너머로 여전히 다른 세상이 보이는데.

그녀와 함께 제국으로 돌아왔을 때, 이젠 더 이상 불안하지 않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죄책감은 계속해서 그를 괴롭혔다.

그녀를 억지로 자신의 옆에 주저앉힌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행복하게만 만들어주고 싶었는데.

산수이의 얼굴이 쓸쓸해 보일 때마다 얀피르는 어쩔 줄을 몰랐다.

그래서 계속 물어봤다. 필요한 건 없는지, 먹고 싶은 건 없는지.

어떻게든 비슷하게라도 만들어서 그녀의 앞에 가져다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산수이의 대답은 똑같았다.

“내가 필요한 건, 여기 다 있는데?”

얀피르는 제 반려를 바라보았다.

‘내가 어떻게 해야 네 마음을 채워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네가 나한테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을까?

그때, 사용인 하나가 서신을 들고 다급히 달려왔다.

“후작님!”

그 표정만 봐도 얀피르는 이제 다음 말을 예측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황제 폐하로부터의 서신입니다-!”

“하!”

얀피르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옆에 서 있던 산수이 역시 눈이 커졌다.

사용인이 얀피르에게 서신을 내밀었다.

“지, 지금 바로 입궁하라는 황제 폐하의 어명이십니다!”

하지만 얀피르는 서신을 뜯지도 않고 구겨버렸다.

“보나 마나 또 개수작이겠지. 난 안 가.”

산수이가 다그쳤다.

“그래도 읽어는 봐야지!”

“주인 너도 아까 다 들었잖아. 진짜 프리트 놈 이런 유치한 장난에 어울려 주는 것도 하루 이틀…….”

하지만 그때, 사용인이 곤란한 표정으로 서신 한 장을 더 꺼냈다.

“그, 그리고 이건 폐하께서 남작님께 보내신 서신입니다.”

“나한테도?”

산수이가 놀란 눈으로 서신을 뜯어보았다.

이제 웬만한 일로는 프리트가 자신을 부르지 않는데.

이렇게 서신까지 온 걸 보면 정말 중요한 일인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얀피르는 여전히 불만 가득한 표정이었다.

“주인 너까지 포섭해서 날 부르려나 본데, 난 절대 안 가…….”

“얀피르.”

편지를 읽던 산수이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번엔 폐하가 뻥…… 아니, 거짓말하시는 게 아닌 것 같아. 지금 당장 우리 둘 다 입궁 준비를 해야겠어.”

“왜, 무슨 일인데.”

“정말 일 년 만이네, 이렇게 다 같이 모이는 건.”

그녀가 얀피르를 돌아보았다.

“루헤가 날 찾는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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