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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세신사 영애님-125화 (125/150)

125화.

자신과의 이별을 예정한 산수이의 말에 놀란 얀피르가 벌떡 일어났다.

“뭐?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주인?”

“말 그대로야. 인간인 나와는 다르게 드래곤인 넌 오래 살잖아? 내 짧은 수명은 너의 삶엔 찰나에 불과할 텐데. 그러니 내가 죽은 후에도 얀피르 네가 새로운 반려를 맞이할 수 있어야…….”

“진심이야, 주인?”

얀피르가 그르렁거리며 물었다.

“내가 다른 반려를 만나도, 넌 괜찮아?”

“물론 싫지! 너무 싫어. 네 옆에 나 말고 다른 누군가 서 있는 건 상상도 하기 싫어. 하지만…….”

산수이의 눈가가 젖어 들었다.

“네가 외롭게 몇백 년을 혼자 살아가는 건, 더 싫어.”

“하아.”

얀피르가 성난 얼굴로 한숨을 푹푹 내쉬며 사우나스를 향해 말했다.

“어이, 사우나스. 혹시라도 내가 다른 반려를 맞이할 수 있게 한다던가. 그런 부류의 소원 들어주기만 해봐. 나 그땐 정말 이 목욕탕뿐 아니라 남작령을 다 부숴버릴 거야.”

사우나스가 싱긋 웃으며 산수이를 바라보았다.

“어쩌죠, 사도님? 그런 소원은 안 되겠는데요.”

“하지만, 뭐든지 다 들어준다면서요!”

“물론 그럴 생각입니다. 사도님의 소원도 이미 접수된 후고요.”

“……!”

“야, 사우나스!”

당황해하는 얀피르를 뒤로한 채, 사우나스가 산수이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저에게 다른 좋은 방법이 있답니다, 사도님.”

“그게 뭔데요?”

“아무튼 간 사도님의 사후에, 그대의 반려가 외롭지 않으면 된다는 거잖아요?”

“네, 그렇죠?”

사우나스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사도님을 따라서 얀피르 님도 죽어버리면 해결되지 않을까요?”

“?!”

“?!”

얼토당토않은 소리에 놀라 자빠지려는 그들을 향해, 사우나스는 그저 호호 웃을 뿐이었다.

사우나스가 얀피르에게 물었다.

“얀피르 님? 당신의 수명을 반으로 나눠도 괜찮을까요?”

“수명을 반으로……? 너, 설마.”

사우나스가 끄덕였다.

“두 분의 남은 수명을 합쳐서, 정확히 절반으로 쪼개 다시 나눠드릴게요.”

“!”

순간 얀피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런 게 정말 가능한 거야?”

“네, 물론이죠. 본디 수명을 관장하는 것은 천족의 일. 원하시는 대로, 사도님께서 숨을 거둔 직후 얀피르 님의 숨도 바로 끊어지도록 해드릴 수 있답니다.”

섬뜩한 얘기를 너무나 해맑게 해 대는 사우나스를 보며 산수이는 할 말을 잃었지만.

얀피르는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벌떡 일어나, 사우나스의 손을 잡고 붕붕 흔들어대고 있었다.

“고마워, 사우나스! 너 알고 보니 좋은 녀석이었구나!”

보다 못한 산수이가 입을 열었다.

“얀피르 잠깐만……. 드래곤이 보통 몇 년을 사는데?”

“응? 한 천 년 정도는 거뜬하게 살지?”

“그, 그럼 넌 나 때문에 오백 년이나 일찍 죽는단 말이야? 난 오백 년이나 더 살고?!”

절대 안 돼!

산수이가 벌떡 일어나며 만류했지만.

사우나스가 제 손가락을 까딱까딱해 보이며 말했다.

“으음. 보통의 드래곤들은 천 년을 살지만, 얀피르 님의 경우는 조금 다르죠.”

“다르다니요?”

“오랜 시간 땅속에 봉인되어 계셨잖아요.”

산수이가 놀라 물었다.

“……! 설마 그게 수명이 깎인 셈 쳐진 거예요? 아니 그럼, 얀피르의 수명은 얼마나 남은 건데요?”

“그건 비밀이에요. 천기누설이라.”

사우나스가 호호호 웃었다.

“원래대로 천 년이 남았을 수도 있고, 반대로 사도님보다도 얼마 남지 않았을 수도 있죠.”

“……!”

사우나스가 돌연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그들을 향해 물었다.

“그래도, 하시겠어요?”

얀피르와 산수이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천 년을 산다던 드래곤의 수명이지만, 지금은 얼마가 남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몇백 년이 남았을 수도 있고, 반대로 내일 죽을지도 몰랐다.

인간인 산수이가 백 년을 산다고 쳐도, 지금까지 살아온 날을 빼고 절반으로 나누면.

그들에게 남은 시간은 약 40년.

어쩌면 그보다 더 짧을지도 몰랐다.

그들은 서로의 손을 꽉 마주 잡고 동시에 이렇게 말했다.

“상관없어, 할래.”

“그래도 할게요.”

“……좋아요.”

사우나스가 두 남녀를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산수이와 얀피르는 사우나스 앞에 눈을 감은 채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손에서 뻗어 나간 새하얀 빛이 그들의 몸을 감쌌다.

순간 각자의 몸 안에서 새하얀 연기가 빠져나왔다.

이내 그 연기는 허공 속에서 한데 뒤섞였다.

그러고는 정확히 절반으로 나누어져, 둘의 몸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허, 허억!”

“크윽……!”

산수이와 얀피르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서로를 바라보며 아이처럼 웃었다.

자애로운 미소로 그들을 바라보던 사우나스는 마지막 날을 남긴 채 다시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하루를 영원처럼 사랑하며 살아가길.”

***

그날 이후.

모두의 도움 아래 비덴비덴 남작령의 수도교가 재건되었다.

이에 남작령의 모든 영지민들은 다시 풍부한 지하수를 공급받으며 목욕탕 사업을 재개할 수 있었다.

산수이가 고안한 상하수도 시설은 제국 전체에도 도입되어 제국민들에게 맑은 물을 공급했다.

그 덕에 제국의 질병률이 크게 낮아졌다.

그리고 얼마 후, 마침내 카데베르 제국에서 성대한 대관식이 열렸다.

프리트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온 제국민들은 이 새로운 황제가 취임하는 모습을 감격에 젖어 바라보았다.

빛나는 황금빛 머리를 휘날리며 늠름한 자태로 황좌에 오른 그의 모습은, 백성들로 하여금 제국의 밝은 미래를 확신하게 해 주었다.

게다가, 이 젊은 황제가 처음으로 보인 행보는 이때껏 제국 역사엔 전례 없었던 획기적인 것이었다.

바로, 마계 대마왕과의 협상.

기존의 귀족 회의와는 다르게, 제국의 회의실 안에는 소수 정예인 다섯 명만이 모여 앉아있었다.

그들은 바로 제국의 황제 프리트 폰 카데베르와.

대마왕 루헤 슈바츠발트.

제국 유일의 공작 휘온 에데카나.

드래곤 종족인 얀피르 드 라첸 후작.

그리고 산수이 비덴비덴 남작이었다.

빛나는 황관을 머리에 쓴 프리트가 제 맞은편에 앉은 대마왕 루헤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어이 마왕, 그때 그 마족 전범 놈들은 확실하게 조져놓은 거 맞지?”

그러자 옆에 앉아있던 황제의 보좌관 휘온이 끔찍하단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황제 폐하, 부디 언행에 무게를 두심이…….”

“휘온 네놈은 어째 보좌관이 되고 나서 잔소리가 더 심해져?”

“잔소리하라고 이 자리에 앉히셨던 것 아니셨습니까?”

“그야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그럼 이제라도 절 잘라 주십시오, 폐하.”

휘온이 정말 간절한 눈빛으로 애원했다.

프리트 황제의 보좌관 자리를 제안받던 날.

휘온은 짐을 싸서 수도를 탈출해 제 별장에 피신해 있었다.

하지만 곧이어 프리트가 파견한 병사들에 의해 꼼짝없이 잡혀 와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딜 도망가려는 거야, 휘온? 정말 죽고 싶어?”

“차라리 죽여주십시오, 폐하. 난데없이 보좌관이라니요!”

“황제가 내린 은혜를 영광스럽게 받아들일 줄도 모르고, 정말 실망이야.”

“감히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실망시킨 죄, 파면으로 달게 받겠습니다.”

“네 자리를 대신할 놈을 데려다 앉혀놔, 그럼. 그 전까진 꿈도 꾸지 말고.”

“얀피르 후작은 어떻습니까, 폐하?”

“그건 안 돼. 그놈한테는 다른 일을 맡길 생각이니까.”

그렇게 제국의 대장군 자리를 맡게 된 얀피르.

그 역시 프리트 황제로부터 명예로운 직책을 하사받고는 너무나 기뻐서 길길이 날뛰었다.

“대장군? 웃기지 마!”

“도대체가, 네놈들은 황제의 말이 우습냐? 어?”

“대장군 그거 맡으면 궁에 자주 출입해야 하잖아.”

“그야 당연하지.”

“난 싫어. 그냥 집에서 매일 주인하고 뒹굴고 있을 거야.”

“아니 근데 드래곤 이 자식이?!”

“아무튼 용건 끝났지? 그럼 난 간…….”

“얀피르 네놈이 정 그렇게 나온다면야 하는 수 없지. 산수이 남작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기는 수밖에.”

“……!”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 직책을 떠맡게 되면 하루걸러 궁에 출입해야 될 텐데 말이야.”

“야 황제 이 자식아!”

그렇게 울며 겨자 먹기로 궁에 끌려온 휘온과 얀피르.

그들은 이제 새로운 황제 프리트의 최측근이 되어, 이 역사적인 마계와의 오자회담에서 중추 역할을 맡고 있었다.

루헤가 크게 하품하며 말했다.

“마족들이 다시는 전쟁 따위를 일으키지 못하도록 잘 타일러 뒀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인간의 황제.”

“정말 잘 타이른 거 맞아? 다리 하나 정도 부러뜨려 놓은 게 아니고?”

루헤는 대답 대신 예쁘게 싱긋 웃었다.

프리트가 다 알 것 같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마왕 네놈과 약속했던 인간계의 영토는 페니아 왕국으로 결정했으니, 마족들과 함께 그쪽으로 이주하도록 해.”

“!”

그 말에 모두가 놀라 프리트를 바라보았다.

휘온이 다급히 말했다.

“아니, 폐하? 이렇게 중요한 일을 저와 상의도 없이 결정하실 거라면, 대체 보좌관 자리엔 왜 앉히신 겁니까?”

“페니아 거긴 원래 우리 영토도 아니었잖아. 그거 하나 없어져도 먹고사는 데 지장 없어, 휘온.”

“하지만……!”

“아, 그러고 보니 페니아를 받는 대신 나와 한가지 약속할 게 있다, 마왕.”

루헤를 향해 갑자기 진지하고도 근엄한 표정을 짓는 프리트를 보며, 휘온은 속으로 안도했다.

‘역시 폐하. 다 생각이 있으셨던 거군요. 페니아를 내어주는 대신 다른 이득을 취하시려는…….’

하지만 프리트의 입에서 나온 말은 휘온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 땅에서 나는 바나나들은 평생토록 제국에 무상 공급하도록 해.”

“아니, 폐하!”

그러자 여태껏 가만히 참고 있던 산수이가 테이블을 탕 치며 일어섰다.

“정말 고작 바나나 하나로 퉁치시려는 거예요, 예?”

“고작 바나나 하나라니? 그게 없으면 바나나우유를 만들지 못하잖아. 남작 그대의 사업에도 도움 되는 얘기일 텐데 왜 이래?”

“페니아의 영토에 다른 중요한 게 얼마나 많은데……!”

“좋아요.”

루헤가 배시시 웃으며 서둘러 말을 얹었다.

“바나나우유는 저 역시도 포기할 수 없으니까요.”

“그럼 협의가 끝난 거로 알겠다, 마왕.”

그렇게 벌떡 일어나 악수를 하는 두 남자를 보며 산수이와 휘온은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저기요? 루헤? 폐하?”

“아아…….”

오직 얀피르만이 아무래도 좋다는 표정으로, 헤실헤실 웃으며 산수이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러.

어느덧 산수이와 얀피르의 결혼식이 다가왔다.

***

“남작님! 인생에 한 번뿐인 결혼식인데, 그 드레스를 입으신다는 게 말이 됩니까?”

산수이가 입고 있는 검은색의 드래곤 비늘 드레스를 보며, 유모가 경악해 소리쳤다.

“이 드레스가 뭐가 어때서요, 얀피르가 직접 만들어 준 건데!”

“정성도 좋지만, 이건 결혼식이잖아요! 세상 어떤 신부가 결혼식 날 검은 드레스를 입는답니까? 장례식 가세요? 네?”

그렇게 산수이와 유모가 한참을 실랑이하고 있을 때.

얀피르가 그녀의 방문을 노크했다.

똑똑-

“내 이럴 줄 알았어, 주인.”

얀피르가 한숨을 내쉬며 들어왔다.

“유모 말 들어.”

“하지만! 반려가 되기로 맹세하는 날인데 역시 이 드레스를 입어야……!”

“그 드레스는.”

얀피르가 산수이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첫날밤에…… 입어 주면 되잖아.”

“!”

산수이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크, 흠흠.”

대충 무슨 분위기인지 눈치챈 유모가 서둘러 자리를 피해주었다.

얀피르가 산수이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알겠지? 그러니까 결혼식엔, 인간들의 관습대로 새하얀 드레스를 입어도 된…….”

갑자기 산수이가 얀피르를 향해 눈을 빛냈다.

“그럼, 기왕 이거 입고 있는 김에 오늘을 첫날밤으로 하면 되겠네.”

“어……?”

“그동안 얀피르 너만 오래 참은 거 아냐.”

산수이가 얀피르를 가볍게 툭 밀어서 제 침대 위로 눕혀버렸다.

“나도 많이 참았어.”

“주, 주인?!”

갑작스럽게 진행되는 이 예상치 못한 전개에 얀피르의 모든 사고가 정지해버렸다.

“자, 잠깐 주인? 이, 이렇게 갑자기 해도 정말 괜찮겠어?”

“무슨 상관이야. 사우나스 님한테 소원도 다 빌었는데. ”

얀피르의 셔츠를 확 뜯어버린 산수이가 그의 귓가에 달콤하게 속삭였다.

“우리 이제, 언제 죽을지 모르잖아. 그러니까 뭐든 나중으로 미루고 싶지 않아졌어.”

“……주인 너 진짜 후회 안 하지?”

얀피르가 몸을 휙 돌려, 제 팔 아래 산수이를 가뒀다.

“나 이번엔 정말 안 멈출 거야.”

“응, 멈추지 마.”

“너 진짜……!”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얀피르가 산수이에게 입을 맞췄다.

짙은 키스가 길게 이어졌다.

산수이가 얀피르의 머리칼을 사랑스럽게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사랑해. 정말로 사랑해, 얀피르.”

“나도 사랑해…… 수희야.”

그렇게 둘의 끝나지 않을 밤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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