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루헤가 마족들의 처리를 위해 잠시 마계로 떠난 뒤.
프리트와 휘온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가장 먼저 산수이에게로 달려갔다.
“남작, 괜찮은 건가?”
“무사하신 겁니까, 산수이?”
“물론이죠! 그나저나 다들 정말 멋지게 해내 주셨어요. 우리가 이겼다고요!”
그렇게 모두는 잠시간 그들이 이뤄낸 승리의 기쁨을 맛보았다.
프리트가 산수이의 손에 들린 길고 커다란 이태리타월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이게 마족들을 모조리 때려눕힌 그 때수건이로군?”
“때려눕히다뇨? 전 그저 때를 밀어준 거라고요!”
“하아, 힘까지 센 황후라니 정말이지……. 역시 나와 결혼해 줘, 산수이 남작.”
“아니 잠깐만요, 저하. 황후라뇨?”
“내가 곧 황제가 될 텐데. 그럼 그대 역시 이젠 황태자비가 아닌 황후라 불러야지.”
“그러니까 제가 왜요?”
어느새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얀피르가 둘 사이에 고개를 불쑥 내밀며 그르렁거렸다.
“멀쩡히 있다가 왜 또 수작질이야, 이 황태자 놈아!”
“이 드래곤 놈이, 수작질이라니!”
그러자 휘온이 또다시 한숨을 내쉬며 두 남자 사이에 끼어들어 만류했다.
“저하 제발, 병사들이 모두 지켜보고 있습니다! 우선은 전후 처리를 먼저 하셔야…….”
그렇게 세 남자가 옥신각신하는 사이, 갑자기 산수이의 등 뒤에서 짙은 보랏빛 연기가 피어올랐다.
“……!”
하지만 이를 누구보다 먼저 눈치챈 얀피르가 재빨리 산수이를 막아서며 외쳤다.
“누구냐!”
곧이어 그 보라색 연기는 슐레히트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가 모노클을 빛내며 중얼거렸다.
“호오, 인간 치곤 제법 감이 좋은 편인데.”
“네놈은……?”
슐레히트를 본 얀피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저 모습, 저 목소리는 분명.
“……슐레히트.”
“응? 나를 알고 있나 보군?”
“모를 리가 없잖아.”
얀피르의 몸에서 검은 비늘이 피어올랐다.
곧이어 그의 등을 찢고 날개가 돋아나며, 얀피르는 성체 드래곤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가 슐레히트를 향해 울부짖었다.
“우리 종족의 원수인, 네놈을!”
“너, 너는……?”
얀피르를 바라보는 슐레히트의 눈이 커졌다.
“드래곤 제국의, 황태자?!”
“크르르르.”
“그럴 리 없어. 그때 분명 내 손으로 드래곤의 황족들을 모조리…….”
“그 입 닥쳐!”
얀피르가 그를 향해 서늘하게 경고했다.
“나의 종족들과 부모님의 원한, 오늘 내 손으로 갚아주겠다.”
그러자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휘온과 프리트가 놀라 물었다.
“얀피르 너…….”
“드래곤 제국의 황태자였던 거냐?!”
그 이름을 들은 슐레히트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그래, 맞아. 저 인간 여자가 불렀던 그 이름 역시 얀피르였어……!’
슐레히트는 이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는 듯,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아아, 그게 바로 너였군.”
웃음을 뚝 그친 슐레히트가 산수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세 남자가 다급히 그녀를 엄호했다.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지?!”
“마왕의 여자가 말했던 얀피르가, 설마 네놈이었을 줄은!”
“마왕의…… 여자?”
세 남자는 대관절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그저 슐레히트를 향해 공격 태세를 갖출 뿐이었다.
프리트와 휘온이 그를 향해 검을 빼들었다.
“어디 덤벼보시지, 마족.”
얀피르 역시 그르렁거리며 송곳니를 드러냈다.
“주인의 손가락 하나라도 건드렸단 봐.”
“손가락이라.”
슐레히트가 재미있다는 듯 미소 지었다.
“그럼 다른 건 어떨까?”
“!”
슐레히트의 속셈을 눈치챈 얀피르가 모두를 향해 경고했다.
“다들 조심해. 저 녀석은 정신계 마법을 사용하니까!”
휘온이 놀라 물었다.
“정신계 마법이라고?”
프리트 역시 얼굴을 찌푸렸다.
“그럼 뭐 어떻게 조심하라는 거야. 생각을 하지 말라는 거냐?”
“저하 넌 원래 생각이 없으니까 괜찮고.”
“아니 근데 이 자식이?”
“쓸데없이 생각만 많은 휘온 네놈이 가장 문제지.”
“생각이 없는 너보다야 훨 나은 것 같은데, 얀피르?”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산수이가 세 남자를 향해 버럭 화를 냈다.
“아니, 지금이 싸울 때예요?!”
그 말에 세 남자는 다시금 입을 다물고 슐레히트를 향해 섰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아직까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 사이 프리트가 얀피르를 향해 조용히 물었다.
“이봐, 드래곤. 저 자식이 쓰는 정신 마법이라는 게 대체 뭔데?”
“……상대의 약점을 환상으로 보여줘서, 미쳐버리게 만들어.”
“뭐?!”
그렇게, 자신의 동료들 역시 과거 마계대전에서 참혹한 환상을 보며 허공을 향해 절규하다 피를 토하며 죽어갔었다.
그것은 마법이나 물리 공격이 잘 통하지 않는 드래곤을 학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약점.
그 말을 들은 프리트의 눈앞에 제가 아우의 목을 베던 그날의 끔찍한 기억이 떠올랐다.
휘온 역시 피부 관리를 하고 있는 자신의 방에 제국의 모든 사람들이 들이닥치는 아찔한 상상을 했다.
한편 그들 중 가장 혼란스러운 얼굴로 서 있는 건.
다름 아닌 산수이였다.
‘약점……?’
내 약점이 뭐지?
그녀는 아무리 고민해봐도 제 약점을 떠올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보육원에서 자란 거? 그건 얀피르한테 털어놓고 나서 괜찮아졌는데. 돈 없는 거? 아니, 그것도 얀피르와 함께 여기 남기로 결심한 이상 문제 될 게 없고. 내 정체 역시 얀피르가 이미 알고 있어서 괜찮…….’
그러다 문득, 산수이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슐레히트에게 들키지 말아야 할 제 약점을 고민하며 떠올린 것들이 전부 다.
얀피르에 관한 거였다.
그리고 슐레히트는.
그녀가 얀피르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설마.
‘안 돼……!’
순간 슐레히트의 눈이 얀피르를 향해 번쩍 빛났다.
그는 제일 먼저 인간군의 가장 큰 전력이 될 얀피르부터 없앨 생각이었으니까.
‘이대로 가다간 난 루헤 놈한테 죽게 될 거야. 마왕의 여자만 생포하면 돼. 마족군이 아직 살아있으니, 마왕을 죽이고 전쟁을 다시 일으키면…….’
드래곤 황태자의 약점이야 뻔했다.
산수이라는 인간 여자의 입에서 흘러나왔던 그 이름, 얀피르.
제 처음 추측과는 다르게, 저 인간 여자는 마왕이 아닌 드래곤의 황태자와 사랑하는 사이임이 틀림없었다.
‘네 눈앞에서 저 인간 여자가 갈가리 찢어져 죽는 환상을 보여주지, 드래곤의 황태자.’
그렇게 되면 네놈 역시 미쳐 죽어버리고 말겠지.
다른 드래곤들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그렇게 슐레히트의 마력이 얀피르를 향해 뻗어나갔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그 끝에 닿은 건.
“얀피르, 안 돼!”
순식간에 제 몸을 날려 얀피르를 막아선 산수이였다.
카앙—
짙은 보랏빛 연기가 매캐하게 피어오르며, 산수이가 얀피르의 앞에서 천천히 쓰러져갔다.
“주인-!”
얀피르가 제 커다란 날개로 다급히 그녀를 감싸 보호했지만, 이미 그녀의 몸은 힘없이 그의 팔 위에 축 늘어진 후였다.
“산수이!”
“남작, 안 돼!”
두 남자 역시 다급히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녀는 눈을 뜨지 않았다.
“주인? 아니지, 응?”
얀피르가 그녀의 볼을 어루만졌다.
하지만 그녀에게선 어떠한 미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얀피르가 그녀의 이름을 외치며 울부짖었다.
“눈 좀 떠봐, 수희야!”
그때, 갑자기 얀피르의 심장에 극심한 고통이 느껴졌다.
“크윽……!”
이윽고 자신의 심장 절반이 마치 불에 타버리는 듯 아파왔다.
반려인 산수이의 영혼을 자신의 심장에 각인시킨 얀피르였기에 그 누구보다 먼저 알 수 있었다.
방금 그녀의 영혼이, 육신과 분리되었다는 것을.
“안 돼-!”
얀피르가 제 품에 산수이를 끌어안고 절규했다.
몇 번을 애타게 불러봐도 소용없었다.
그녀의 몸은 이미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으니까.
프리트와 휘온 역시 이 참담한 현실 앞에서 망연자실했다.
그들의 손에 들려있던 검이 바닥으로 거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한편 이 예상치 못한 상황 앞에서 슐레히트 역시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이, 이러면 안 되는데?’
저 인간 여자가 벌써 죽어버리면 안 되는데! 그렇게 되면 분명 루헤가 저를…….
하지만 그보다도 먼저 눈이 돌아버린 얀피르가 저를 향해 브레스를 내뿜는 모습이 보였다.
타앙-!
슐레히트는 재빨리 결계를 쳐 가까스로 얀피르의 공격을 막아냈다.
‘제기랄!’
우선은 저 드래곤부터 없애는 게 먼저였다.
슐레히트가 얀피르를 향해 다시 한 번 정신 마법을 시전했다.
키잉—
슐레히트를 향해 빠르게 날아오르던 얀피르의 눈에 이윽고 끔찍한 환상이 펼쳐졌다.
그의 눈앞에서 산수이가 몇 번이고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갔다.
하지만 슐레히트가 어떤 술수를 부려도, 그의 마법으론 더 이상 얀피르의 정신을 망가뜨릴 수가 없었다.
그의 세상은, 방금 전 현실 속에서 이미 무너져 버렸으므로.
“크르르르르!”
얀피르가 슐레히트를 향해 제거 마법을 시전했다.
그의 마력이 슐레히트의 결계를 조금씩 부수기 시작했다.
“크읏!”
다급해진 슐레히트가 얀피르에게 제 모든 마력을 총동원해 퍼붓기 시작했다.
“죽어라, 드래곤!”
곧이어 얀피르의 눈앞에서 과거의 온갖 끔찍한 기억들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전장에서 그의 무수한 동료가 죽어갔다. 그의 사랑하는 가족들 역시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산수이가 또 한 번 그의 품 안에서 숨을 거뒀다.
하지만 그 어떤 환상도 이미 현실 속에서 자신의 반려를 잃은 그의 슬픔을 이길 수는 없었다.
마침내 슐레히트의 결계가 산산조각 났다.
당황한 그가 얀피르를 향해 우악스럽게 외쳐댔다.
“어, 어째서! 어떻게 네놈은 환상을 보고도 멀쩡한 거지?”
“그깟 게 무슨 소용이야. 이미 네놈이 날 지옥에 떨어트렸는데.”
얀피르가 커다란 손으로 슐레히트를 거세게 움켜쥐었다.
드래곤의 악력에 그는 더 이상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제대로 된 전쟁은 시작조차 못 해보고, 이렇게 죽을 수는……!
얀피르가 그를 향해 마지막 말을 읊조렸다.
“탄생과 소멸의 주기 따위는 네놈에겐 적용되지 않을 거야.”
“그, 그게 무슨!”
“네놈의 영혼까지 소멸시켜, 다시는 태어날 수조차 없게 만들어 줄 테니까.”
“안 돼-!”
이어진 얀피르의 주문과 함께 슐레히트는 가루가 되어 공중으로 흩어졌다.
툭.
그가 착용하고 있던 모노클만이 그곳에 떨어져, 모든 것이 정말로 끝났음을 말해주었다.
***
전쟁은 끝났다.
반역을 일으킨 마족들은 마계의 감옥에서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고.
인간의 황제와 대마왕은 전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협상을 준비 중이었다.
하지만 산수이는 여전히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심장이 여전히 세차게 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