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짹짹.
새 소리와 함께 잠에서 깨어난 산수이의 온몸이 마치 부서질 듯 뻐근했다.
어젯밤, 도대체 몇 번을 한 건지 셀 수가 없었다.
얀피르의 체력은 한낱 인간인 산수이가 따라가기엔 너무나 역부족이었다.
‘아, 내가 괜히 까불어서…….’
한 번 잘못 도발했다고 그렇게 지치지도 않고 해대다가.
마침내 떠오르는 아침 해까지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그게 너무…… 너무.’
언제 봐도 적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잘 잤어, 수희야?”
어느새 깨어난 얀피르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마치 그와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얀피르는 산수이의 옆에 누워서 그녀를 향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얀피르…….”
그런 그가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산수이는 얀피르를 꽉 끌어안았다.
그러자 얼굴이 발개진 얀피르가 말했다.
“주인, 우리 딱 한 번만 더 할까……?”
“안 돼.”
“어제 나 별로였어?”
“그, 그럴 리가…….”
“근데 왜 안돼?”
“여기서 더 했다간 나 결혼식장에 걸어서 못 들어갈지도 모른단 말이야!”
“난 또 뭐라고. 그럼 내가 업고 들어가면 되지.”
“동네 소문날 일 있어? 절대 안 돼-!”
“쳇…….”
“쳇은 무슨 쳇이야! 어젯밤에 그렇게 질리도록 해 놓고선!”
“질리다니, 그런 건 불가능해.”
얀피르가 산수이를 제 품에 끌어안고는 볼에 뽀뽀를 연신 퍼부었다.
“질릴 수가 없어. 나는 매일매일 주인이 부족한걸.”
그러고는 산수이의 귓가에 나지막이 경고했다.
“그럼 당분간은 봐줄 테니까…… 결혼식만 끝나면 각오해, 주인.”
산수이는 정말이지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렇게 남은 며칠간 요양 아닌 요양을 하다.
마침내 다가온 결혼식 날.
산수이의 예상대로 유모는 제가 준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끌어모아 제국 땅에 다신 없을 초호화 결혼식을 준비해 두었다.
야외 결혼식장 하늘 전체를 뒤덮은 등나무와, 길목마다 심어진 은방울꽃을 보며 산수이는 속으로 크게 탄식했다.
‘아, 꽃값. 저게 다 얼마야…….’
그때 뒤에서 유모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남작님! 신부가 여기 계시면 어떡해요!”
“저기, 유모? 제가 분명 조촐한 결혼식을 하자고 했는데…….”
“아유, 이만하면 조촐하지 뭘요!”
“아니 이게 대체 어딜 봐서 조촐한 거죠?”
저기 테이블 위에 올라가있는 케이크만 해도, 한 10단 정도는 되어 보이는걸요……?
“마음 같아서야 이 남작령 전체를 꽃으로 수놓아드리고 싶었건만, 이쯤에서 멈춘 걸 다행으로 생각하시라고요.”
“유모? 그렇게 되면 비용은요?”
그러자 유모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비용이요? 여태껏 때 밀어서 버신 돈, 쌓아두셔서 뭐 해요? 이런데 다 쓰는 거죠!”
산수이는 이제 물어보기도 겁이 났다.
그렇게 유모의 손에 이끌려 신부 대기실에서 드레스로 갈아입은 그녀.
새하얀 꽃이 피어나는 듯한 오간자 실크 드레스를 입은 산수이의 모습은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그 드레스는 바로, 이태리타월을 만들었던 우테의 작품이었다.
우테가 눈물을 글썽이며 산수이를 바라보았다.
“역시, 남작님께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본 그 어떤 신부보다도 아름다우세요.”
“우테가 예쁜 드레스를 만들어줘서 그런 거죠.”
우테는 산수이가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드레스 자락을 잡아주었다.
그때, 우테의 딸이 꽃잎 가득한 바구니를 들고 신부 대기실 안으로 들어왔다.
앙증맞은 드레스를 입은 그 꼬마 아가씨는, 산수이가 입장할 때 옆에서 꽃잎을 뿌려줄 예정이었다.
“엄마, 밖에서 집사님이 부르세요.”
“남작님,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이따 봐요, 우테.”
그렇게 우테가 자신의 딸과 함께 대기실을 나선 후.
곧이어 그 안으로 하객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맨 먼저 발레아나가 수줍은 얼굴로 말했다.
“결혼 축하해, 언니. 이건 내가 주는 선물이야!”
그녀가 내민 건, 직접 만든 부케였다.
새하얗고 앙증맞은 꽃 열 송이가 산수이의 손에서 화사하게 피어났다.
“너무 예쁘다……. 고마워, 발레아나.”
“언니, 근데 나 실은 한 가지 부탁이 있어.”
“뭔데?”
“이따가 결혼식 끝나고, 이 부케 나한테 던져주면 안 돼?”
“부케를 던…… 으응?”
발레아나가 얼굴을 수줍게 붉혔다.
“부, 부케를 받으면 첫사랑이 이뤄진다는 전설이 있길래.”
그 말을 들은 산수이의 눈에 또 한차례 지진이 일어났다.
아닌데, 그거 아닌데?
3개월 안에 결혼 못 하면 3년 동안 결혼을 못 한다 뭐 그런 내용이었던 거 같은데?
‘이, 이 세계에선 좀 다른가?’
하지만 생각해보니 이편이 더 잘된 듯싶었다.
‘그래, 우리 귀요미 아직 너무 어려. 3년 정도는 더 세상을 즐기렴, 내 귀요미. 첫사랑이랑 이뤄지지 못하면 더 좋고.’
아무리 그래도 귀요미의 짝으로 루헤는 안 된다는 그녀의 입장은 확고했다.
아무튼 산수이는 발레아나에게 꼭 부케를 던져주겠노라며 흔쾌히 약속했다.
“정말이지, 언니? 약속한 거다!”
“그래 그래. 받기 쉽게 잘 던져볼게.”
콧노래를 부르며 떠나가는 발레아나의 뒤로, 이윽고 커튼이 걷히며 휘온이 들어왔다.
“휘온!”
그가 애써 웃음 지으며 다가와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결혼을 축하합니다, 산수이.”
“고마워요, 휘온.”
하지만 겉으론 웃고 있어도, 산수이를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큼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녀에게 묻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다.
언제부터였나요, 왜 하필 얀피르인가요. 왜 나일 순 없었죠?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질문들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미 그녀는 얀피르를 반려로 선택했고, 얀피르는 제 인생을 걸고 그녀를 찾으러 차원까지 넘어갔던 것을.
그는 제 타는 속내를 들키지 않기 위해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렸다.
“크흠! 그나저나, 황제 폐하가 보이시질 않는군요?”
“폐하요?”
산수이가 말을 이었다.
“폐하는…… 하아. 주례석에 계실 거예요.”
“아, 주례…… 예에?!”
휘온이 경악하여 소리쳤다.
“프, 프리트 폐하께서 이 결혼식의 주례를 보신단 말입니까?!”
그랬다.
이 제국의 후작과 남작이 결혼하는데 황제가 주례를 보지 않으면 그 누가 보냐며.
가문의 영광인 줄 알라고 으름장을 놓았던 프리트.
그는 기어이 산수이와 얀피르의 결혼식에 주례 자격으로 참석한 것이었다.
그때였다.
검은 연기와 함께 루헤가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그가 주례라니. 하아, 결혼식 파투나 안 내면 다행이겠네요.”
사실은 산수이 역시 그 점이 매우 불안했다.
그래서, 주례를 서겠다는 프리트에게 몇 번이고 다짐을 받아냈었다.
“황제 폐하, 정말로 결혼식장에 칼을 차고 오시는 건 안 돼요. 저랑 약속하신 거예요?”
“그러다 이 제국의 황제가 습격이라도 받으면 그대가 책임질 건가?”
얀피르가 귀찮다는 듯 말했다.
“하아, 황제 놈아. 그땐 내가 막아줄 테니까 걱정 말고 그냥 맨손으로 좀 와!”
그러자 이번에는 산수이가 얀피르에게 역정을 냈다.
“얀피르, 넌 그날 나랑 결혼해야지!”
“그러게? 야, 황제. 아무래도 안 되겠다. 네 살길은 그냥 네가 도모해.”
“아니 근데 이 드래곤 자식이?”
“그래도 절대 칼은 안 돼요, 폐하. 아시겠어요?!”
그렇게 이르고 또 일러서 다행히 프리트가 칼을 차고 오진 않았지만.
이미 산수이는 황실의 근위병들이 결혼식장 앞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다는 연락을 들은 후였다.
‘아아, 나의 꿈 스몰 웨딩은 이렇게 점점 멀어져 가…….’
급격히 얼굴에 그늘이 진 산수이를 보며, 휘온이 말했다.
“폐하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산수이. 여차하면 제가 달려나가겠습니다.”
“역시, 믿을 사람은 휘온 당신뿐이에요.”
그렇게 저를 향해 환하게 웃는 산수이를 보며, 휘온이 마지막 말을 전했다.
“……항상 그대가 행복하기만을 바라겠습니다.”
그렇게 휘온은 자리를 떠났다.
이제 신부 대기실에는 루헤와 산수이 단둘만이 남아있었다.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지다, 루헤가 산수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결혼을 축하해요, 수이.”
“고마워요, 루헤.”
“태어나서 처음으로 건네는 축하의 말을, 수이에게 하게 될 줄은 몰랐네요.”
“앞으론 인간계에 사셔야 하니까, 더 많이 연습하셔야 할걸요?”
“정말이지, 인간들의 예법은 너무 귀찮다니까요.”
그가 나른하게 하품한 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럼 저는 이만.”
“와 줘서 고마워요, 루헤.”
또다시 검은 연기와 함께 사라지려던 그가, 갑자기 돌아서 산수이를 바라보았다.
“아참, 결혼 선물을 준다는 걸 깜빡했네요.”
“선물이요?”
루헤가 그녀를 향해 아름답게 미소 지었다.
“당신과 드래곤, 꽤나 오래 살 거예요.”
그것은 루헤가 처음으로 누군가를 위해 건넨 진실한 덕담이었다.
“……!”
그 말에 담긴 뜻을 깨달은 산수이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매일같이, 오늘이 그와의 마지막 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눈을 떴었는데.
가슴속에 박혀있던 응어리 하나가 탁 하고 풀려나가는 느낌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기쁨이 번져나가자, 루헤 역시도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돌아선 그가 이번엔 정말로 허공을 찢고 사라졌다.
그리고 마침내, 집사가 신부 대기실로 들어왔다.
그가 산수이에게 제 팔을 내밀며 말했다.
“자, 그럼 이제 저와 함께 신랑님을 만나러 가보실까요. 남작님?”
산수이가 집사에게 팔짱을 끼며 해사하게 웃었다.
“좋아요.”
***
마침내 산수이와 얀피르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집사의 손을 잡고 자신에게로 걸어오는 산수이를 보며, 얀피르의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그토록 기다려오던 순간이었다.
자신의 앞에 선 산수이의 손을 잡은 얀피르의 얼굴엔 다 감출 수도 없는 행복감이 서렸다.
마침내 주례석 앞에 선 그들.
하지만 곧이어 등장한 놀라운 주례의 정체에 하객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저 주례…… 황제 폐하 아니셔?!”
제국의 황제 프리트는 저를 향한 반응들엔 관심도 없다는 듯, 살벌한 분위기로 주례를 이어나갔다.
“……이에 제국 황제의 명으로 다음과 같은 부부 십계명을 정한다.”
응? 저게 무슨 소리야?
예정에 없던 주례사에 당황한 산수이와 얀피르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프리트는 아랑곳 않고 계속해서 주례사를 이어나갔다.
“우선, 만일 남편이 살다가 배우자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는, 이 제국 황제의 이름으로 참수형에 처할 것이다.”
아니 뭐라고!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남편이 부인을 두고 외도를 하다 걸릴 시 화형에 처할 것이며…….”
얀피르의 살갗에 점점 새카맣게 피어오르는 비늘을 보며 산수이는 속이 타들어 갔다.
하객석에 앉아있는 휘온 역시 수치심에 딱 죽을 맛이었다.
‘아아 폐하……! 좀 더 쿨하게 보내주실 수는 없으셨던 겁니까!’
루헤는 더 이상 듣기를 포기한 채 휘온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주례가 모두 끝난 후에 저를 깨워주세요, 공작.”
그러고는 고개를 떨구고 졸기 시작했다.
하지만 프리트의 주둥이는 여전히 멈출 줄을 몰랐다.
“그 밖에도 부인을 울리면 참형, 부인의 말을 듣지 않으면 태형, 말없이 외박을 할 시에는…….”
어떻게 된 놈의 주례가 아내의 책임에 대해선 단 한 구절도 읊지 않고 있었다.
‘이게 대체 주례야, 협박이야?’
산수이가 그르렁거리는 얀피르를 향해 조용히 속삭였다.
“얀피르, 참아. 나도 저 십계명을 똑같이 지킬 테니까.”
하지만 그가 화난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크르르…… 황제 놈 감히 날 뭘로 보는 거야.”
“응?”
“내가 주인을 두고 바람이나 피울, 그런 멍청한 놈으로 보인 거냐고!”
결국 그가 참지 못하고 주례를 향해 버럭 소리쳤다.
“그딴 십계명 없어도, 난 평생 죽을 때까지 이 여자만 사랑할 거야! 울리지도 않고, 고생시키지도 않고, 매일매일 예뻐만 해 줄 거라고!”
순간 얼어있던 장내가 눈 녹듯 녹아내리며,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와아-!”
휘파람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키스해!”
“키스해!”
그러자 프리트가 다급하게 주례사의 마지막 구절을 읊었다.
“마, 마지막으로 신랑과 신부는 영원히 서로 사랑할 것을 맹세하는가?”
얀피르와 산수이가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하루를 영원처럼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다.”
프리트가 둘을 향해 미소 지었다.
“제국 황제의 이름으로, 이들이 부부가 되었음을 선포하겠노라. 평생토록 서로 사랑하고 아끼며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겠다.”
그렇게 맹세의 키스가 이어졌다.
오랜 시간을 혼자였던 산수이와 얀피르는, 마침내 서로에게 죽음까지도 함께할 수 있는 가족이 되어주었다.
<제국의 세신사 영애님> 완결
-외전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