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루헤의 정체가 대마왕이라는 말에 발레아나는 일전에 프리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산수이를 노리는 경쟁자가 한 명 더 나타났다, 발레아나. 게다가 그자의 정체는…… 마왕이다.]
그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이, 이국의 왕자님이, 그 마왕이라는 자였어?!’
게다가 이제야 생각이 났다.
자신이 산수이와 얀피르의 연애를 지지하겠다 선언하며, 까맣게 잊고 있던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 오라버니……!’
프리트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완전히 잊고 있었어! 산수이 언니가 얀피르 후작과 비밀 연애를 한다면, 우리 오빠는 어떻게 되는 거야?’
참으로 일찍도 기억해 낸 사실이었다.
발레아나가 참담한 심경으로 제 머리를 쥐어 잡았다.
하지만.
‘그런데, 그런데도 루헤 그분의 얼굴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아. 나 진짜 미쳤나 봐…….’
첫사랑의 열병이란 참으로 지독한 것이었다.
자꾸만 그날의 루헤가 떠올랐다.
그 아름다운 얼굴과 신비한 눈동자 색.
걸음걸이마저 기품이 넘치던 고운 자태.
제 심장에 사랑의 화살을 쏘아버린 그 천사의 미소.
마족이니, 마왕이니 해도 발레아나의 머릿속엔 여전히 루헤만이 가득했다.
‘오라버니, 아바마마 죄송해요! 하지만 저 이 마음을 멈출 수가 없어요. 아무래도 저, 금단의 사랑에 빠진 것 같아요…….’
발레아나가 산수이에게 입을 열었다.
“저기, 언니? 내가 오라버니께 듣기로는 루헤 그분께서 조약을 깨지는 않으셨다고 하던데.”
인간을 해친 적은 없지 않냐는 질문이었다.
산수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지? 적어도 내가 알기론 루헤는 인간계에 목욕을 하러 왔을 뿐이라고 했으니까?”
역시.
발레아나의 눈빛이 확신으로 가득 물들었다.
‘그저 목욕을 즐기러 인간계에 오신 거라니, 취미도 어쩜 저리 고상하시지……? 아무리 마왕이라 해도 저런 분이 나쁜 짓을 저지르실 리가 없어! 아마 풀 한 포기조차 함부로 밟지 못하는 분이실 거라고!’
그렇게 루헤의 정체를 알고 나서도 여전히 붉게 물들어있는 발레아나의 양쪽 볼따구니를 보며, 산수이는 아차 싶었다.
‘아, 이런 젠장? 나 방금 말실수한 거 같은데?’
산수이가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얀피르에게 속삭였다.
“어떡하지?”
“저렇게 좋다는데 뭘 어떡해? 사랑이 죄야?”
얀피르가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제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주인 너도 드래곤 좋아하잖아.”
“…….”
그러고는 산수이의 손에 다시 한 번 깍지를 낀 뒤,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씩 웃었다.
맞은편에서 그들을 바라보던 발레아나의 두 볼이 더욱더 발그레해졌다.
‘아아, 너무 아름다워. 나도 언젠가는 루헤 님과 함께 저렇게 종족을 뛰어넘는 불멸의 사랑을……!’
발레아나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그런 발레아나를 바라보며 산수이는 속으로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쉴 뿐이었다.
‘내가 고작 루헤가 마족이라서, 대마왕이라서 이러는 게 아냐.’
산수이가 제 앞에 앉은 의자매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저 터질듯한 볼따구니, 순진무구한 눈망울,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저 인형 같은 얼굴을 좀 보라고.
‘우리 귀요미를 데려갈 남자는 잘생기기만 해선 절대 안 돼. 얼굴 뜯어먹고 살 거 아니잖아? 적어도 맨날 나무늘보처럼 늘어져서 잠만 자는 놈은 아니어야 한다고!’
***
물론 대마왕씩이나 되는 자가 맨날 늘어져있기만 한 건 아니었다.
그저 열심히 일하는 나날이 손에 꼽도록 적을 뿐.
사각—
루헤는 슐레히트가 남겨놓고 간 정무를 빛의 속도로 해치워나가고 있었다.
‘빨리 끝내야 오랫동안 방해받지 않고 잘 수 있으니까요……, 하암.’
슐레히트는 그에게 한 시간을 던져주고 갔지만, 루헤가 그 모든 서류들을 읽고 처리하는 데는 불과 20분의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마지막 서류 한 장만을 남기고 말이다.
그 서류를 읽어보던 루헤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갔다.
“……다시 자긴 글렀네요.”
그가 서늘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한편 루헤가 일을 마치길 기다리고 있던 슐레히트는, 정확히 약속된 한 시간이 지난 후 다시 첨탑 위로 향했다.
또 보나 마나 일을 마치자마자 잠이 들었겠지.
안 봐도 뻔하다 생각하며, 그가 긴 한숨을 내쉬고 첨탑 방의 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자신을 기다리는 루헤가 있었다.
예상외의 광경에 슐레히트는 깜짝 놀랐다.
“마, 마왕님? 아니, 내일은 해가 마계에서 뜨려나 봅니다?”
평소대로였다면 루헤는 슐레히트가 뭐라 지껄이든, 그에게 서류를 대충 넘겨주고 다시 빠르게 잠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루헤는 보통 때와는 달랐다.
그가 또렷한 눈빛으로 슐레히트를 응시하며 말했다.
“슐레히트.”
루헤가 그를 향해 자신이 유일하게 결재하지 않은 서류 한 장을 들어 보였다.
“……이게 뭐죠?”
그 마지막 서류의 내용을 확인한 슐레히트가 입을 열었다.
“보시다시피 국방 예산 확대에 관한 것입니다만.”
“그걸 몰라서 묻는 게 아닌데요.”
루헤가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걸 왜 늘려야 하느냐고.”
그 말과 동시에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을 듯이 차갑게 변해갔다.
슐레히트는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제 목을 조이듯 숨 막히게 짓누르는 위압감 때문에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그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최근 결계 쪽에서 인간계의 수상한 움직임이 감지되었…….”
“그 수상한 움직임은.”
슐레히트의 말을 자르며 루헤가 대신 말을 이었다.
“암시장에 관한 것이란 거, 그대도 잘 알고 있을 텐데요?”
“그렇다 해도 만일을 대비해서 미리 준비해놓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대비? 그것도 고작 인간계에?”
루헤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슐레히트, 원래 이렇게 겁이 많았던가요? 아니면…….”
순간 루헤의 입가에 미소가 싹 사라졌다.
그가 슐레히트를 섬뜩하게 바라보았다.
“혹시,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
평소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루헤의 반응에 슐레히트는 적잖이 당황했다.
제가 무슨 서류를 가져다주든, 귀찮다며 대충 서명을 휘갈기던 게 저 루헤라는 작자 아니었나.
‘여태 그 서류들을 제대로 다 읽고 있었다는 건가.’
예상외였다.
“다른 뜻은 없습니다. 국방 예산은 선대 마왕님 때부터 꾸준히 늘려오고 있었던 것이니까요.”
“난 선대 마왕이 아니에요, 슐레히트.”
슐레히트를 바라보는 루헤의 눈동자가 검붉은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슐레히트 역시 지지 않았다.
“안 그래도 언젠가는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이렇게 자꾸 국방 예산을 다른 곳으로 분산시키시면 곤란합니다. 아무리 세월이 오래 지났다 한들, 지금은 휴전 상태일 뿐이란 걸 잊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내 말이 그 말이에요. 대체 휴전 상태인데 군사력을 왜 보강해야 된다는 거죠? 방어력을 키우기 위해서라면.”
루헤가 손가락으로 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있는데, 굳이 왜?”
그러자 슐레히트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강하다 하신들, 마왕님 한 분으로 이 마계 전체를 지킬 수는 없습니다!”
“그게 뭐가 어렵다는 거죠? 전쟁만 다시 일어나지 않으면 될 일을.”
“……!”
그 말에 슐레히트의 눈빛이 묘하게 흔들렸다.
루헤는 더 말하기도 귀찮다는 듯, 서명하지 않은 마지막 서류를 더미 위에 올려두었다.
“아무튼, 난 더 자야겠으니 이만 나가 주세요.”
“……결재해 주십시오.”
“하아……?”
루헤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슐레히트를 바라보았다.
“마계를 지키는 것은 마왕의 의무입니다. 부디 제왕의 본분을 다해 주십시오.”
“여태 뭐 들었죠? 이 마계를 지키는 건, 내 마력 하나로도 충분하다니까?”
“결재를……!”
콰앙-!
순간 요란한 소리와 함께 슐레히트의 몸이 붕 날아올라 반대편 벽에 처박혔다.
벽면 한쪽이 반쯤 무너지고, 파편들이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커, 커헉!”
그를 향해 손가락을 내뻗고 있는 루헤의 표정에는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곧이어 그가 제 검지 손가락을 위로 들어 올렸다.
그러자 슐레히트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라 루헤의 앞까지 이동했다.
이어서 루헤가 손가락을 아래로 내리자 슐레히트의 몸이 고꾸라져 떨어졌다.
피투성이가 된 슐레히트가 바닥에 처박혀 고통스럽게 부들댔다.
그의 사지는 이미 뒤틀려있었다.
어느새 욕조에서 나온 루헤가 그를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슐레히트의 몸에 났던 상처들이 순식간에 멀쩡하게 회복되었다.
슐레히트는 이 모든 상황에 너무 놀라 말조차 잇지 못했다.
루헤가 그를 향해 서늘하게 경고했다.
“쓸데없이 군사력을 뭐하러 보강해요, 이렇게 하면 되는데. 귀찮게 하는 놈들은 혼을 내 주고, 우리 편은 낫게 해 주고. 그쵸?”
“크읏……!”
“그러니까, 같은 말을 두 번 하지 않게 해줬으면 좋겠어요. 나, 그거 무척 싫어하거든.”
그가 슐레히트를 향해 싱긋 웃었다.
그렇게 슐레히트는 채 결재되지 않은 서류를 들고 방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쾅.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는 슐레히트의 표정이 잔뜩 구겨졌다.
곧이어 제 집무실에 도착한 슐레히트.
그가 입술을 잘근 깨물며 받아온 서류들을 책상 위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서류의 일부가 옆으로 쏟아졌다.
그때, 바람에 날리는 서류 사이로 그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이건……?’
겹겹이 쌓여있는 서류 사이에 낯선 동물의 털 한 가닥이 끼어있었다.
마왕성 안에 수많은 수인 마족들이 근무하고 있지만, 이런 종류의 털은 흔치 않은 것이었다.
그건, 멀리 동굴 안에서나 서식하고 있는 하급 박쥐 마족의 것이었으니까.
***
발레아나는 자신의 응접실을 나서려는 산수이와 얀피르에게 부탁하고 또 부탁했다.
“제가 루헤 님을 좋아하고 있다는 거, 우리 오라버니께는 꼭 비밀로 해 주셔야 해요, 네?”
“당연하지, 발레아나.”
굳이 저렇게 부탁하지 않아도 비밀은 지킬 생각이었다.
제 하나뿐인 여동생이 마왕을 좋아하게 됐다는 걸 알면, 프리트가 가만히 있겠냐고.
하지만.
“그렇지만 발레아나, 미안하지만 네 두 번째 부탁은 들어줄 수 없어.”
“왜요!”
발레아나가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애원하기 시작했다.
“언니 제발! 루헤 그분을 꼭 한 번만 더 만나 뵙고 싶단 말이야!”
“인간계와 마계 간에 맺은 협정, 너도 잘 알잖아.”
“루헤 그분이 인간을 해치셨어? 아니잖아!”
“그건 아니지만, 네가 대마왕과 만난다는 사실이 알려져 봐. 황제 폐하나 황태자 저하께서 가만히 있으시겠어?”
얀피르 역시 끄덕였다.
“프리트 그놈이라면, 아마 마계와의 전쟁이라도 불사르겠지.”
아아.
어째서 자신의 사랑은 이렇게나 가련할까.
발레아나는 소설 속 비련의 여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맞아. 황녀의 몸으로 제국에 해를 끼쳐서는 안 되는 법.’
그렇게 발레아나는 눈물을 머금고 제 마음을 억지로 추슬러야 했다.
“……두 분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제가 시간을 너무 뺏었던 것 같네요.”
“시간을 뺏다니? 그렇지 않…….”
산수이는 그제야 자신이 왜 이곳 황궁에 방문했었는지를 기억해 냈다.
‘아, 맞다.’
발레아나한테 얀피르와의 비밀 연애를 들켜서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가 들고 온 서류 봉투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일에 대한 걸 잊어버리다니, 내가!
비밀 연애를 해도 이 정도인데, 공개 연애를 했다간 진짜…….
산수이가 원망스러운 듯 얀피르를 한번 째려보았다.
하지만 얀피르는 그녀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여유만만한 모습이었다.
그가 산수이를 향해 씩 웃으며 눈썹을 추켜올려 보였다.
‘에휴, 이게 다 내 죄지 누굴 탓해…….’
산수이는 허망한 표정으로 제 옆에 놓인 서류 봉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발레아나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
“근데 그건 뭐야, 언니?”
“응, 이건 말이지…….”
산수이가 신규 사업 기획서를 집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