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마족이 경계를 넘어왔지?”
얀피르가 창문에서 가볍게 뛰어내리며 말했다.
갑자기 나타난 것도 모자라,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얀피르를 보며 산수이와 두 남자는 적잖이 놀랐다.
자신들 역시 방금 전에나 겨우 이 사태에 대해 전해 들었는데.
수도에서 한참 떨어진 남작령에 있던 얀피르가 어떻게 먼저 알아챈 거지?
프리트가 놀란 표정으로 얀피르를 향해 중얼거렸다.
“드래곤 너, 어떻게 벌써……?”
얀피르가 제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마계의 경계가 깨어지는 순간, 다 기억이 나 버렸거든.”
그가 산수이와 프리트를 향해 손짓했다.
“시간 없으니, 일단 가면서 얘기하자고.”
***
“천족 놈들은, 본래 세상사에 관여하려 들지 않아.”
자신의 등 위에 프리트와 산수이를 태운 얀피르가 구름 속을 빠르게 비행하며 말했다.
“그렇게 우리 일족이 멸망할 때까지, 그저 보고만 있었지.”
그날의 기억을 어떻게 잊고 있었을까.
마족들의 손 아래에서 제 전우들이 모조리 학살당하던 그날의 참혹한 기억들을.
웬만한 마법 공격으로는 드래곤의 피부에 생채기 하나 낼 수 없었다.
그래서 마족들이 선택한 방법은 바로 정신계 공격.
“크워어어-!”
고작 마족 한 명이 사용하던 그 마법 앞에, 수많은 드래곤들이 속수무책으로 피를 토하며 쓰러져갔다.
마침내 마족들은 드래곤 제국의 황궁 가까이에 도달했다.
선방에 섰던 드래곤의 황태자 얀피르는 황제를 지키기 위해 서둘러 황궁으로 날아갔다.
“황제 폐하를 지켜라-!”
하지만 그곳에서 얀피르를 기다리고 있던 건.
황제, 바로 자신의 아버지가 준비해놓은 커다란 봉인구였다.
“……!”
충격에 빠져있는 얀피르를 향해, 그의 아버지인 드래곤의 황제가 입을 열었다.
“내 남은 힘으론, 오직 너 하나밖엔 봉인할 수 없다.”
하지만 얀피르의 생각은 단호했다.
“일족이 죽어가는 걸 지켜보며 혼자 살아남을 바엔, 차라리 명예롭게 싸우다 죽겠습니다.”
“얀피르 드 라첸!”
황제가 큰소리로 외쳤다.
“살아라. 살아남아서……!”
황제가 무너져가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계약을 이행해라.”
“계약…… 이라고요?”
“그렇다.”
황제가 제 아들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계약의 대가로 천족이 참전하기로 했다.”
천족이란 말을 들은 얀피르가 그르렁댔다.
“천족이라 하셨습니까? 우리 일족이 다 죽어 나갈 땐 뭘 하다가!”
“본디 그들은 세상사에 관여하지 않는다.”
“그럼 왜 이제서야……!”
“우리 종족이 무너지면서, 이 세상 힘의 균형이 깨졌기 때문이다.”
드래곤의 황제가 말을 이었다.
“하나의 일족 전체가 마족에 패할 줄은, 자신들 역시 예상하지 못했겠지.”
“……계약의 내용이 대체 무엇입니까.”
“훗날 다시 있을지도 모르는 전쟁을 위해, 드래곤 일족의 혈통을 남겨두는 것.”
“이런 미친놈들!”
얀피르가 눈을 이글거리며 말했다.
“그런 계약, 저는 따를 수 없습니다!”
“나는 이미 너를 선택했다, 내 아들아.”
“싫습니다!”
그때, 곁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드래곤의 황후가 입을 열었다.
“얀피르.”
제 아들을 마지막으로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제발, 제발 부탁이니 너만은 살아남거라. 살아서…… 평생을 함께할 반려도 만나고, 그렇게 계속해서 삶을 이어가다오.”
“저는 마지막까지 두 분을 지키다 죽는 길을 택하겠습니다.”
“얀피르 제발……!”
“그렇다면 하는 수 없구나. 미안하다, 내 아들아.”
결국 드래곤의 황제는 강제로 봉인구를 작동시키기 시작했다.
“마족들이 이 땅에서 또다시 전쟁을 일으키게 되는 날, 그날이 네가 다시 깨어나는 날이 될 것이다.”
“아바마마! 안 됩니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비명마저 봉인구와 함께 갇혀버린 채.
그는 홀로 어두운 지하 속에 잠들게 되었다.
그렇게 몇백 년이 지난 어느 날.
슐레히트를 통해 천족의 비밀을 전해 들은 선대 마왕은 다시금 전쟁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제2차 마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초전.
곧이어 이들의 움직임을 감지한 얀피르의 봉인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크르르…….”
그렇게 알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새끼 드래곤 모습의 얀피르.
곧이어 그의 작은 육신 역시 온전한 성체로 되돌아갈 참이었다.
하지만.
전란의 기운을 눈치챈 루헤가 선대 마왕을 살해하고 새로이 왕좌에 오르면서 전쟁은 무마되었고.
“크르……? 여긴 어디지?”
너무 일찍 깨어나 버린 얀피르에게는 기억상실이라는 부작용이 생겨버렸다.
***
여기까지 말하던 얀피르가 콧김을 훅 내뿜었다.
“하여간 천족 놈들, 마음에 안 들어. 무슨 계약을 이따위로 허술하게 해?”
한편 지금껏 얀피르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산수이는, 이제야 모든 것이 설명되는 듯했다.
‘만일 루헤가 선대 마왕을 해치우지 않았다면…….’
전쟁은 그대로 일어났겠지.
봉인에서 풀려난 얀피르 역시 곧바로 모든 기억을 되찾고 참전했을 것이고.
제가 지금껏 이곳에서 만난 모든 이들 또한, 이 끝나지 않을 전쟁에 휩쓸려 사라져갔겠지.
‘그리고…… 얀피르와 내가 만나게 될 일도 없었을 거야.’
이렇게 자신도 모르는 새, 또다시 루헤에게 빚을 졌다.
아니, 자신뿐 아니라 모든 이들이.
하지만 결국 그 전쟁은 일어나고 말았다.
그때, 그들의 시야 안으로 비덴비덴 남작령이 들어왔다.
얀피르가 고도를 낮춰 비행하기 시작했다.
“주인, 일전의 그 땅굴 안으로 들어가 있어. 다른 식솔들은 내가 미리 거기로 대피시켜 놨으니 걱정하지 말고.”
“나 혼자 저길 들어가라고? 그럼 너랑 저하는!”
얀피르가 웃어 보였다.
“우린 당연히 마족 놈들 쓸어버리러 가야지.”
“하지만 거긴 너무 위험해! 자칫하다간 옛날처럼……!”
그러자 옆에서 프리트가 거들었다.
“이거, 산수이 남작께서 우리가 영 못 미덥나 본데? 한참은 더 수련해야겠어. 안 그래, 드래곤?”
얀피르 역시 맞장구치며 웃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제국의 검과 불 뿜는 드래곤 조합이 어디 가서 꿀릴 군번은 아닌데.”
제 앞에서 일부러 여유를 부리는 두 남자의 모습에 산수이는 자꾸만 눈물이 났다.
손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한 일족이 멸했던 전쟁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천족의 제대로 된 참전도 없이 이 악몽이 다시 재현된다는데.
그걸 모르는 것도 아니고, 다 알면서 어떻게 이들을 사지로 밀어 넣을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산수이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얀피르는 서둘러 지상으로 하강했다.
그는 두 사람을 내려놓고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발버둥 치는 산수이를 안아 들고 땅굴 속으로 내려갔다.
“나도 같이 갈래!”
“……이제야 내 아버지를 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네.”
얀피르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싫어! 너 혼자 거기로 못 보내.”
강하게 몸부림치는 산수이를 향해, 얀피르가 미소 지었다.
“나 말이야, 주인. 지금 하나도 안 무섭다? 적어도 주인 넌 이 안에서 안전할 거란 걸 아니까, 정말 하나도 두렵지가 않아.”
산수이가 울면서 그의 목에 매달렸다.
“나만 여기 혼자 두고 가지 마, 제발. 너 지금 거기 가면 죽어.”
얀피르가 그녀의 얼굴을 부둥켜 잡고 다짐했다.
“너만 남겨두고 내가 어떻게 죽어? 절대 안 죽어. 약속해. 반드시 살아서 네 옆으로 돌아올게.”
“가지 마, 얀피르…….”
서럽게 울면서 자신을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는 산수이를 보며, 얀피르는 미리 땅굴 속에 들어와 있던 이들에게 눈짓했다.
유모가 서둘러 그녀를 얀피르에게서 떼어냈다.
“남작님, 어서 이리 오시지요.”
산수이는 그들의 손에 이끌려 얀피르에게서 떨어졌고.
“얀피르-!”
그렇게 산수이는 저에게 마지막 미소를 지으며 떠나가는 얀피르를 그저 지켜만 봐야 했다.
“안 돼!”
***
마계로 이어지는 통로.
그 작은 경계를 통해 수많은 마족이 꾸역꾸역 쏟아져 나왔다.
그건 그야말로 살아있는 지옥이었다.
보초를 서던 인간 병사들은 이미 시체가 되었다.
그들에게서 흘러나온 핏물이 강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
마족들은 눈앞에 보이는 모든 생명체를 닥치는 대로 살육했다.
그때, 갑자기 검은 연기와 함께 루헤가 모습을 드러냈다.
“!”
“마왕이다!”
놀란 마족들은 일순 진군을 멈춘 채, 저들 앞에 현신한 루헤를 바라보았다.
루헤는 말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가 가장 피하고 싶었던 참상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전쟁.
‘결국 우려했던 귀찮은 일이 터지고 말았네요.’
그가 새빨간 눈알을 굴리며 누군가를 찾았다.
‘……슐레히트.’
그놈의 목만 따면 간단히 끝날 일이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루헤라 해도, 개미 떼처럼 밀려 나오는 마족들 사이에서 단번에 그를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슐레히트를 찾기 위해 몸을 돌리려던 찰나.
갑자기 마족들이 루헤의 앞을 막아서기 시작했다.
루헤가 차가운 눈빛으로 물었다.
“……지금 뭐 하는 거죠?”
“슐레히트 님께서 마왕님을 붙잡아 두라 명하셨습니다.”
루헤가 핏빛 눈을 번뜩이며 서늘하게 경고했다.
“정녕 내 손에 죽고 싶은가 보군요……?”
그 모습에 일부 마족들은 동요했지만, 대다수의 마족들은 이미 루헤의 주위에 원을 그리며 모여들고 있었다.
“설마 저희를 모두 죽이실 생각은 아니시겠죠.”
“그게 소원이라면 들어줄 수도 있는데.”
그렇게 루헤가 마족들을 향해 손을 치켜들던 찰나.
“쯧. 내 이러고 있을 줄 알았지.”
누군가 하늘 위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윽고 황금빛 머리칼을 휘날리며 하늘로부터 프리트가 내려왔다.
그가 장검을 치켜들고 루헤를 향해 외쳤다.
“여긴 내가 막을 테니, 마왕 넌 네 할 일이나 해!”
“……!”
놀란 루헤가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얀피르가 포효하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드래곤의 집채만 한 그림자가 머리 위에 드리워지자, 마족들은 크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드, 드래곤?!”
“살아남은 드래곤이 있다는 소문이 정말 사실이었어?!”
“말도 안 돼! 어서 슐레히트 님께 연락을 드려야……!”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프리트는 적들을 베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서걱—
그의 날카로운 검 끝에 마족들은 속수무책으로 썰려나갔다.
마족들이 미처 주문을 외기도 전에, 그들의 잘린 팔이 허공 위로 솟구쳤다.
얀피르 역시 반대쪽에서 화염을 내뿜고 마법을 사용하며 공격을 계속했다.
“크아아악-!”
살가죽이 타는 냄새와 마족들의 짙푸른 피가 사방에 뿌려졌다.
프리트가 루헤를 향해 소리쳤다.
“뭐 해, 마왕? 빨리!”
루헤가 결계를 향해 손을 뻗어 주문을 캐스팅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괴수의 아가리처럼 뻐끔거리던 마계의 결계가 완전히 닫혔다.
이제 남은 건 이미 지상으로 기어 나와 있는 마족들뿐이었다.
하지만 어딜 찾아봐도 슐레히트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프리트가 루헤를 향해 소리쳤다.
“뭘 꾸물거리고 있어, 마왕? 여긴 우리한테 맡기고, 어서 가라고!”
“……그럼 부탁하죠.”
그렇게 루헤는 검은 연기가 되어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