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얀피르와 안수희는 정신없이 하나로 엉킨 채 그녀의 자취방으로 들어왔다.
쾅-!
거칠게 닫히는 문 너머로 둘의 몸이 벽에 밀착되었다.
그 바람에 그녀가 여태 어깨에 걸치고 있던 얀피르의 코트가 바닥에 툭 하고 떨어졌다.
“하아……!”
이윽고 수희의 재킷을 벗겨낸 얀피르가 그녀를 소중하게 안아 들고 침대에 눕혔다.
“야, 얀피르……!”
그의 품에 안긴 수희가 몸을 파르르 떨었다.
잔뜩 긴장한 그녀의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얀피르가 떨고 있는 그녀의 손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무서워하지 마, 주인. 나 안 아프게 잘할 수 있어.”
얀피르는 제 터틀넥 스웨터를 훌러덩 벗어 바닥으로 던져버렸다.
그리고 그녀에게 입을 맞추려던 순간.
“……?”
그는 보고 말았다.
안수희의 방 안 가득한…… 최애의 사진을.
“?!”
얀피르는 그대로 정지했다.
“이게 대체 다 뭐…….”
제 반려의 방 안에 가득한 다른 남자의 초상화라니.
게다가.
그것은 누가 봐도 딱 그녀의 취향인, 웬 분홍 머리의 잘생긴 놈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지금 제 아래 누워있는 수희의 시야를 따라가 보니.
천장에도 그놈의 초상화가 붙어있었다.
심지어 훌륭한 반라를 그대로 드러낸 모습이었다.
아무리 못해도, 그녀는 잠들기 전 저 초상화를 아마 골백번은 더 보며 잠들었으리라.
얀피르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당황한 안수희가 몸을 일으켜 이 사태에 대해 해명하기 시작했다.
“얀피르, 저, 저게 다 뭐냐면!”
얀피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주인.”
그가 제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이미 반려가 있었던 거야?”
“뭐?”
“아니지, 인간들 사이에서는 뭐라 하더라……. 그러니까 남편이 있었어? 주인, 이 세계에선 이미 결혼했었어?!”
울먹이며 외치는 얀피르의 말에 그녀의 머리가 멍해졌다.
졸지에 최애의 아내가 되었다.
‘하, 하하…… 나름 성덕이네.’
하지만 제 앞에서 반쯤 헐벗은 채 나라 잃은 표정으로 울먹이고 있는 얀피르를 보자, 어서 빨리 이 오해를 수습해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오, 오해야, 얀피르. 그러니까 저건 내 남편이 아니고! 최애라고, 최애!”
그러자 얀피르가 주먹을 불끈 쥐며 물었다.
“저 자식 이름이 최애야?”
“으아니!”
“하나만 묻자, 주인.”
“어, 뭐든 물어 봐! 완전 많이 물어봐도 돼!”
“나…… 설마 주인한테 세컨드였어?”
아아악!
대체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지?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부터 비롯된 한국의 유구한 케이팝 문화에 관해 설명해야 하는 건가?
아니 그보다, 외간 남자 사진을 벽에 떡하니 붙여 놓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이곳의 대중문화 덕질에 대해 먼저 설명해야 하는 걸까?
그렇게 한동안 얀피르의 오해를 풀기 위한 기나긴 설명의 시간이 이어졌다.
한동안의 침묵이 흐르다 얀피르가 입을 열었다.
“……주인 말대로 지금 당장 여길 떠나 제국으로 돌아가는 게 낫겠어.”
“아까는 여기서 살아도 좋다며?”
“그건 저 최애라는 놈 초상화를 보기 전의 얘기고!”
얀피르가 그르렁대며 말했다.
“내 반려가, 다른 놈 초상화를 벽에 붙여 놓는 꼴은 도저히 못 보겠거든. 제국에 돌아가서도 꿈도 꾸지 마, 주인.”
‘하고 싶어도 못 해. 브로마이드를 어디서 구하니.’라고 속으로만 생각하는 그녀였지만.
사실 이젠 그럴 필요가 없지.
안수희가 얀피르의 이마에 제 이마를 콩 갖다 대며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 얀피르. 이제 내 눈엔 최애가 오징어로밖에는 안 보이니까.”
“오징어……?”
“얀피르 네가 더 잘생겨서, 최애한텐 더 이상 관심도 없다는 소리야.”
“……진짜?”
“어. 너도 알잖아, 네 얼굴 내 취향인 거.”
“그럼 내가 매일 얼굴 보여줄 테니까, 평생 내 옆에 있어. 나만 사랑해 줘, 주인.”
“그야 당연하지.”
안수희가 얀피르의 입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평생 네 옆에서 너만 사랑할게, 얀피르. 나랑 같이 제국으로 돌아가서 행복하게 살자.”
그 말과 동시에 얀피르는 다시 그녀에게 입을 맞췄고, 둘은 그대로 침대 위로 포개졌…….
……는데.
갑자기 눈앞을 밝게 물들이는 새하얀 빛과 함께.
안수희와 얀피르는 순식간에 제국 땅으로 소환되었다.
***
비덴비덴 남작저.
졸지에 주인 둘을 모두 잃게 된 남작가의 사용인들은 큰 슬픔에 빠져있었다.
얀피르 후작이 산수이를 찾으러 어디 먼 곳으로 떠났다는 말을 전해 들은 지도 벌써 며칠.
하지만 그에게선 여전히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오늘도 유모와 집사는 텅 비어버린 산수이의 방을 바라보며 눈물을 훔쳤다.
“얀피르 경, 분명 남작님과 함께 돌아오실 거예요. 그렇죠?”
하지만 집사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대관절 얀피르가 산수이를 찾으러 어디로 간 건지도 알 수 없었지만.
최악의 경우 그마저도 돌아올 수 없을 거란 이야기를 세 남자에게서 이미 들은 바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말없이 유모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그때였다.
파아앗—
갑자기 하늘에서부터 새하얀 빛이 내려왔다.
“?!”
곧이어 그 빛은 두 사람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토록 기다리던, 산수이와 얀피르였다.
하지만 반가움도 잠시.
그들의 모습을 본 유모와 집사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산수이가 반라 상태의 얀피르와 함께 침대 위에 포개져 있었으니까.
“나, 남작님…… 후작님?!”
그들과 눈이 마주친 산수이 역시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지, 집사…… 랑 유모?!”
얀피르가 낮게 탄식했다.
“이런, 결국 들켜버렸네.”
유모가 소리쳤다.
“꺄아아악-!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아니 그보다 두 분 언제부터 그런 사이가 되신 거죠?!”
그렇게 남작저가 떠내려가라 질러대는 유모의 행복한 비명 소리와 함께.
산수이와 얀피르의 비밀 연애는 영원히 막을 내렸다.
***
“쿡쿡쿡…….”
남작저의 정원에서 산수이와 얀피르의 앞에 현신한 사우나스가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맞은편에 앉은 산수이가 사우나스를 향해 불만스러운 듯 물었다.
“사우나스 님, 일부러 그러신 거 정말 아니에요?”
“어머, 제가 뭘요? 제국으로 다시 돌아오고 싶다고 말씀하신 건 우리 사도님이셨잖아요?”
그랬다.
그녀를 다시 데려오는 조건은, 바로 그녀의 입에서 직접 ‘제국에서 살아가겠다’는 말이 나오게 하는 것이었다.
뒤에선 언제나와 같이 악공과 화동들이 연신 노래를 연주하며 꽃가루를 뿌리고 있었다.
딴따란~
그걸 본 산수이는 당황했다.
‘저건 또 뭐야……?’
사실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하는데 좀 오래 걸렸다.
자신의 눈앞에 앉아 있는, 그렇게나 오매불망 기다리고 기다렸던 사우나스라는 목욕의 신은.
바로 산수이 비덴비덴 남작 영애, 본인이었다.
그녀의 시선을 느낀 듯, 사우나스가 산수이를 향해 싱긋 웃었다.
결국, 이 모든 일의 시작이 산수이 비덴비덴 그녀였다.
‘얼마나 이 남작령을 사랑했으면, 목욕의 신으로 다시 태어나면서까지 이곳을 잊지 못했을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어떻게 그토록 흔쾌히 자신의 비어있는 몸을 생전 안면이 없던 나에게 내어줄 수 있었을까?
산수이가 사우나스를 향해 물었다.
“사우나스 님은, 제가 당신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게 불편하지 않으세요?”
“음? 그것은 제 몸이 아닌데요.”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한 사우나스가 웃으며 답했다.
“산수이 비덴비덴으로서의 삶은 이미 지난 과거의 것. 그러니 그 육신은 이제 제 것이 아닌, 당신의 것이랍니다.”
‘성인군자다.’
역시 저래 보여도 신은 신인가.
하지만 그래도 사우나스에게 할 말은 하고 넘어가야 했다.
그 결심을 한 산수이의 표정이 아까와는 싹 다르게 변했다.
“하지만, 임무 완수의 조건이 전쟁을 막는 거였다는 건 진작 말해주셨어야죠!”
난 그것도 모르고, 어? 때수건도 만들고, 찜질방도 만들고 노천탕에 수도교까지……!
그간의 삽질들이 떠오르며 산수이가 분노에 찬 표정으로 사우나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사우나스는 해맑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으음? 하지만 사도님도 일하면서 즐거웠잖아요?”
아니 저 신 놈이?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즐거웠다.
자신의 목욕탕이 생기고, 그곳이 발전되어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게.
원래의 세계에서도 목욕탕을 경영하는 것은, 평생을 꿈꾸던 소원이었으니까.
사우나스가 덧붙였다.
“게다가 추가 근무하면서 힘드시지 않도록, 제 나름대로 열심히 사도님을 도와드렸다고요?”
“대체 언제요?!”
사우나스가 그녀를 향해 싱긋 미소 지었다.
“사도님께서는 이태리타월의 원재료가, 정말로 우연히 남작령에 존재했다고 생각하셨나요?”
“서, 설마……!”
사우나스가 호호 웃으며 덧붙였다.
“나중엔 제가 미역 맛이 나는 해초도 선물로 함께 보내드렸었죠, 아마.”
그럼 그 모든 것들이.
‘이태리타월의 원재료인 우테실을 만들 수 있도록 벌레를 보내주신 게, 다름 아닌 사우나스 님이었어……!’
그게 없었다면, 그 모든 일들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산수이는 아까의 섭섭함도 잠시 잊은 채 사우나스를 바라봤다.
그때 얀피르가 불만스러운 듯 테이블을 탕 치며 외쳤다.
“이봐, 사우나스. 어디서 그렇게 홀라당 넘어가려고 해? 그렇다 해도 전쟁에 대해선 미리 귀띔이라도 해 줬어야지!”
“하지만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사우나스가 크게 하품했다.
“그 루헤라는 새로운 대마왕님 덕분에 전쟁이 언제 일어날지 알 수 없었는걸요.”
그 말에 정신을 퍼뜩 차린 산수이가 물었다.
“그럼 전쟁이 영원히 일어나지 않았다면, 대체 저를 어찌할 생각이셨는데요, 사우나스 님?”
“으음…… 그건.”
사우나스가 해맑게 웃었다.
“그때 가서 생각해도 괜찮지 않았을까요? 헤헷.”
산수이는 진심으로 ‘야-!’ 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 마음을 읽었는지, 사우나스가 다급히 말을 이었다.
“하, 하지만 이제 정말로 사도님의 소원을 들어드릴 거니까요.”
“정말이죠? 이번엔 접때처럼 묻지도 않고 마음대로 해버리시면 안 됩니다?!”
“알겠어요. 이번엔 저엉말 열과 성의를 다해서 들을게요.”
사우나스가 그녀에게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자, 그래서 당신의 진짜 소원은 무엇인가요. 나의 사도여?”
“네, 제 소원은.”
산수이는 제 곁의 얀피르를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주인……?”
그 눈빛에서 얀피르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산수이가 사우나스를 향해 제 소원을 말해버렸다.
“제 소원은, 훗날 제가 죽고 난 후에도 얀피르가 혼자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