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서울로 돌아온 안수희에겐 매일매일 똑같은 나날이 계속되었다.
목욕탕에 가서 손님들의 때를 밀고, 집에 돌아와서 혼자 저녁을 먹고.
늦은 공부를 하고, 잠이 들고.
이제 꽤 이름 날리는 세신사가 된 터라, 그녀의 통장 잔고는 두둑했다.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원래 목표하던 대학 등록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가슴은 항상 텅 비어있었다.
그날의 기억들은 이제 아스라이 멀어져 더 이상 잡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것만 같았다.
그때를, 그리고 그를 떠올리면 마음 한구석이 뻥 뚫린 것처럼 시리고 허전해서, 그냥 생각하기를 멈췄다.
생각하지 않아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얀피르…… 얀……!”
매일 같은 꿈을 꾸며, 식은땀에 젖어 잠에서 깨어나는 날이 반복되었다.
첫사랑의 열병이라 치부하기엔 너무나 아팠다.
평생을 걸쳐도 극복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목에 걸려있는 그의 마지막 흔적이 없었다면, 아마 그대로 미쳐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언제나와 똑같은 또 하루의 저녁이었다.
빠앙—
퇴근길.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사이로, 안수희는 늘 그랬듯 혼자 걸어가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거리엔 캐롤이 흐르고, 옆에선 구세군 냄비의 종소리가 들려왔다.
반짝이는 조명과 온갖 장식들은 혼자 걷고 있는 그녀의 마음을 더욱더 외롭게 했다.
모두가 연인의, 가족의 손을 잡고 걷고 있는 길 위에서 오직 그녀만이 철저히 혼자였다.
그때였다.
인파 사이에서 어렴풋이 그리운 얼굴이 보인 듯했다.
‘설마 그럴 리가.’
잘못 본 것이 틀림없었다.
그날 이후, 몇 번이나 비슷한 사람을 보고 혼자 착각에 빠졌었으니까.
게다가 얀피르가 저런 옷을 입고 이곳에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블랙 코트를 입은 얀피르라니, 한번 보고 싶긴 하네. 얼마나 멋있을까?’
안수희는 혼자서 쓸쓸하게 미소 지었다.
그렇게 고개를 내리깐 채, 서둘러 그를 지나쳐 길을 지날 때였다.
“주인.”
갑자기 그녀의 뒤에서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때 한 번 더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희야.”
그녀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거리에 가득 찬 인파들 사이에서도 그의 얼굴만은 또렷이 제 눈에 들어왔다.
“얀…… 피르?”
저 멀리 그토록 그리워하던 그의 황금색 눈동자가 보였다.
자신을 향해 양팔을 벌리고 서 있는 저 남자는.
틀림없는 자신의 반려, 얀피르였다.
“얀피르!”
안수희는 그대로 그의 품으로 달려갔다.
얀피르는 마침내 제게로 온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어, 수희야.”
“나도 너무…… 너무 보고 싶었어, 얀피르……!”
안수희는 얀피르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한참을 흐느꼈다.
얀피르가 손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울지 마.”
그렇게 둘은 한동안 서로를 끌어안고 서 있었다.
그들의 머리 위로 새하얀 첫눈이 내렸다.
***
얀피르의 커다란 손을 잡고 걸으며, 안수희는 그를 슬쩍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
얀피르에게서 느껴지던 묘한 위화감의 정체는 바로 그가 입고 있는 옷에 있었다.
블랙 코트에 짙은 색의 터틀넥 스웨터, 청바지에 스니커즈를 신은 그의 완벽한 남친룩을 보자, 안수희의 가슴이 오랜만에 세차게 뛰었다.
현대 옷을 입은 얀피르라니!
그녀는 지금 당장 길 한복판에서 춤이라도 추고 싶은 지경이었다.
‘내가 이걸 보려고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왔던 건 아닐까?’
반면 얀피르는 그녀의 반응을 보며 멋쩍은 듯 물었다.
“왜, 이상해?”
“아, 아니! 너무 멋있어! 최고야!”
안수희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다행이네. 아까부터 자꾸 다들 나만 쳐다보길래. 입고 있는 것 때문에 그런가 하고 대충 저기 있는 걸 그대로 따라 해 본 거거든.”
얀피르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 끝 전광판엔 한 남자 모델이 얀피르와 똑같은 옷을 입고 서 있었다.
‘……모델이 얀피르한테 발리는데?’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니, 여전히 지나가는 행인들이 얀피르를 흘끔흘끔 쳐다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저러는 건 옷 때문이 아니야, 얀피르. 바로 네 얼굴 때문이라고!’
굳이 세상의 중심에서 ‘우리 애 잘생긴 것 좀 보세요!’라고 외치지 않아도, 이미 다들 그 사실을 알아주고 있었다.
얀피르를 바라보던 안수희의 입가가 저도 모르게 위로 씰룩이며 치솟았다.
‘아아, 일단 정신, 정신을 차리자.’
그렇게 마음을 가다듬고 그녀가 얀피르에게 물었다.
“그런데 얀피르, 날 어떻게 알아본 거야?”
“응? 내가 주인을 왜 못 알아봐?”
그녀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내 진짜 얼굴은…… 처음 보잖아.”
“얼굴이 달라졌다고, 내가 널 못 찾을까 봐?”
얀피르가 멈춰 서서 그녀의 뺨을 손바닥으로 감싸며 말했다.
“주인 네 눈빛도, 분위기나 걸음걸이도, 그리고 네 향기까지 다 이렇게 그대론데. 이걸 못 알아보는 게 더 이상하다.”
아 그렇다, 얘 짐승이었지.
곧바로 납득하는 그녀였다.
하지만 그의 말에 가슴이 미친 듯 두근거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수희가 멋쩍어하며 말했다.
“난 또, 이 목걸이를 보고 알아봤나 했지. 사실 혹시라도 널 만나게 될까 봐 항상 이렇게 차고 다녔었거든.”
그녀가 얀피르를 향해 활짝 웃으며 덧붙였다.
“네가 한눈에 날 알아볼 수 있도록 말이야.”
그러자 갑자기 얀피르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
“어 음…… 물론 그 목걸이도 주인 널 찾는 데 도움이 되었긴 한데.”
“응?”
안수희가 자신의 눈을 피하는 얀피르를 붙잡았다.
“얀피르 너 근데 왜 내 눈을 피해?”
“그게 사실…….”
그렇게 얀피르에게서 예상치 못한 고해성사를 듣게 된 안수희.
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그의 등을 거세게 때리기 시작했다.
“뭐……? 이거 위치 추적기였어?! 이 변태가 진짜!”
“아야, 위치 추적기라니! 그건 그냥 내 몸의 일부라 어쩔 수 없……!”
“뭐 눈빛? 향기로 나를 알아봐? 깜빡 속을 뻔했네!”
“그건 진짜야! 목걸이의 기운만으론 대강의 위치밖에 알 수 없…… 아야!”
“하여간 이 요망한 짐승아!”
얀피르는 그녀를 덥석 안아버렸다.
그의 품에 갇혀 꼼짝 못 하게 된 안수희가 버둥거렸다.
“이거 놔!”
“내가 널 어떻게 찾았는데! 절대 못 놔.”
그가 제 턱을 안수희의 머리 위에 가볍게 올리며 중얼거렸다.
“그깟 목걸이 따위 없어도 그만이야. 설령 네가 다시 태어난다 해도 나는 너를 찾아낼 거니까.”
그가 안수희와 눈을 마주쳤다.
“말했잖아. 내 심장, 너한테 묶였다고. 네 영혼이 존재하는 한, 나는 어디서든 널 찾아낼 수 있어.”
그렇게 말하며 얀피르가 제 코트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야……! 이거 벗어주면 넌 어떡하고.”
스웨터를 입은 그의 넓은 어깨 위로 첫눈이 소복하게 쌓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끄떡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난 하나도 안 추운데? 얼른 집에 가자, 주인. 이러다 너 감기 걸리겠어.”
“집……?”
안수희가 외쳤다.
“너 우리 집 가게?!”
지금 어딜 가겠다고?!
당황하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얀피르가 답했다.
“응. 그럼 내가 주인이 사는 집으로 가야지, 어딜 가?”
“너 나 데리러 온 거 아니었어? 사우나스 님이 보내서?”
“응? 아닌데?”
얀피르가 말을 이었다.
“내가 그랬잖아. 난 주인이 어디로 가든 따라갈 거라고. 아, 소원이나 얼른 하나 빌어. 사우나스가 그거 들어준대.”
그렇게 이어진 얀피르의 설명을 들은 안수희는 정말이지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비덴탕을 폭파하겠다고 사우나스를 협박해서 여기로 넘어온 거라고?!
그녀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쥐어 잡고 물었다.
“그래. 네 말대로 난 원래 세계로 돌아오는 것 말고 다른 소원을 빌려고 했어. 그러니까 지금 나랑 같이 돌아가면 되잖아!”
“하지만.”
얀피르가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주인은 지금의 이 세계에 살고 싶은 거 아냐?”
얀피르가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루만 돌아다녀 봐도 알겠더라. 여기, 주인이 살던 이 세상은 카데베르 제국과는 완전히 다른 곳이란 걸.”
그가 시선을 던진 곳엔 서울의 야경이 마치 별들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하늘에는 별이 없지만 대신 지상에 별이 떠 있는 신기한 곳.
하루 동안 얀피르가 만난 수많은 인간은 저마다 스스로 빛을 내뿜는 작은 상자를 들고 있었고.
그 기계 하나만으로도 세상 모든 일이 가능해 보였다.
그런 고도의 문명 속에서 살아온 안수희가, 정말 자신 하나 때문에 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걸까.
얀피르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의문이 들었다.
“나 때문에 희생할 필요 없어, 주인. 난 너만 옆에 있으면 돼. 어디서 살아도 상관없어.”
“이 바보야. 드래곤인 네가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살려고 그래. 저기 고층 건물들 보여? 제국에서처럼 날아다녔다간 저기 부딪혀 죽을지도 몰라. 아니, 그 전에 잡혀…….”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얀피르가 그녀에게 입을 맞춰왔으니까.
그렇게, 가로등 불 아래서 한동안 짙은 키스가 이어졌다.
마침내 그녀에게서 입을 뗀 얀피르가 말했다.
“상관없어. 영원히 본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한대도, 다시는 하늘을 날 수 없다고 해도. 너 없이 사는 것보단 나으니까.”
이 바보가 진짜.
붉어진 얼굴로 얀피르를 바라보던 그녀가 말했다.
“사람 말을 좀 끝까지 들어. 내 소원은, 제국으로 돌아가야만 빌 수 있는 그런 거란 말이야!”
“……!”
얀피르가 큰 눈을 끔뻑거렸다.
“뭐야, 그런 거였어?”
“내가 아까부터 계속 말했잖아!”
산수이가 그에게 손을 척 내밀며 말했다.
“자! 이제 어떻게 하면 돼? 무슨 주문이라도 외워야 하나? 사우나스 님 이름 부르면 돼?”
“아니, 주인.”
얀피르가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어차피 갈 거, 좀 천천히 가도 상관없잖아……?”
“지금 그게 무슨 소리…….”
“일단 주인 집으로 가자니까.”
얀피르가 풀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 진짜 더는 참기 힘들단 말이…… 아야.”
안수희가 그의 등짝을 호되게 때렸다.
“하여간 머릿속에 그 생각뿐이지!”
얀피르가 그르렁거렸다.
“아, 그럼 어떡해! 예뻐 죽겠는데!”
그 말을 들은 안수희의 얼굴이 빨개졌다.
“크, 흠흠. 내, 내가 예뻐?”
“그래! 아주 예뻐서 돌아버리겠는데! 왜! 왜 또 못 하게 해!”
왈왈왈-!
컹컹컹-!
얀피르의 고성에 동네 개들이 짖기 시작했다.
안수희는 가까스로 그의 입을 제 손으로 틀어막았다.
“야! 이러다 동네 사람들 다 깨겠어!”
“그러니까. 나 조용히 시키고 싶으면 지금 당장 집으로 데려가 줘, 빨리.”
어느새 풀려버린 얀피르의 눈은 짙은 욕망에 흠뻑 젖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