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화.
오늘도 평화로운 대카데베르 제국.
새로 즉위한 황제, 프리트 폰 카데베르 덕에 제국은 태평성대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쉴 수 없는 이가 두 명 있었으니.
바로 제국의 유일한 공작이자, 황제의 보좌관인 휘온 에데카나와.
제국의 대장군이자, 드래곤의 마지막 후예인 얀피르 드 라첸 후작이었다.
특히 얀피르는 누구보다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일 년 전, 산수이 비덴비덴 남작과 결혼한 얀피르 후작.
그들은 서로의 작위와 성을 유지한 채, 여전히 비덴비덴 남작령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
그렇게 달콤한 나날이 시작될 거라고 믿었었다.
하지만.
프리트 황제가 내뱉은 충격적인 선포에 그만 얀피르의 운명이 바뀌어버렸다.
“휘온 네놈은 나의 오른팔, 그리고 얀피르 네놈은 내 왼팔이다!”
“황제 넌 팔이 없냐!”
그렇게 프리트는 제 최측근 두 명을 양팔에 끼고, 좋은 세상 만들기를 시전했고.
그 결과 휘온과 얀피르는 쏟아지는 업무에 영혼까지 탈탈 갈려 나가고 있었다.
프리트가 황태자였을 때 하고 다녔던 꼬락서니를 떠올려보면, 이렇게 일을 열심히 할 거라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는데.
덕분에 제국민 모두가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가운데, 오직 두 남자만 피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특히나 이제 막 신혼인 얀피르는 이를 갈았다.
‘제길, 이건 부당 계약이야! 노동법 위반이라고!’
처음엔 프리트가 저를 산수이와 떼어놓으려고 수작을 부리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그런 의심은 매번 휘온의 얼굴을 보는 순간 싹 사라졌다.
“끄으으으…… 으으으…….”
휘온은 언제나 오늘내일하고 있었으니까.
그 모습을 보면, 절대 황제가 얀피르만 괴롭히는 것 같진 않았다.
‘제기랄, 역시 그때 대장군 직책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었어.’
하지만 프리트가 자신들을 아무리 굴려대도 소용없었다.
얀피르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잠은 집에 가서 잤으니까.
날개와 다리가 꺾어지면 기어서라도 갈 기세였다.
자신의 유일한 사랑이자, 모든 것이자.
제 심장의 주인인 산수이 그녀에게로.
그래서 오늘도 얀피르는 마지막 서류를 처리하자마자 냅다 밖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프리트가 버럭 소리쳤다.
“얀피르, 너 이 자식! 어디 황제가 아직 정무를 보고 있는데 먼저 일어서는 거야!”
“작작 좀 해, 폐하 놈아. 시킨 일은 다 마무리 지었잖아!”
그러자 프리트가 근위병들을 향해 외쳤다.
“여봐라, 당장 대장군을 잡아라, 어서!”
황제의 엄포에 근위병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프리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뭘 그렇게 매번 무서워하는 거야! 저 드래곤은 사람을 해치지 못한다는 거, 이제 네놈들도 잘 알잖아!”
얀피르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게 네가 할 소리냐, 황제 놈아!”
결국 근위병들은 얀피르에게 울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워낙에 민첩한 그를 쉽게 잡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조금이라도 병사들이 가까워지려 하면, 얀피르는 그들의 몸을 아주 가볍게 짚고 뛰어넘었다.
그렇게 궁 내부에서 한동안 진풍경이 이어졌다.
“대, 대장군! 저희를 봐서라도 이제 그만 붙잡혀 주십시오!”
“서로 힘 빼지 말자, 하루 이틀도 아니고.”
“제발 부탁드립니다!”
“비켜. 나 집에 가야 해.”
저희도 집에 가고 싶단 말입니다!
……라는 말이 근위병들의 목 끝까지 차올랐다.
오늘도 얀피르를 놓치면, 당분간 퇴근은 없을 줄 알라는 프리트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이 의미 없는 싸움은 얀피르의 승리로 끝이 났다.
틈새를 놓치지 않고 빠져나간 그가 맞은편 창문을 통해 도주했다.
팟—
그는 순식간에 드래곤으로 변해 구름 속으로 유유히 사라져갔다.
“제기랄!”
프리트는 분해서 발을 굴렀다.
그때, 얀피르가 날아오른 곳에서 종이 한 장이 팔랑거리며 떨어졌다.
프리트가 씩씩거리며 종이를 주워들었다.
거기엔 아주 짧고도 명확한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휴가 신청서]
***
얀피르는 비덴비덴 남작령을 향해 빠르게 날았다.
벌써 산수이 금단현상이 오는 것만 같았다.
매일 아침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눈을 뜬 지 벌써 일 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가 목말랐다.
‘제길, 어제보다 퇴근이 1시간 늦어졌어.’
어느새 밤이 되어 하늘은 온통 새카맸다.
그가 구름을 헤집고 더 빨리 날기 시작했다.
사랑만 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는데.
매일매일 붙어있어도 그녀에 대한 애정은 점점 더 불타오르기만 하는데!
마음 같아서는 대장군이란 자리도, 후작위도 다 물러버리고 산수이의 옆에만 있고 싶었다.
그래서 이런 얘기를 산수이에게 넌지시 꺼내 보기도 했었다.
“주인, 나 대장군 자리 그만둘까 하는데.”
“응? 따로 해보고 싶은 일이라도 생긴 거야, 얀피르?”
“아니, 그냥 예전처럼 때를 밀까 했지.”
그러자 산수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 이제 세신사 인력 충분한데?”
“그럼 잠깐 쉬면서 주인 네 옆에만 붙어있을까……?”
하지만 일 중독자인 제 반려, 산수이에겐 어림없는 소리였다.
그녀가 도끼눈을 뜨고 말했다.
“얀피르, 그게 무슨 소리야? 놀고먹겠다고? 일하지 않는 자, 사랑하지도 말라는 말 못 들어봤어?”
“먹지도 말라 아니었어?!”
무엇보다 노동을 중시하는 제 반려 앞에서 회사…… 아니, 대장군 자리를 때려치우겠단 소리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렇다고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카데베르 제국의 관료들은 육아 휴직계를 낼 수가 있었으니까.
얀피르는 언제라도 독박 육아를 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산수이와 얀피르 사이에선 일 년이 지나도록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어느새 남작저에 도착한 얀피르가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는 땅에 발이 닿자마자 부리나케 달려 산수이의 집무실로 향했다.
정말이지, 너무 보고 싶어 애가 닳을 지경이었다.
그때 갑자기 얀피르의 앞으로 유모가 찻잔을 받쳐 들고 지나갔다.
‘……!’
잔에 담긴 차 냄새를 맡은 얀피르가 얼굴을 찌푸렸다.
마침 그를 발견한 유모가 다가와 인사를 올렸다.
“후작님, 다녀오셨습니까?”
“그거, 주인한테 가져가는 거야?”
“예, 그렇습니다.”
“주인이 이걸 직접 부탁했어?”
“그건 아니지만, 남작님 몸에 좋을 듯하여 제가 특별히…….”
하지만 얀피르는 그다음 말을 듣지 않고, 찻잔에 담긴 걸 제가 모조리 들이마셔 버렸다.
“후, 후작님?!”
이를 본 유모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건 여성들만 마시는 약차인데……!”
“알아, 이거 임신을 돕는 거잖아.”
“그,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얀피르는 대답 대신 자신의 코를 톡톡 건드려 보였다.
유모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걸 아시고도 대체 왜……. 후작님께서도 후사를 기다리시는 게 아니셨습니까?”
“물론 주인과 나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난다면 정말 행복하겠지. 하지만.”
얀피르가 단호하게 말했다.
“주인한테 그 문제로 부담 주는 거 싫어.”
“후작님…….”
“주인이 불임일지도 모른다는 소문 나도 알아. 난 그딴 거 상관없는데, 주인이 그걸 신경 쓸까 봐 걱정돼.”
얀피르가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와 인연이 있는 아이라면 알아서 찾아오겠지. 없다면 하늘의 뜻이니 할 수 없고.”
“그러니 두 분께 인연이 잘 찾아올 수 있도록 제가 성심껏 약차를…….”
하지만 얀피르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문제가 주인이 아닌 나한테 있는 건지도 모르잖아?”
“후, 후작님 어찌 그런 말씀을!”
“내 말은, 왜 다들 주인한테만 책임을 묻냐는 거야.”
유모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무튼 모두한테 전해. 아이 문제로 내 여자 속상하게 만들지 말라고.”
“……잘 알겠습니다, 후작님.”
그렇게 유모가 물러간 후, 얀피르는 다시 산수이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가 방문을 두드렸다.
“나 다녀왔어, 수희야.”
그러자 문이 벌컥 열리며, 산수이가 달려 나와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
“얀피르-!”
얀피르 역시 벅차오르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애틋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너무 보고 싶었어, 수희야.”
“나도 너무 보고 싶었어, 얀피르.”
“내가 더 너무너무.”
“그럼 나는 너무너무너무.”
“마지막 말은 내가 할 거야. 나는 너무너무너무너무.”
그들은 어느새 주변을 괴롭게 하는 닭살 커플이 되어있던 것이었다.
얀피르가 산수이를 더 세게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하아. 주인, 네 살냄새 정말 너무 좋아. 잠깐만 이렇게 안고 있을래.”
하지만 산수이는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밤이 늦었는데 얼른 자야지. 내일도 일찍 입궁해야 할 거 아냐.”
“괜찮아, 내일 휴가 냈으니까.”
“정말?”
산수이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럼 내일은 온종일 같이 있을 수 있는 거야?”
저를 향해 미소짓는 산수이를 보자, 얀피르의 심장이 또 요동쳤다.
“하, 주인 너 진짜. 왜 이렇게 예쁘게 웃고 그래? 뽀뽀하고 싶게.”
얀피르가 산수이의 얼굴을 붙잡고 연신 입을 맞춰댔다.
하지만 산수이가 그를 저지했다.
“자, 잠깐! 얀피르 너 설마, 오늘도 하려는 건 아니지?”
“섭섭하게 무슨 소리야, 주인? 우리가 언제 하루라도 그냥 넘긴 날이 있었어?”
그랬다.
사실 그들은 결혼식 이후 일 년 동안 거의 하루도 안 빼고…….
얼굴이 새빨개진 산수이가 다급하게 말했다.
“그, 그렇지만 너 어제도 세 시간밖에 못 잤잖아!”
그러나 산수이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었다.
얀피르의 눈은 이미 맛이 가 있었으니까.
“하아, 수희야.”
그가 머리를 쓸어넘기며 말했다.
“몇 번이나 말하는 거지만, 나한텐 이게 쉬는 거야.”
“그게 어떻게 쉬는 거…….”
하지만 얀피르가 제 얼굴을 들이밀자, 산수이는 또다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으윽.”
“물론 네가 싫다고 하면 안 해.”
“시, 싫은 건 아닌데. 그냥 얀피르 네가 힘들까 봐.”
“내 반려는 아직도 남편 체력을 잘 모르나 봐?”
그 말과 함께 산수이의 집무실 문이 쾅 하고 닫혔다.
***
다음 날 아침.
얀피르는 제 품 안에서 새근새근 잠들어있는 산수이를 바라보았다.
‘너무 행복하다.’
그렇지, 이게 사는 거지.
하루만 황궁에 안 갔는데도 이렇게나 살 것 같았다.
그는 산수이의 볼을 가만히 쓰다듬어보았다.
이것이 원래 상상하던 신혼의 아침이었다.
그 빌어먹을 황제 놈만 아니었다면, 하루하루가 이렇게 여유로운 행복으로 가득했을 텐데.
얀피르는 산수이가 깨지 않도록 조심해서 일어났다.
그녀가 일어나기 전에 싱그러운 꽃 한 다발을 꺾어올 생각이었다.
그리고 산수이가 즐겨 먹는 아침을 직접 만들어 와야지.
그녀가 눈을 뜨자마자 좋아하는 것들을 볼 수 있게 해 주고 싶었다.
오로지 저 때문에 이곳에서 평생을 살기로 결심해 준 반려가 아닌가.
그런 그녀에게 매일을 선물 같은 날로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렇게 얀피르가 조심스럽게 방을 나서려던 참이었다.
“후작님!”
갑자기 사용인 하나가 다급히 그에게 달려왔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그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럴 리가 없다. 분명 휴가계를 냈다. 대장군의 휴가는 결재도 필요 없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그의 촉이 맞았다는 걸 확인 사살시켜 주었다.
“황제 폐하께서 긴급하게 서신을 보내셨습니다!”
“이런 미친놈이-!”
휴가 중이잖아, 휴가 냈다고!
내 소중한 연차 썼다고!
게다가, 그 소리를 듣고 결국 산수이가 깨고 말았다.
그녀 역시 조금 전 들려온 말을 듣고 적잖이 실망한 눈치였다.
“……. 나랏일은 중요하니 어쩔 수 없지. 다녀와, 얀피르.”
“됐어, 안 가.”
“황명인데?”
“아무리 그래도 이건 선을 넘었다고!”
그때, 사용인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고했다.
“마, 만약 후작님께서 황궁으로 오지 않으신다면, 대신 남작님을 부르겠다 전하라 하셨습니다.”
“…….”
결국 얀피르는 울며 황궁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
황좌에 앉아있는 프리트를 보며 얀피르는 이를 갈았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프리트는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잘 왔다, 얀피르.”
“폐하 너 진짜…… 죽고 싶냐?”
“아니 근데 이 자식 말하는 것 좀 봐? 넌 군신 관계가 우스워, 어?”
“아무리 황제라도, 이건 좀 심하잖아! 나 휴가 낸 거 몰라?”
“알지, 알지. 그래도 네놈을 부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다 있다고.”
“뭐……?”
프리트가 제 옆에 서 있던 휘온에게 손짓했다.
“휘온, 그걸 가져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