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사우나스의 응답을 기다리던 안수희의 뒤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녀의 이름을 부른 건, 다름 아닌 목욕탕 주인아줌마였다.
“수희야? 너 여태 퇴근 안 하고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아…… 언니였군요.”
“아직도 불이 켜져 있어서 깜짝 놀랐네. 무리하지 말고 얼른 퇴근해.”
“네.”
주인아줌마가 떠난 후에도 안수희는 한참 동안 그곳에 남아 사우나스를 기다렸다.
하지만 목욕의 신에게선 어떠한 응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녀는 거울 속에 비친 제 얼굴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여전히 안수희의 모습이 비쳤다.
정말로 이곳 대한민국에 돌아온 것이다.
결국 안수희는 혼자서 서울의 밤거리로 나섰다.
황량한 겨울 저녁, 수많은 사람이 저마다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인파 속에서도 자신이 그리워하는 그 얼굴은 보이질 않았다.
아직도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이젠 무엇이 현실인지조차 헷갈릴 정도였다.
자신의 목에 걸려있던 드래곤의 비늘 목걸이가 아니었다면, 그와 보낸 시간들 역시 꿈은 아니었을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날 이후, 안수희는 끊임없이 사우나스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불렀다.
다시 한 번 그가 있는 세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그저 속절없이 시간만 흘렀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후.
결국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안수희의 일상을 다시금 살아가기 시작했다.
***
한편, 비덴비덴 남작저에서 산수이의 묘비까지 확인한 네 남자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이게 다 뭐…….”
산수이가 사라진 직후, 그들이 뭐라 따져 물을 겨를도 없었다.
사우나스는 다시 빛의 줄기를 따라 빠르게 사라졌으니까.
“그럼 소원을 이뤄드렸으니, 전 이만!”
호호호-라는 해맑은 웃음만을 남긴 채 말이다.
그렇게 허망하게 산수이의 묘비를 바라보던 세 남자가 얀피르를 심문하기 시작했다.
“드래곤 네놈은 언제부터 산수이 남작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었던 거지?”
“산수이가 돌아간 원래의 세계라는 곳은 대체 어딘데!”
“……수이를 다시 이곳으로 데려올 방법은요?”
하지만 얀피르 역시 그들에게 아무것도 대답해줄 수 없었다.
제국이 아닌, 차원이 다른 세계.
그곳이 어디인지, 자신도 아는 바가 없었으니까.
그때 휘온이 무언가 떠올린 듯 세 남자를 향해 말했다.
“잠깐…… 아까 사우나스 님이 소원이라는 말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얀피르가 벌떡 일어났다.
“그래, 맞아. 주인은 분명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 말고, 다른 소원을 빌고 싶다 했었다고!”
프리트가 다급히 물었다.
“대체 무슨 소원이지?”
“그건 나도…… 몰라.”
“뭐!”
프리트가 얀피르의 멱살을 잡고 쥐흔들었다.
“야 드래곤! 네놈은 대체 아는 게 뭐야!”
“나도 몇 번이고 물어봤지만, 사우나스를 만나기 전까진 말해주지 않겠다 하는데 어떡해!”
하아.
그 소원이 뭔지라도 알면, 그녀를 다시 찾아올 방법에 관해 연구라도 해 볼 텐데.
그때, 지금껏 잠자코 있던 루헤가 입을 열었다.
“일단, 사우나스를 다시 이리로 부르죠.”
휘온이 물었다.
“천상계로 가는 방법도 아시는 겁니까, 루헤 님?”
루헤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적어도 사우나스를 이곳으로 불러낼 방법은 알 것 같네요.”
그가 예쁘게 미소 지었다.
***
그날 저녁.
비덴탕 근처에선 때아닌 곡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유모와 집사였다.
그들은 절망한 표정으로 비덴탕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비덴탕 건물 전체엔 온통 흉흉한 것들이 잔뜩 매달려 있었으니까.
그것은 바로.
폭약이었다.
건물 외벽에 튼튼한 밧줄로 빼곡히도 묶여있는 시커먼 폭약들을 바라보며, 유모가 숨이 넘어가도록 절규했다.
“비덴탕을 폭파하신다니요. 주인 내외분들도 하늘나라에서 울고 계실 겁니다!”
집사 역시 눈물이 가득 차올랐지만, 애써 꾹 참으며 유모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높으신 분들의 뜻이니 어쩌겠습니까? 게다가 이렇게 하면 우리 남작님께서 살아 돌아오실 수 있다고 하니, 이젠 믿어보는 수밖에요.”
얀피르의 정체가 드래곤인 것도 놀라웠는데, 루헤는 심지어 대마왕이라고 하니.
그는 이미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길 포기한 상태였다.
그렇다 해도 그들의 미어지는 마음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이고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요!”
하지만 그들의 통곡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 비덴탕 쪽으로 네 남자가 다가왔기 때문이다.
집사와 유모는 그들에게 인사 후 서둘러 자리를 비켜주었다.
네 남자는 결연한 표정으로 자신들이 비덴탕에 설치해 놓은 폭약을 바라보았다.
휘온이 의심스러운 듯 물었다.
“정말로 이 방법이 먹힐까요?”
프리트가 눈을 부라리며 답했다.
“그 얼빠진 신이 남작령 걱정에 잠을 못 잤다잖아. 그럼 제 소중한 목욕탕이 날아가는 꼴을 두 눈 뜨고 보고만 있지는 않겠지.”
루헤 역시 옆에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만반의 준비를 마친 얀피르가 드래곤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했다.
그러곤 하늘을 향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어이, 사우나스! 우리랑 같이 불꽃놀이 안 할래?”
그가 시범 삼아 허공에 브레스를 발사했다.
“비덴탕이 폭발하는 모습이, 아주 장관일 거 같거든.”
딴따란딴딴따라란딴딴따란딴딴!
순간 하늘에서 새하얀 빛이 순식간에 쏟아졌다.
2배속으로 빨라진 음악 소리와 함께 사우나스가 허겁지겁 지상으로 내려왔다.
휙휘리리릭휙휙휙휙휙휙휙휙.
함께 내려온 화동들 역시 빛의 속도로 그녀의 주변에 꽃가루를 뿌려댔다.
네 남자와 폭약을 번갈아 바라보는 사우나스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지, 지금 뭐 하시는 거죠? 여러분?”
“보면 몰라? 불꽃놀이 하려고 하잖아.”
“그런데 왜 목욕탕 건물에 저런 해괴한 것들이……!”
비덴탕 외벽에 붙어있는 화약들을 보며 사우나스는 뒤로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그런 사우나스를 향해 루헤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사도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니까요.”
“네? 제가요?”
“그래.”
얀피르가 끼어들었다.
“주인은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 말고 다른 소원을 빌 생각이었다고.”
“우웅?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죠?”
사우나스가 되물었다.
“주인이 나한테 그렇게 말했으니까.”
“하지만, 그 사이에 소원이 다시 번복되었을 수도 있잖아요?”
“아닐 수도 있지.”
“맞을 수도 있잖아요.”
“장담할 수 있어? 만일 아니라면 넌 인간과의 계약을 위반한 게 되는데, 이거 중죄 아냐?”
“으읏……!”
사우나스와 얀피르가 팽팽히 대립한 채, 서로를 노려보았다.
사우나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얀피르에게 물었다.
“만일 제 말대로 그녀의 소원이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고 하면요?”
“그건 일단 주인을 여기로 데려온 다음에 물어보면 되잖아.”
“제가 거절한다면요?”
“알면서 뭘 물어?”
얀피르가 허공을 향해 불을 찍 쏘아 보였다.
“너의 소중한 비덴탕이 조금씩 그을려지는 것을 보게 되겠지.”
뒤에 선 세 남자 역시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뒤로는 이미 온갖 종류의 폭약 상자들이 즐비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사우나스가 당황하여 소리쳤다.
“당신들은 천벌이 두렵지도 않은 건가요!”
그러자 루헤가 가장 먼저 대답했다.
“네. 안 무서워요.”
“당신은 마왕이잖아요!”
프리트가 코웃음을 쳤다.
“나도 마찬가진데?”
휘온이 사우나스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저는 애초에 신을 믿지 않습니다만.”
사우나스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럼 저는 신이 아니고 뭐죠? 지금 이렇게 여러분의 눈앞에 강림해 있는데요!”
휘온이 정색하며 답했다.
“인간의 소원 하나 제대로 들어주지 못하는 신 따위가, 제대로 된 천벌을 내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데요.”
“으윽……!”
때를 놓칠세라 휘온은 미리 준비해왔던 고대 서적 한 권을 꺼내 들었다.
휘온이 그중 한 구절을 손으로 가리켜 사우나스에게 보여주었다.
“고대 역사서에 보면 신과 인간 사이의 계약은 신성한 것으로서 이를 어길 시…….”
“꺄악-그만, 그만!”
사우나스가 귀를 막으며 진저리를 쳤다.
“신이 되어서까지 공부를 하고 싶진 않다고요!”
“아, 그러셨구만?”
그러자 이번에는 프리트가 폭약이 가득한 상자를 한 손에 척 들어 올리고는 사우나스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그럼 이번엔 폭약의 종류에 대해 한번 공부해 보자고. 일단 오늘 터뜨릴 건 이놈인데 말이야. 이게 화력이…….”
“꺄아악-!”
결국 사우나스는 네 남자에게 백기를 들고야 말았다.
“알겠다고요! 기회를 드릴게요!”
“기회?”
“네, 그녀가 사는 세상으로 가서, 진짜 소원이 무엇이었는지 물어보고 오실 기회요!”
“흐음.”
네 남자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사우나스가 서둘러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자아 그럼, 거품 거품~!”
그러자 모두가 짜증을 냈다.
“이봐, 신. 그 괴상한 주문 좀 안 외울 순 없어?”
“루헤 님, 마계 쪽 주문도 저렇습니까?”
“하아, 불쾌하네요. 마족 누구도 저딴 주문은 외우지 않아요.”
사우나스가 발끈해 소리쳤다.
“괴상…… 저딴 주문이라뇨! 목욕탕 외벽에 저런 잔인한 물건을 달아 놓은 여러분께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얀피르가 귀찮다는 듯 내뱉었다.
“알았으니까 빨리 좀 해봐.”
“……쓱싹 보글…….”
그렇게 사우나스가 주문을 모두 외우자, 곧이어 이공간으로 향하는 입구가 열렸다.
새카만 그 입구 속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까마득해 보였다.
“여기로 들어가시면 그녀가 있는 세상으로 갈 수 있어요. 단…….”
사우나스가 말 잇기를 망설였다.
“어서 말해.”
프리트가 재촉했다.
“……모습이 변해있을 그녀를 찾지 못할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 이곳으로 다신 돌아오지 못하실 수도 있습니다.”
“뭐?!”
휘온이 물었다.
“그럼, 그녀와 함께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그거야 당연히 진실된 사랑의 키스를 해야…….”
“사랑의 키스으?!”
프리트가 당황해 소리쳤다.
“아니, 청혼도 거절당한 마당에 다짜고짜 키스부터 하라는 거야, 지금?”
그 말에 되레 제가 부끄러워진 휘온이 다급히 프리트의 입을 막았다.
“저하, 그게 그렇게 자랑스럽게 말씀하실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만.”
“휘온 네놈은 뭐 할 수 있을 거 같아? 엉? 사랑의 키스?”
“크, 크흠! 그야 산수이와 천천히 서로를 알아가다 보면…….”
“그러다 둘이 같이 다른 세계에서 늙어 죽을 일 있어?”
“저를 무시하시는 겁니까, 지금?!”
옆에서 듣고만 있던 루헤가 나른하게 하품을 했지만.
“혹시라도 미혹술 같은 건 절대 쓰시면 안 돼요, 마왕님. 반드시 진.실.된! 사랑의 키스만 허락해드릴 거니까요.”
사우나스가 먼저 알고 선수를 치자, 루헤가 아쉽다는 듯 한숨 쉬었다.
그때 프리트가 사우나스를 향해 말했다.
“아냐. 이건 정말 안 되겠어, 목욕의 신. 그녀를 데려오는 방법 말이야, 다른 조건으로 좀 바꿔줘.”
“흐응, 프리트 님. 혹시 자신이 없으신 건가요?”
“자신이 없긴 뭐가! 그런 이유가 아니라고!”
“그럼 왜죠?”
“진실된 사랑의 키스만 허락하겠다며? 그럼 키스를 못 한 나머지 세 놈은 어쩌라는 거야.”
“아.”
사우나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또 그러네요? 한 번에 네 명을 사랑할 순 없을 테니까요. 으응, 하는 수 없네요. 그럼 그녀를 데려오는 조건을 다른 걸로 바꾸도록 할게요.”
그렇게 사우나스에게서 새로운 조건을 듣게 된 그들은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야 뭐.”
“식은 죽 먹기지.”
“그런데 여러분, 정작 가장 중요한 걸 잊고 계신 것 같은데요.”
사우나스가 그들을 향해 다시 한 번 경고했다.
“그녀를 데려오지 못하면, 여러분 역시 이곳 제국 땅으로 돌아오실 수 없어요. 아시죠?”
그렇다.
사실 그녀를 찾으러 간다는 건 인생을 걸어야 하는 도박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뭐라 입을 열기도 전.
어느샌가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얀피르가 세 남자를 향해 말했다.
“다들 여기 남아. 나 혼자 간다.”
“뭣, 어째서……?”
“내가 그동안 말하지 못한 게 있는데.”
잠시 망설이던 얀피르가 말했다.
“주인이랑 나, 반려하기로 했거든.”
“바, 반…… 뭐?”
“반려?!”
그 말에 세 남자는 하늘이 두 번이나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게 사실이냐 얀피르!”
“이 망할 드래곤 자식아, 그걸 왜 이제야 말해-!”
“결국 수이가 당신의 비늘을 받은 거군요……?”
세 남자는 절망에 빠졌다.
반려라니, 그게 의미하는 건.
산수이가 선택한 게, 결국 얀피르 그였다.
얀피르가 말을 이었다.
“게다가 다신 이곳으로 못 돌아올 수도 있다고 하잖아. 난 그딴 것 상관없으니, 위험은 나 혼자 감수할게.”
그렇게 그는 미련 없이 게이트 안으로 발을 뻗으며 남겨진 세 남자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휘온, 프리트, 그리고 루헤. 그동안 정말…… 고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