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카데베르 황궁의 주방 안.
황실의 메인 셰프는 오직 황족들만이 맛볼 수 있는 최고급 간식들을 만들고 있었다.
그의 손에 있던 마지막 체리가 컵케이크 위에 얹어졌다.
곧이어 그가 은으로 된 트레이에 수십 가지의 케이크를 올려 발레아나 공주 앞에 갖다 바쳤다.
“공주마마, 하명하신 케이크를 모두 완성하였습니다. 맛을 한번 봐주시지요.”
발레아나가 우아한 손짓으로 케이크들을 하나씩 맛보기 시작했다.
오물오물—
마침내 모든 케이크를 한입씩 맛본 그녀가 미소 지었다.
“훌륭하구나. 이것들 모두 넉넉히 포장하도록.”
“예, 공주마마.”
얼마 후 공주의 앞에 비단 리본과 레이스로 장식된 초호화 간식 바구니가 놓였다.
‘오늘부터 비덴비덴 남작저에서 본격적인 건설이 시작된다고 했지. 그곳에 우리 오라버니부터 휘온 오빠, 얀피르 후작까지 모두 모여있으니…….’
그녀가 발그레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분명, 루헤 그분도 오시겠지?’
발레아나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산수이는 얀피르와 비밀 연애 중이라 쳐도.
아직 루헤의 마음은 산수이에게 향해있을 거라 확신하는 발레아나였다.
‘그날, 그렇게 뜨거운 눈빛으로 언니를 바라보며 함께 춤을 추셨는데. 당연하겠지.’
가슴은 쓰리지만 어쩔 수 없었다.
루헤가 산수이와 먼저 만난 걸 어떡해.
‘첫사랑은 못 되어도. 끝사랑이 되면 되지!’
발레아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초호화 간식 바구니를 품에 소중히 안은 채 마차에 올라탔다.
***
비덴비덴 남작령의 공사 현장.
휘온의 건설 공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산과 마을 사이에는 굳건한 수도교가 세워지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공사에 필요한 돌을 캐는 데만 몇 달은 걸렸을 일이었다.
하지만 드래곤 성체로 변신한 얀피르의 놀랄만한 완력 덕에 일은 생각보다 더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고.
허가가 필요한 일들 역시 프리트의 한마디면 복잡한 절차가 모두 생략되니.
이 대대적인 공사는 산수이의 예상보다도 더 빨리 끝날 것으로 보였다.
안전모를 쓴 산수이가 건설 현장을 지켜보며 끄덕였다.
“좋아, 다 잘되고 있어!”
“뭐가요?”
갑자기 산수이의 뒤로 한기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놀라 돌아본 곳에는 또다시 검은 연기와 함께 허공에서 나타난 루헤가 서 있었다.
“흐, 흐억! 루헤, 깜짝 놀랐잖아요!”
“뭐가 잘되고 있나요? 수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들던 루헤는, 제 눈앞에 있는 공사판을 보자 그대로 딱 굳어버렸다.
‘저, 저건.’
얽히는 즉시 매우 귀찮아질 것으로 예상되는, 참혹한 땀의 현장이 아닌가.
‘……하아.’
산수이가 그 세 남자와 주고받고 있다는 대화가, 고작 이 교량 건설에 관한 것이었나.
루헤의 흥미가 급속도로 떨어져갔다.
그는 어서 이 귀찮은 일에 말려들기 전에 여길 떠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나중에 다시 찾아올게요, 수이. 그럼 전 이만.”
그렇게 루헤는 서둘러 검은 연기 속으로 사라지려고 했다.
하지만.
탁-!
루헤가 사라지기 전에 산수이가 먼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요, 루헤.”
“…….”
“저랑 얘기 좀 하죠.”
***
공사 현장 근처에 마련되어있는 간이 휴게실.
산수이는 루헤와 함께 마주 앉아있었다.
“저, 그…… 루헤.”
루헤가 하품을 크게 하며 말했다.
“제 이름만 벌써 다섯 번째 부르고 있어요, 수이.”
그랬다.
산수이는 너무나 뻘쭘했던 나머지, 당최 이 얘기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 계속 망설이고 있었다.
바로, 사랑과 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말이다.
자신의 의자매, 귀엽고 사랑스러운 발레아나의 충격적인 고백을 들었던 그 순간부터.
언젠가 한 번은 루헤를 만나 이 주제에 관해 대화를 나눠봐야겠다고 생각하곤 있었다.
물론 자신의 손으로 발레아나를 루헤에게 소개해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그랬다간, 프리트가 전쟁을 일으킬 거야…….’
하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모르니까.
‘그래도 명색이 의자매인데. 내 동생이 좋아한다는 남자가 어떤 놈인지는 언니인 내가 미리 알고 있어야겠지?’
적어도 그가 가진 연애나 결혼에 대한 가치관 정도는 말이다.
물론 루헤마저 자신을 좋아하리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고 있는 산수이였다.
그의 추근거림은 그저 마족 특유의 장난이라 치부하고 있던 그녀였으니까.
“사실, 제가 루헤한테 궁금한 게 있어요.”
“저한테요?”
이 인간 여자가 웬일이지.
목욕탕이나 남작령이 아니라, 자신에게 관심을 보인 것은 오늘이 처음 아니었던가?
루헤의 눈이 호기심으로 새빨갛게 빛났다.
“흐응. 그게 뭘지, 제가 더 궁금해지는걸요.”
“저, 루헤. 그러니까…….”
마침내 산수이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마족들도 사랑을 하나요?”
“네……?”
그 말을 들은 루헤는 깜짝 놀랐다.
뭐, 지금 뭘 하냐고?
당황한 루헤 앞에 산수이가 되물었다.
“사랑이나 연애. 마족들도 그런 걸 하는지 알고 싶어요.”
하! 사랑이라니.
우습지도 않은 얘기였다. 마족에게 사랑?
마족에게 있어서 남녀관계란, 그저 욕망하고, 소유하다 질릴 때쯤 버리면 그만일 뿐.
제 아비와 어미도, 저를 낳고 난 후엔 계속해서 다른 짝을 찾아 나서지 않았던가?
그 질문을 들은 루헤는 속으로 웃음이 났다.
‘마족에게 사랑이라니. 이런 어이없는 질문은 지루했던 인생을 통틀어 봐도 오늘 처음 듣네요.’
하지만 거기까지 생각하던 루헤는, 문득 이 질문에 담긴 숨은 의미를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설마 수이가 나를……?’
아니면 내가 자신을 사랑하길 바라나?
그렇지 않으면 갑작스럽게 이런 질문을 왜 하겠는가.
그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 인간 여자에 대한 내 감정은, 뭐지?’
소유욕 아니었던가?
혹은 위험한 욕망.
그녀가 자신의 때를 밀어준 후부터,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어서 이곳 남작령을 제집처럼 드나들질 않았나.
할 수만 있다면 그녀를 곧바로 마왕성으로 데려가, 매일 제 옆에서 때를 밀게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지?
왜 미혹술로 이 인간 여자를 유혹하지 않았지?
‘그야…….’
인간의 의지가 남아 있는, 저 또렷한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봐 주는 것이 좋아서였다.
제가 만든 마리오네트처럼, 초점 없는 눈으로 제 발에 키스하는 존재로는 만들고 싶지 않아서.
영혼이 없는 표정의 그녀가 제 발밑에 엎드려 입을 맞추는 상상을 하자.
이상하게도 즐겁다기보단 오히려 불쾌해졌다.
그렇다면 이 감정은 대체 뭐지?
그렇게 혼란에 빠진 루헤가 제 머리를 부여잡았다.
내가.
마계의 대마왕인 이 루헤 슈바츠발트가 설마.
이 작은 인간 여자를 아끼는가?
사랑하는가?
루헤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를 지켜보던 산수이는 점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뭐지, 왜 저렇게 표정이 안 좋지?’
혹시 마계는 뭐 일부다처제라든가, 플라토닉 러브는 전혀 없이 에로스만 즐긴다든가?!
‘으음, 만일 그렇다면 우리 귀요미는 절대 당신에게 보내줄 수 없어요, 루헤.’
그렇게 산수이가 오해의 꽃을 피우고 있던 사이.
마침내 루헤가 입을 열었다.
“사랑…… 이 뭐죠?”
“네?”
“인간들이 말하는 사랑이란 무엇인지 묻는 겁니다. 수이.”
“어…….”
혹시, 마계에는 사랑이라는 개념이 없나?
이건 생각보다 문제가 더 심각했다.
‘아냐, 그냥 단순히 사용하는 단어가 다른 걸 수도 있잖아?’
“으음. 그러니까 사랑은 말이죠.”
그래서 산수이는 루헤에게 사랑의 정의에 대해 설명했다.
“상대가 계속해서 생각나고, 보고 싶고.”
“…….”
“그 모습 그대로가 좋고. 잘해주고, 아끼고 싶고?”
“……!”
“음, 또…… 계속 곁에 있고 싶고. 마, 만지고 싶고? 그런 거 아닐까요? 하하하.”
마지막에 만지고 싶다는 소린 뺄 걸 하고 생각한 산수이였다.
‘으으. 또 얀피르의 입술이 생각나서 그만.’
산수이의 얼굴이 터질 듯 빨개졌다.
한편 그 붉어진 얼굴을 본 루헤는 머릿속에 천둥 번개가 내리꽂히는 것만 같았다.
이럴 수가.
그럼, 지금 제가 산수이에게 가지고 있는 이 마음이.
‘사랑이란 말인가?!’
마족인 제가? 인간을 사랑한다는 건가!
그럴 리가 없었다.
정말 그럴 리가 없는데.
하지만.
루헤의 머릿속에 그동안의 제 모습이 떠올랐다.
자꾸만 남작령에 가서 산수이를 다시 보고 싶고. 그녀가 무얼 하나 궁금해서 꼬마 박쥐들을 옆에 붙이고.
그녀 자체라는 존재를 잃고 싶지 않아서 미혹술도, 마계로의 텔레포트도 행하지 않았고.
하지만 산수이를 마왕성의 안주인으로 만들어 제 곁에 두고 싶은 마음은 점점 커져만 갔었지.
그래, 그건 누가 봐도.
사랑이었다.
‘이런 제기랄!’
사랑이라니, 연심이라니!
마왕인 제게, 이것은 치명적인 약점이 될 터였다.
당장에라도 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는 이 인간 여자를 보지 말아야 맞는 것이다.
아니, 훗날 문제가 되지 못하도록 아예 죽여 없애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루헤, 괜찮아요? 갑자기 표정이 너무 안 좋은데.”
저 자수정 같은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도저히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래서인지, 결국 저도 모르게 이렇게 대답하고 말았다.
“사랑…… 하는 것 같군요.”
“!”
아, 마족들도 사랑을 하는구나!
루헤의 대답을 들은 산수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랬구나, 내가 또 종족 차별을 할 뻔했구나!
마족은 다 얼음처럼 차가운 심장을 가진 건 줄 알았지 뭐야.
‘어휴, 루헤가 그렇게 부탁을 했는데도 또 종족 차별하고 있었어. 나 좀 봐, 반성하자.’
산수이가 웃으며 다음 질문을 이어갔다.
“그럼, 마족들도 인간들처럼 결혼이라는 걸 하나요?”
뭐!?
이 작은 인간은 왜 이렇게 거침이 없지? 아니, 지금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 줄이나 알고 저러는 건가?
‘나를 이렇게까지 당황시키다니. 수이, 당신이란 인간도 참…….’
루헤가 답했다.
“그 주제에 대해선, 오히려 제가 묻고 싶군요.”
“네?”
“수이는 결혼이 하고 싶나요?”
음? 갑자기 저런 걸 왜 물어보지?
‘루헤도 결혼에 대한 인간들의 의견이 궁금한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산수이가 입을 열었다.
“으음……. 물론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전 지금 하라면 싫어요. 아! 그렇다고 비혼주의인 건 아니지만.”
“어째서죠?”
“지금은 일에 집중해야 하니까요.”
그러니까, 지금은 일이 바쁘니 공사가 끝나면 결혼하자는 소리인가?
‘이 인간은 대체……? 정말 마왕인 나와 결혼할 참인가?’
그렇게 루헤의 머릿속에 잘못된 오해가 자라나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휴게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더니,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어, 언니?”
“발레아나?”
그것은 눈이 부시게 화려한 간식 바구니를 든, 발레아나 공주였다.
“바, 발레아나. 여긴 어쩐 일로?”
“간식을 좀 들고 왔어, 언니. 그런데…….”
아, 이런.
산수이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이 문제의 두 남녀를 결국 제 손으로 마주치게 하고 만 것이다.
꿈에도 그리던 루헤의 뒷모습을 발견한 발레아나의 손에서 바구니가 툭 하고 떨어졌다.
“아, 아……!”
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마침내 루헤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 얼굴을 본 발레아나는 맥없이 비틀거리다, 그만 루헤 쪽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
루헤가 제 단단한 팔로 발레아나를 가볍게 붙잡으며 그 치명적인 미소를 흘렸다.
“조심해야죠, 레이디.”
찌르르하게 온몸을 타고 도는 그 매혹적인 페로몬에, 발레아나는 더욱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둘을 바라보던 산수이가 프리트를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이것만 알아줘요, 프리트. 난 최선을 다했다는 걸.’
그렇게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터라, 이들 중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몰래 창밖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누군가의 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