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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세신사 영애님-121화 (121/150)

121화.

산수이는 제 방의 침대 위에서 죽은 듯 잠들어있었다.

그녀의 곁에 앉은 세 명의 남자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프리트가 휘온에게 물었다.

“정말 그녀를 살릴 수 있다는 거지?”

“루헤 님께서 그렇게 말하셨으니, 믿어보는 수밖에요.”

“근데 이 마왕 놈은 왜 이렇게 안 와?!”

“황제 폐하와의 회담이 곧 끝날 예정이니, 금방 오실 겁니다.”

두 남자가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에도, 얀피르는 그저 말없이 산수이의 손을 잡고 앉아있을 뿐이었다.

그때, 검은 연기와 함께 루헤가 나타났다.

프리트가 벌떡 일어나 그를 향해 소리쳤다.

“왜 이제야 온 거야, 마왕! 빨리 시작하라고!”

루헤가 산수이를 향해 말없이 손을 뻗었다.

원래대로라면 슐레히트의 공격을 맞은 자는 그 자리에서 즉사해야 마땅했다.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약점을 마주하게 된 영혼이 미쳐버린 후, 몸을 빠져나가 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산수이는 의식만 잃은 채 아직 살아있었다.

산수이를 다시 깨울 방법을 찾기 위해, 네 남자는 갖은 방법을 다 동원했고.

마침내 루헤가 고대 마계 서적에서 비슷한 사례를 찾아낸 것이다.

바로, 빠져나간 영혼의 행방을 찾아내 원래의 몸으로 되돌려 놓는 것이었다.

루헤가 산수이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수이가 살아있는 걸 보면, 그녀의 영혼은 분명 아직 이 안에 잠들어있어요.”

세 남자는 모두 숨을 죽이고 루헤를 지켜봤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마침내 산수이의 이마에서 손을 뗀 루헤.

그런데 그의 표정이 이상했다.

이를 지켜보던 세 남자는 불안해 미칠 지경이었다.

“뭔데! 대체 왜 그딴 표정인 거야, 마왕!”

“어서 말씀해 보십시오, 루헤 님!”

“설마 주인의 영혼이 이미 떠나버린 건 아니지……?”

루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뇨, 그녀는 아직 확실히 이 안에 있어요. 다만…….”

“다만 뭐!”

“……영혼이 깨어나질 않아요.”

마왕인 저 역시도 그게 의문이었다.

제가 읊은 주문은 완벽했는데, 대체 왜?

루헤는 다시 한 번 산수이에게 손을 뻗어 그녀의 영혼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몇 번을 반복해도 결과는 똑같았다.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얀피르가 산수이에게로 다가갔다.

얀피르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외쳤다.

“일어나 수희야.”

그는 산수이의 볼에 자신의 볼을 갖다 비벼도 보고, 핥아도 보며 계속해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너 아직 거기에 있다며. 나야, 수희야. 얼른 눈 좀 떠봐.”

“수…… 희?”

얀피르가 반복해서 불러대는 그 낯선 이름에 세 남자는 어리둥절했다.

수이도 아니고, 수희?

그때였다.

순간 산수이의 방 안이 새하얀 빛으로 물들었다.

“?”

이윽고 하늘로부터 요상한 음악 소리가 들리더니, 하얀 빛의 줄기가 그들의 앞으로 내려왔다.

딴따라란~

“이, 이게 무슨?”

네 남자는 깜짝 놀랐다.

곧이어 어떤 여인이 빛의 줄기를 따라 걸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따라란~ 띠리리링~

앞뒤로 따라오는 악단들은 그녀의 발걸음에 맞춰 신명 나는 음악을 연주해대고 있었다.

“?!”

이 얼토당토않은 상황 속에서, 네 남자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서 있었다.

흰 옷을 입은 그 여인은 얼굴 전체를 면사포로 덮은 모습이었다.

그녀가 우아한 걸음걸이와 함께 점점 이쪽으로 다가왔다.

마침내 그 여인이 네 남자의 앞에 서는 순간.

그녀를 따르던 화동들이 들고 있던 바구니에서 온갖 꽃가루를 집어 사방에 뿌려댔다.

사라락—

따라라라란~ 딴!

요란하던 음악이 뚝 그치며, 여인이 걷어 올린 면사포 속의 얼굴은.

“……사, 산수이?!”

“남작?”

“수이?”

“주인?!”

그것은 바로 산수이, 그녀의 모습이었다.

네 남자는 침대 위에 누워있는 산수이와, 지금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산수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분명 동일 인물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휘온이 절규하며 외쳤다.

“사, 산수이……! 벌써 죽어서 천사가 되어버린 겁니까!”

그러자 산수이를 꼭 닮은 그 여인이 입을 열었다.

“음? 천족인 건 맞지만 제 이름은 산수이가 아니에요.”

“그럼 넌 누구지!”

프리트의 물음에, 여인이 입을 가리며 호호 웃었다.

“제 이름은 사우나스. 목욕의 신이랍니다. 아, 물론 제가 인간이었던 시절에…… 산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웠긴 했었지만요.”

사우나스가 침대 위에 누워있는 산수이를 손으로 가리키며 호호 웃었다.

“저 육신을 사용하던 시절에 말이죠.”

뭐라고?!

도대체 정리할 수 없는 이 상황 앞에, 네 남자는 회로가 끊긴 듯 정지했다.

루헤가 입을 열었다.

“그럼 당신이 진짜 수이의 영혼이란 말인가요?”

“네, 맞아요. 제가 인간이었던 시절 덕을 많이 쌓아, 죽어서 목욕의 신이 되었지요.”

입을 가리고 호호 웃던 사우나스가 침대 위에 누워있는 산수이를 보며 물었다.

“그런데, 나의 사도는 왜 저러고 있는 걸까요?”

그녀가 의아한 표정으로 산수이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으음. 임무를 모두 완수했으니 이제 소원을 들어줘야 하는데……?”

“임무?”

“소원?”

세 남자는 여전히 이 대화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대체 저 신이 무슨 소릴 하는 거지?

그러자 사우나스가 사람 좋은 웃음을 호호 날리며 말을 이었다.

“비덴비덴 남작령을 전쟁의 위기에서 구해냈으니, 약속대로 그녀의 소원을 들어줘야 되거든요. 그런데 왜 저렇게 계속 잠만 잘까아……?”

그러자 얀피르가 벌떡 일어나 사우나스를 향해 외쳤다.

“주인이 맡은 임무 완수의 조건이, 전쟁을 막는 거였단 말이야?!”

이 갑작스러운 발언에 세 남자는 일제히 얀피르를 돌아보았다.

뭐야, 얀피르는 다 알고 있었어?

그런 얀피르를 향해 사우나스가 웃었다.

“네에. 맞아요.”

얀피르가 그르렁댔다.

“주인보고 남작령을 다시 온천 관광명소로 만들라고 했었다며! 그게 임무 아니었어? 그것 때문에 주인이 그동안 얼마나 고생…….”

사우나스가 말을 자르며 답했다.

“물론 그녀가 지은 수도교라는 것도 정말로 멋진 생각이긴 했지만요, 어차피 전쟁이 나면 그런 건 다 무너져 버리잖아요?”

사우나스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제가 내린 임무 완수의 진정한 조건은, 바로 마계와의 전쟁으로부터 비덴비덴 남작령을 지키는 거였답니다아?”

그 말에 결국 얀피르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럼 진작 그렇게 말했었어야지! 그 말은, 넌 이 땅에 다시 전쟁이 일어날 걸 미리 알고 있었다는 소리잖아!”

“으음, 하지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사우나스가 루헤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분께서 선대 마왕을 제거해 주시는 바람에 전쟁이 날락말락 하다가 안 났는데, 다시 또 났다가 말았다가…….”

사우나스는 윙크를 하며 혀를 날름 내밀고는 제 머리를 콩 쥐어박아 보였다.

“저도 영 헷갈렸거든요, 에헷.”

“크아아아-! 이 얼빠진 천족 놈들!”

광분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얀피르를, 양쪽에서 휘온과 프리트가 붙잡았다.

“얀피르, 참아! 신이야, 천족이라고!”

“뭔 소린지 대체 모르겠지만, 일단은 남작을 살려야 하니, 참아 제발!”

이 혼돈 속에서도 사우나스는 그저 제 입을 가리고 호호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대동한 악단과 화동들이 이따금 곡을 연주하고 꽃을 뿌리며 분위기를 돋웠다.

짜란~

그러자 침묵을 지키고 있던 루헤가 사우나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 수이의 몸 안에 있는 영혼은 대체 누구의 것이죠?”

“으음.”

사우나스가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시다시피 저 육신은 몇 해 전 이미 마차 사고로 사망한 저의 껍데기.”

그녀가 갑자기 눈물을 또르르 흘리며, 하늘을 향해 손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천족이 되어서도, 저는 한시도 이곳 비덴비덴 남작령에 대한 걱정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답니다.”

그녀의 절절한 사연에 악사들과 화동들 역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천족도 잠을 잡니까?”

휘온이 사우나스에게 물었지만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사우나스의 설명이 이어졌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그들은 크게 당황했다.

산수이가, 다른 세계에서 온 자였다니.

상상도 못 한 정체에 세 남자는 이제 뭐라 대꾸할 기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산수이가 항상 제국엔 존재하지 않는 번뜩이는 아이디어들을 내어놓았던 거였군.’

‘그녀의 당돌함도, 모두 다른 세상 여인의 것이었어.’

‘때밀이와 노천탕이 있는 세계라니…… 수이는 대체 어떤 문명에서 온 거죠?’

그럼 과연 자신들이 사랑했던 그녀는 누구였던 걸까.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 생각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어느새 사우나스가 그들을 지나쳐, 산수이에게 다가가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몸과 영혼이 분리되어 잠이 들어 버린 거였군요? 대체 누가 우리 소중한 사도님께 이런 나쁜 짓을 했을까아?”

휘온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하늘 위에서 다 지켜보고 있던 것 아니었습니까!”

“호호호…… 그때 잠깐 목욕을 하느라 미처 못 봤어요.”

이번엔 프리트가 외쳤다.

“방금 전엔 이곳이 걱정되어 잠도 못 이뤘다 했잖아!”

“오호호…….”

사우나스는 대답 대신 손뼉을 짝 쳐서 산수이의 몸을 허공에 붕 띄웠다.

“뭐 어쨌든, 저는 우리 사도님의 소원을 들어줘야 하니까요.”

“소원……?”

그 말을 들은 얀피르가 다급히 앞으로 나섰다.

“자 잠깐, 사우나스? 그 소원에 대해서 내가 할 말이 좀 있는데……?”

“네에 네에, 알고 있어요. 그녀의 소원. 그래서 제가 지금 들어드리려고 해요.”

“잠깐……!”

“자아, 거품거품 보글보글~.”

갑작스럽게 이어진 이 상황에 네 남자는 크게 당황했다.

“아니, 지금 그거 설마 주문입니까?”

“아 일단 내 말을 좀 들어보라고!”

“쓱싹쓱싹~ 얍☆”

때마침 흘러나온 아름다운 노랫소리와 꽃가루에 산수이의 몸이 파묻혔다.

어느새 그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팟-

“주, 주인……?”

“산수이?”

“……?!”

“너 사우나스 이 자식, 그녀를 어디로 보내버린 거야!”

“소원대로, 원래의 세상으로 돌려보내 드렸답니다!”

“뭐어-!”

네 남자의 절규 아래, 갑자기 비덴비덴 남작저의 묘지에 비석 하나가 새롭게 생겨났다.

[산수이 비덴비덴, 여기에 잠들다.]

***

으, 으음…….

얼굴 위로 물방울이 똑 하고 떨어지는 감촉을 느끼며, 그녀가 힘겹게 눈을 떴다.

‘여긴 어디지?’

곧이어 뒤통수에서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자신이 누워있는 바닥의 촉감이 살갗에 그대로 전해져왔다.

눅눅하고, 딱딱했다.

그녀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오래 누워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온몸의 뼈 마디마디가 쑤셔왔다.

“으윽…… 얀피르는? 무사한가?’

하지만 어디에도 그가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가 정신을 차린 곳은, 바로 자신이 일하던 서울의 목욕탕 안이었으니까.

“……!”

놀란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현대식 목욕탕도, 플라스틱 의자며 샤워기와 거울도.

원래의 세계로 돌아온 것이다.

당황한 그녀는 재빨리 거울로 달려가 제 모습을 확인했다.

본래의 자신, 안수희의 얼굴이 거울에 비쳤다.

어떻게 된 거지?

난 분명 얀피르 대신 슐레히트의 공격을 맞아 쓰러졌었고, 결국 사우나스 님은 만나지 못했었는데?

“설마…… 꿈?”

안수희는 미친 듯 밖으로 달려나가 목욕탕 전체를 뒤져보았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이세계와 연결될 수 있을 만한 단서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탈의실 바닥에 허탈한 듯 주저앉았다.

말도 안 돼, 이건 아니야.

정말로 꿈이었나? 내가 머리를 너무 세게 부딪혀서 환상을 봤나?

오만가지 생각들이 그녀의 머리를 뒤덮었다.

하지만 어떻게 이토록 심장이 시리게 애절한 감정이 꿈일 수가 있을까.

아직도 그의 얼굴이 눈앞에 생생한데.

그때, 안수희의 머릿속에 무언가 떠올랐다.

그녀는 서둘러 제 목을 더듬어보았다.

얀피르가 준 드래곤의 비늘 목걸이가 여전히 아름다운 빛을 내며 그녀의 목에 걸려있었다.

‘역시 그건 꿈이 아니었어!’

그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얀피르는 무사할까? 자신이 이렇게 갑자기 떠나버려서 놀랐을 텐데.

빨리 돌아가서 안심시켜줘야 하는데.

안수희가 허공을 향해 울먹이며 외쳤다.

“사우나스 님!”

대답 없는 메아리만이 목욕탕 안을 가득 채웠다.

“사우나스 님, 제발! 대답해 주세요!”

하지만 아무리 목욕의 신을 애타게 불러보아도, 그녀의 응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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