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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세신사 영애님-116화 (116/150)

116화.

루헤와의 약속 당일.

산수이는 황태자 접견실에 먼저 도착해 프리트와 루헤를 기다리고 있었다.

‘루헤는 언제쯤 오려나?’

프리트가 루헤의 제안을 쉽게 받아들일 리가 없을 텐데.

자신이 루헤를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아직은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으음……. 일단은 부딪쳐보는 수밖에.’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접견실의 문이 쾅 하고 열리며 화색이 된 프리트가 그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산수이 남작!”

산수이가 재빨리 예를 다해 인사를 올렸다.

“제국의 황태자님을 뵙니다.”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군. 그대가 먼저 날 보자고 이렇게 찾아오다니.”

그는 좋아 죽겠다는 표정을 채 숨기지도 못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산수이의 양심이 콕콕 찔렸다.

‘으윽. 미안해요, 프리트.’

그런 산수이의 속을 알 길 없는 프리트는 그저 싱글벙글할 뿐이었다.

“그래, 어쩐 일로 날 보자고 한 거지?”

“……보자고 한 건 제 쪽입니다, 인간의 황태자.”

그 말과 동시에 루헤가 허공을 찢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

놀란 프리트가 허리춤에서 장검을 꺼내 들고 공격 태세를 갖췄다.

“마왕 네놈이 결국……!”

그러자 산수이가 다급히 프리트를 만류했다.

“저하, 그게 사실은!”

프리트는 제 앞을 막아서는 산수이를 보고 크게 당황했다.

“남작, 설마 지금 저 마왕 놈 편에 서는 거야?”

“일단 제 말 좀 들어보세요!”

하지만 분노로 일그러진 프리트의 눈은 이미 돌아버린 후였다.

그가 루헤를 향해 서슬 퍼런 호통을 내질렀다.

“마왕, 너 대체 산수이 남작에게 무슨 술수를 부린 거지?”

그렇게 장검을 들고 자신에게 덤벼드는 프리트를 향해, 루헤가 재빨리 제 두 손을 번쩍 들어 보였다.

“항복.”

“뭐, 뭣?”

“제가 졌다고요, 인간의 황태자.”

“너 이 자식 지금 무슨 개수작을…….”

그때 산수이가 두 남자 사이를 다시금 막아섰다.

“아 항복했다잖아요, 항복! 일단 말이나 좀 들어봐요, 네?”

***

“평화 협상?!”

그 말을 듣는 프리트의 미간이 심하게 구겨졌다. 그는 제가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들은 건지, 정말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정신이 나간 거야, 남작?”

그가 루헤를 가리키며 외쳤다.

“이자가 누군지 몰라? 마왕이라고!”

“알죠, 알죠.”

“그런데 마왕 놈이 하는 말을 믿어?!”

산수이가 그런 프리트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하께선 그러시면 안 되죠.”

“뭐?”

“저하도 루머에 시달리셨던 적이 있잖아요. 저는 저하를 믿었지만.”

프리트가 피 맛에 미친 놈이라는 소문을 달고 살아가던 시절을 말하는 것이었다.

“큿……!”

“루헤도 알고 보면 좋은 사람…… 아니, 마족이라고요.”

프리트가 답답한 듯 머리를 쓸어 올리며 물었다.

“좋아, 백번 양보해서 이자를 믿는다 쳐. 그렇다고 해도.”

그가 루헤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게 어떻게 ‘평화’적인 협상이지? 마족 놈들을 인간계에 풀어놓는 것밖에 더 돼?”

그러자 루헤가 프리트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전쟁이 일어나는걸요.”

“뭐, 뭣!”

프리트가 테이블을 탕 치며 일어났다.

“지금 날 협박하는 건가, 마왕?!”

산수이 역시 크게 당황했다.

아니 평화 협상을 하겠다며.

근데 다짜고짜 전쟁이라니, 저게 무슨 소리야?

하지만 일단 잠자코 들어보기로 했다.

‘저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겠지.’

루헤가 말을 이었다.

“……과거 마계 대전에선 천족의 참전으로 마족이 패했죠.”

“그래서 패전의 설움이라도 갚겠다는 거야, 지금?”

“이번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천족이 참전할 수 없을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차기 황제가 될 당신도 이미 알고 있겠죠. 탄생과 소멸의 주기에 대해.”

“……설마.”

프리트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

제왕학 시간에 익히 들어서 알고 있던 바였다.

이세계 만물 생사의 흐름에 대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설인 줄만 알았는데.

루헤가 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이 천족 소멸의 주기라는 것이, 마계에 알려졌습니다.”

“……! 하! 정말 돌겠군.”

프리트가 연신 마른세수를 했다.

한편 산수이는 이게 대관절 무슨 소리인지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탄생과…… 뭐? 그게 뭐야?’

프리트가 그녀를 향해 말했다.

“하긴, 남작은 모를 수 있겠군. 이건 황실에만 전해지는 내용이니.”

그렇게 이어진 이세계에 대한 설명은 산수이에게도 충격적이었다.

‘천족도, 마족도 영생을 사는 게 아니라고……? 심지어 천족이 새로 태어나기까지 해?’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만일 지금 전쟁이 일어난다면 천족 중에 참전하게 되는 건……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어린 신들이겠네요?”

프리트가 끄덕였다.

“그래. 그깟 전력으론 턱도 없어. 마족들이 쳐들어오는 즉시 우린 모두 괴멸되고 말 거야.”

프리트가 루헤를 향해 물었다.

“그걸 알고도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 이유가 뭐지? 분명 마계에 유리한 상황일 텐데.”

“말했잖아요, 나는 평화를 원한다고.”

프리트가 어이없다는 웃음을 지었다.

“하! 좋아. 일단 그 말에 대해선 네놈을 믿는다 치자. 하지만 그 후엔?”

프리트가 시퍼런 눈을 치켜뜨고 물었다.

“지상으로 진출한 마족이, 인간에게 위험하지 않을 거란 보장이 있나?”

“그건…….”

그때였다.

루헤가 채 말을 잇기도 전, 갑자기 누군가 접견실로 다급하게 들어왔다.

“황태자 저하!”

“뭐야, 네놈은 노크도 할 줄 몰라?”

“크, 큰일 났습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프리트가 그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야.”

병사가 거의 울먹이며 그에게 아뢰었다.

“그것이, 마계 접경 지역에서……!”

***

마왕성의 회의실 안.

고위 마족들은 슐레히트가 작동시킨 수정 구슬의 영상을 통해 산수이의 꿈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이 놀라움으로 번져갔다.

슐레히트가 이미 악마의 편집으로 재창조한 이 영상에선, 대화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오직 루헤가 산수이 앞에 무릎 꿇고 앉아 그녀의 손을 잡는 장면이 다양한 각도에서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가끔씩 보이는, 사랑에 빠진 듯한 그의 표정도 빼놓지 않고.

“이 무슨……!”

“마왕님이, 인간을 사랑하신단 말인가!”

고위 마족들이 거세게 소리쳤다.

슐레히트는 그때를 놓치지 않았다.

“마왕님께서 인간계와 평화 협상을 하겠다고 선언하신 뒤, 바로 보이신 행보가 바로 저것. 그분은 우리 마족의 안위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으십니다.”

모든 마족이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협상하러 간다더니, 뒤로는 인간과 연애질이나 하고 있었군요.”

“우리의 군주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합니까? 우리 중 그분께 대적할 수 있는 마족이 있기나 해요?”

그러자 슐레히트가 모노클을 빛내며 말했다.

“우리끼리 먼저 선수를 치면 그만입니다.”

“……!”

“지금 전쟁을 일으키자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마족들은 머뭇거리는 눈치였다.

“하, 하지만 조약이……!”

“조약? 하!”

슐레히트가 코웃음을 쳤다.

“오직 인간에게만 유리하게 쓰인, 그 빈껍데기 같은 종이 쪼가리 말입니까? 그 조약 때문에, 우리 마족이 그간 이 어두운 지하 밑에서 어떻게 살아온 것인지 모두 잊은 겁니까?”

맞는 말이었다.

그들 역시 지상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햇빛을 받고, 맑은 물을 마시며 갓 수확한 열매를 맛보고 싶었다.

신선한 공기를 느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반드시 인간계를 거쳐야 했다.

그런 마족들의 마음에 슐레히트가 계속해서 부채질했다.

“압니다. 물론 그가 역대 마왕 중 가장 강력한 마력을 가진 자이긴 하죠. 하지만 그래 봐야 어차피 한 명이 아닙니까……?”

마족들이 외쳐댔다.

“맞아! 마왕이라고 해서 뭐 어쩔 건데. 뭐, 제 종족을 모조리 학살하기라도 할 거야?”

“밀고 나가면 그만이야!”

“우리끼리 뭉치면, 그깟 마왕 한 명쯤 제압하는 건 일도 아냐!”

슐레히트가 손을 들어 보이며 외쳤다.

“그러니 나갑시다, 마족들이여.”

“우와아-!”

“마왕이 자리를 비운 지금. 바로 지금이 기회입니다!”

그렇게.

마계와 인간계를 잇던 경계가 무너졌다.

고위 마족들은 각자 자신들의 일족을 이끌고, 경계를 넘어 전진하기 시작했다.

조약은 깨졌다.

***

병사에게서 보고를 받은 프리트가 놀라 비틀거렸다.

지금 뭐라고? 경계선에서 마족들이 넘어오기 시작했다고?

그가 분노한 표정으로 루헤를 돌아보았다.

“네놈의 계획이 이런 거였나? 어? 평화를 주장하며 뒤통수를 치는 거?”

하지만 루헤 역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슐레히트.”

그놈이 벌인 일이 분명했다.

하지만 갑자기 왜?

마족들의 처지에서도, 피를 흘리지 않는 것이 더 나았을 텐데?

그때 루헤는 얼마 전 산수이의 꿈에 찾아갔던 일을 떠올려냈다.

자신에게 감시가 붙은 이후, 인간계 출입을 삼가며 조심했기 때문에 의심 가는 정황은 그것밖에 없었다.

루헤가 산수이에게 물었다.

“수이, 최근 낯선 자가 찾아온 적이 있었나요?”

“낯선 자요? 딱히…….”

거기까지 말하던 산수이는, 문득 어떤 기억이 떠오를 듯 말 듯 머릿속에서 뿌옇게 아른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꿈을 꾸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 말을 들은 루헤가 산수이의 이마에 손을 얹어보았다.

예상대로였다.

정신계 마법을 주로 사용하는 슐레히트가, 산수이의 기억 속에 다녀간 흔적이 있었다.

“제길……!”

답은 나왔다.

이렇게 된 이상 이미 벌어진 전쟁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한편, 옆에서 가만히 루헤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프리트가 물었다.

“마왕 네놈은 어찌할 생각이지?”

“……?”

“어느 편에 설 것이냐고 묻고 있는 거다.”

프리트가 허리춤의 장검에 손을 올렸다.

“물론 대답 여하에 따라, 여기서 먼저 결판을 볼 수도 있겠지.”

잠시 침묵을 지키던 루헤가 입을 열었다.

“……우선은 먼저 마계의 경계를 닫도록 하죠.”

“그 말은, 인간의 편에 서겠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되나?”

“중립이라고 해두죠.”

“하아…….”

프리트가 제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중얼거렸다.

“여기서 네놈을 순순히 보내주는 게, 과연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지만.”

루헤가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나와 붙으면 죽는 건 당신 쪽일 텐데요, 인간의 황태자.”

“시끄러워, 마왕.”

마침내 결정을 내린 프리트가 루헤를 향해 말했다.

“그럼 마왕, 네놈에겐 마계의 통로 쪽을 맡기도록 하지. 그리고…….”

프리트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산수이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대에겐 내 말을 내어줄 테니 지금부터 뒤도 돌아보지 말고 비덴비덴 남작저로 달려. 가서…….”

잠시 머뭇거리던 프리트가 말을 이었다.

“드래곤 놈을 타고 최대한 멀리 피해있어. 지금 그대를 가장 잘 지킬 수 있는 건, 억울하지만 그놈뿐이니까.”

“그럴 필요 없어.”

그때 갑자기 창문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직접 왔으니까.”

그들이 고개를 들어 바라본 창문 위엔, 다름 아닌 얀피르가 걸터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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