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결국, 서로 마주하고야 만 루헤와 발레아나.
산수이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발레아나에게 물었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고 왔어, 발레아나? 하하하…….”
“다들 너무 바빠 보여서, 일이 끝날 때까지 휴게실에서 언니를 기다릴까 했지. 그런데.”
발레아나가 루헤를 흘긋 보며 수줍게 말을 이었다.
“여기에 손님이 계신 줄은 몰랐네요.”
돌겠네!
발레아나를 보며 산수이가 내적 비명을 질렀다.
그것은 누가 봐도 명백히 사랑에 빠진 소녀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제 산수이는 울며 겨자 먹는 마음으로 두 남녀를 서로에게 소개해 줄 수밖에 없었다.
“이쪽은 발레아나 폰 카데베르, 제국의 황녀님이시고요.”
“바, 반갑습니다.”
발레아나가 루헤를 향해 인사했다.
“그리고 이쪽은 루헤 슈바츠발트. 음, 이분은 그러니까…….”
그를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망설이는 산수이를 보며, 루헤가 대신 말을 이었다.
“멀리 이웃 나라에서 왔답니다, 황녀님.”
그 말을 듣고 산수이가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루헤. 사실 우리 발레아나는 당신이 마왕인 걸 이미 다 알고 있어요…….’
한편 발레아나는 제 맞은편의 루헤를 계속해서 몰래몰래 흘끔 쳐다보고 있었다.
‘아, 역시 너무…… 너무 잘생기셨어.’
꼬마 황녀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고개를 푹 숙였다.
그때였다.
루헤가 크게 하품을 한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전 이만…….”
“버, 벌써 가게요, 루헤?!”
야, 이 자식아. 어차피 둘이 만나버려서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이대로 그냥 가버리면 우리 귀요미가 섭섭해서 울잖아!
산수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필사적으로 루헤의 팔을 잡아끌어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발레아나가 가져온 바구니에서 간식들을 마구 꺼내기 시작했다.
“가, 가더라도 이건 좀 먹어보고 가요! 만들어 온 사람 성의를 생각해야죠!”
루헤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산수이가 꺼내놓는 케이크들을 바라보았다.
“이것들은 대체 뭐…….”
하지만 곧이어 제 코끝을 찌르는 그 단내에,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용암과 핏물만 줄줄 흐르는 마계에서, 이토록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을 본 적이 있던가?
이토록 화려하고 달콤한 향기가 나는 음식을?
루헤는 저도 모르게 케이크에 손을 뻗어 곧바로 입 안으로 가져갔다. 그러자 영혼을 다 녹여버릴 듯 다디단 감각이 혀를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그렇게 눈 깜짝할 새 혼자서 케이크 한 판을 먹어치운 루헤가 뒤늦게 정신을 퍼뜩 차렸다.
‘아차.’
맞은편에서 발레아나 황녀가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단 표정으로 자신을 향해 흐뭇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이 꼬마 인간은 또 뭐야.’
산수이의 지인이라더니, 이 꼬마 역시 어지간히 특이한 인간인 모양이었다.
‘수이는 때 미는 걸 좋아하더니, 이 황녀는 남한테 뭘 먹이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네요.’
뭐 어쨌든.
덕분에 인간계 최상의 음식을 맛본 것 같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이제 배도 불렀겠다, 정말로 이 귀찮을 곳에서 떠나려던 찰나.
산수이가 다시 그의 팔을 잡았다.
“어허! 루헤.”
“?”
“새참을 먹었으면, 일을 해야죠.”
“뭐라…… 고요?”
“먹튀는 절대 안 된다고요.”
그렇게 싱긋 웃는 산수이의 손에 이끌려, 결국 루헤는 건설 현장으로 끌려 나가고 말았다.
물론, 발레아나 역시 간식 바구니를 들고 그 뒤를 쫄쫄 따라갔다.
한편, 창밖의 나무에 앉아 몰래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건.
다름 아닌 꼬마 박쥐, 휴와 듀였다.
“마왕님이 먹은 저거, 맛있어 보여!”
“마계 쿠키랑 다르게 생겼다!”
“냄새도 좋아!”
침을 질질 흘리던 휴와 듀는, 산수이 일행이 나가는 것을 확인한 후 몰래 휴게실 안으로 쪼르르 날아 들어왔다.
그리고 어디 과자 부스러기라도 떨어져 있는 게 없는지 살폈다.
“남은 거 있다!”
“있어!”
그렇게 남아있던 케이크 조각을 정신없이 먹어치우느라, 두 꼬마 박쥐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남몰래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수상한 존재의 낌새를.
절대로 들키지 않을 곳에 숨어있던 그가 작은 소리로 키득거렸다.
“키키키. 우리 마왕님, 아주 재미있는 소풍을 나오셨네요? 키키키.”
***
수도교 건설 현장.
졸지에 산수이의 손에 이끌려 이곳까지 따라오게 된 루헤의 낯빛이 급속도로 안 좋아졌다.
‘귀찮아…….’
산수이는 그에게 그림 한 장을 보여주며, 그 안에 그려진 것들을 죄다 마법으로 만들어내 달라고 했다.
“……이것들은 대체 뭐죠?”
기중기부터 굴삭기, 헤드랜턴에 안전 고깔까지.
도저히 그림만 봐서는 그 괴상한 물건들의 정체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그를 향해 산수이가 하나씩 설명을 이어갔다.
“이건 땅을 팔 때 사용하는 기계인데요, 마력으로 움직이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고요. 또 이건 밤에도 촛불 없이 빛을 내는…….”
“잠깐, 수이.”
루헤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창공을 날아다니는 드래곤 모습의 얀피르를 가리키며 작게 귓속말했다.
아까부터 계속 그를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주시하고 있는 발레아나가 그들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정도의 물건은, 저자의 마력으로도 만들 수 있잖아요.”
“응? 얀피르는 이런 거 만들 줄 모른다던데요?”
“뭐라고요……?”
루헤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을 치며 외쳤다.
“그냥 드래곤도 아니고, 황족이 이걸 못한다고요? 그것도 황태자가?”
그 말에 옆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발레아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드, 드래곤의 황태자라고?! 얀피르 후작이?’
이럴 수가.
진즉 자신의 오라버니에겐 더 이상 기회가 없다는 건 알곤 있었지만.
그래도 얀피르가 드래곤의 황태자이기까지 했다니!
여러모로 제 오라버니가 가엾어지는 발레아나였다.
‘흑. 오라버니, 아무것도 모르고 계실 텐데……!’
그나마 프리트가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구석이라곤, 제국의 황태자라는 지위 밖에는 없었는데!
하지만 제 오라버니를 배신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쓰라리면서도.
‘하아아아…….’
다시 루헤의 얼굴만 봤다 하면 광명을 되찾는 발레아나였다.
‘루헤님은 저토록 아름다우시면서 한 나라의 왕이기까지 하시니, 완전 다 가지셨잖아.’
발레아나가 붉어진 얼굴로 루헤를 바라보았다.
‘대체 언니는 왜 루헤 님같이 완벽한 분을 두고 얀피르 후작을 선택한…… 아니지! 그래서 얼마나 다행이야? 아아, 루헤 니임……!’
발레아나의 눈에서 하트가 차올랐다.
그녀의 머릿속에선 이미 제 오라버니의 이름 세 글자는 지워진 지 오래였다.
한편, 제 앞에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루헤를 향해 산수이가 설명을 이어나갔다.
“으음, 말하자면 복잡한데. 사실 얀피르는 아직 기억을 다 되찾은 게 아니라서요.”
루헤가 그제야 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대체 기억을 잃을 정도로 오래 봉인되어 있던 이유가 뭐라던가요?”
“그게, 본인도 모른대요.”
“하아.”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곤 산수이에게 말했다.
“우선은 보는 눈이 없는 곳으로 가죠.”
***
산수이와 루헤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인적 드문 공터로 향했다.
루헤는 손가락을 한번 가볍게 튕겨 산수이가 필요로 하는 건설 장비들을 손쉽게 만들어냈다.
펑!
그 모습을 본 산수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녀가 신나게 박수를 쳤다.
“우와아-! 역시 대단해요! 앗, 생각해보니 이렇게 공사를 할 게 아니라, 처음부터 루헤한테 수도교를 지어달라고 했어도 되는 거 아닌가……?”
그러자 루헤가 굳은 표정으로 답했다.
“그건 불가능해요.”
“마왕한테도 불가능한 게 있어요? 전 루헤는 마법으로 뭐든 할 수 있는 줄 알았는데.”
“물론 할 수야 있죠. 하지만…… 조약 때문에.”
“조약? 마계와 인간계가 맺은 그 평화 협정이요?”
“네. 당신이 하려는 공사는 지형을 건드리는 거잖아요. 마족은 조약 때문에 인간계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파괴해서는 안 돼요.”
“아…….”
“쯧. 그깟 조약은 왜 맺어 가지고.”
“하지만 그 조약이 없었다면 전쟁은 끝나지 않았을 거잖아요. 루헤는 전쟁이 싫다면서요.”
“싫어하죠.”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평화를 원해요. 수이.”
그랬다. 애초부터 조약 같은 걸 맺을 필요 없이, 그냥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으면 됐을 텐데.
자신의 멍청한 선조들이 귀찮게 일을 벌인 결과였다.
잠자코 그 말을 듣던 산수이가 물었다.
“그럼 루헤가 인간계와 다시 협상을 해 보면 어때요? 난 평화를 원한다, 하고.”
“인간들이 마왕의 말을 믿겠어요?”
그가 산수이에게 제 얼굴을 들이대며 물었다.
“수이부터도, 처음엔 날 무서워했잖아요.”
“아, 그야 그랬지만…….”
“그리고, 귀찮아요.”
루헤가 하품을 크게 하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불가능할 일에, 노력을 쏟는 것 자체가 귀찮다고요.”
그는 잠시 동안 말없이 비덴산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해가 산 너머로 지고 있었다.
마계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장관이었다.
그는 저물어가는 태양 빛을 제 온몸으로 받으며, 한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그때, 루헤의 곁으로 꼬마 박쥐 휴와 듀가 날아왔다.
“마왕님!”
“집에 가자!”
“……그래요.”
그렇게 루헤가 손을 뻗어 휴와 듀를 제 손가락에 앉히려던 찰나.
“……!”
순간 루헤의 적안이 핏빛을 내며 번뜩였다.
곧이어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으며, 그의 몸에서 검은 오라가 뿜어져 나왔다.
그의 손가락으로부터 길게 뻗어 나온 손톱이 순식간에 휴의 등을 날카롭게 찔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산수이와 듀가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꺄아악, 휴!”
“안 돼!”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휴는 미처 제 주인의 손을 피하지도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하지만, 마왕의 날카로운 손톱 끝에 처박혀있는 건.
아주 작은 벼룩 마족이었다.
놀란 휴가 거품을 물고 기절해, 루헤의 커다란 손바닥 위로 툭 하고 떨어졌다.
꼬르륵—
하지만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산수이는 일의 진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재빨리 루헤에게로 달려온 산수이가 그의 손바닥 위에 기절해 누워있는 휴를 빼앗듯 안아 들고는 소리쳤다.
“루헤, 대체 왜 휴를 공격한 거죠?!”
그런 산수이를 보는 루헤의 표정에 잠시 슬픔이 어린 듯했다.
루헤는 제 손톱 끝에 찔려있는 벼룩 마족을 확대하여 땅바닥에 처박아버렸다.
“……!”
그 벼룩 마족은 가슴에 구멍이 크게 뚫린 채 죽어있었다.
루헤가 허탈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거봐, 이러면서 무슨 인간들과 평화 협상을 해 보래요?”
“이, 이건?”
“휴의 등에 있던 벼룩 마족이에요. 누군가 내게 감시를 붙인 모양이네요.”
“아……!”
진실을 알게 된 산수이가 미안한 표정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루헤! 나, 난…….”
하지만 루헤는 쓸쓸한 미소를 지은 채, 산수이의 손등에 작별의 입맞춤을 했다.
“그럼, 공사가 순조롭게 되길 빌어요. 나의 수이.”
“루헤!”
그는 더 이상의 대답 없이 산수이를 제외한 모두를 데리고 검은 연기와 함께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