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발레아나 공주는 산수이가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황궁을 방문할 거란 소식을 우연히 전해 듣게 되었다.
‘산수이 언니가 여기 온다고?’
발레아나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이유에서였다.
예전 같았다면 냉큼 프리트에게로 달려갔을 것이다.
어서 함께 산수이를 맞이할 준비를 하자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발레아나가 산수이를 만나고 싶은 이유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발레아나의 목적은 이제 더 이상 프리트와 산수이의 결혼이 아니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한 사람에 대한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었으니까.
일전의 무도회에서 마주쳤던 아름다운 이국의 왕자님 말이다.
하지만 그간 아무리 노력해봐도, 그를 알고 있다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젠 정말 언니밖엔 없어. 나에게 그 이국의 왕자님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물론 지난번 무도회의 정황상, 그 이국의 왕자님은 산수이를 마음에 두고 있는 듯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확인이 필요했다.
그가 정말로 산수이의 정인인지, 아닌지.
‘그리고…… 그분의 신분이 정말 이국의 왕자님이 맞는지 말이야.’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산수이를 맞이하기 위해 한참 전부터 정원을 서성이던 발레아나.
그런데, 발레아나는 그만 깜짝 놀랄만한 광경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바람도 전혀 불지 않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미로 정원이 한참 동안이나 들썩이더니.
그 덤불 안에서 갑자기 산수이와 얀피르가 기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머리를 산발하고, 마치 새 둥지가 된 양 온몸에 갖은 잎사귀들을 붙인 채.
“사, 산수이 언니? 그리고…… 얀피르 후작?!”
만일 그게 끝이었다면 아마 발레아나의 망상이 그토록 길게 가지를 뻗어나가진 않았을 것이다.
예상치 못하게 발레아나와 마주친 얀피르가 깜짝 놀라 산수이를 돌아보았다.
“……!”
산수이의 상태를 확인한 얀피르가 이내 작게 쪼그라든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주인, 미안.”
그러고는 제 옷 소매로 산수이의 입가에 번진 립스틱 자국을 슥 닦아주었다.
“우리…… 들켰네?”
***
발레아나 공주의 개인 응접실.
아까 미로 정원에서 목도했던 상황만으로도 충분히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는데.
조금 전 산수이가 제게 직접 털어놓은 얘기까지 듣게 된 발레아나는 너무 당황해 제가 들고 있던 찻잔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니까. 저, 정말 언니와 얀피르 후작이 정식으로…….”
그러자 맞은편에 앉아있던 얀피르가 산수이의 손에 깍지를 끼우곤 위로 번쩍 들어 보였다.
“그래, 황녀. 나 이제 주인 거야.”
하지만 산수이가 그 깍지 낀 손을 재빨리 풀어버렸다.
휙—
이에 바로 풀이 죽어버린 얀피르가 산수이를 향해 중얼거렸다.
“히잉. 왜 풀어, 주인.”
“공주님 앞에서 이러면 어떡해!”
“뭐 어때? 아까 이미 더한 것도 들켰는데.”
그래, 들켰지.
그것도 아주 화끈하게 들켜버렸지!
내가 그래서, 그렇게 조심하자고 했는데!
하지만 누굴 원망하랴.
아까 그 덤불 속에서 얀피르를 차마 거절하지 못했던 것은 다름 아닌 저였던 것을.
한편 산수이 앞에서 한 마리 강아지처럼 치근거리는 얀피르를 본 발레아나는 점점 더 놀라 기절할 지경이었다.
‘저게 예전의 무서웠던 얀피르 후작이라고? 집채만 한 드래곤으로 변신하는 그 사람 진짜 맞아?!’
그렇게 입을 다물 줄 모르는 발레아나를 보며, 산수이가 멋쩍은 듯 말했다.
“많이 놀랐지, 발레아나? 미리 말 못 해줘서 미안해. 당분간은 모두에게 비밀로 하고, 사업에만 집중하고 싶어서 그만.”
“그, 그럼 지금 둘이서 비밀 연애를 하고 있는 거야, 언니?”
“어, 그렇…… 지? 하하.”
비밀 연애라니.
그 단어를 내뱉으며, 열네 살 소녀의 가슴에 불꽃이 타올랐다.
‘너, 너무 낭만적이잖아!’
순간 발레아나의 머릿속에 수만 가지 장면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비밀스러운 고백, 몰래 주고받는 연서, 밀회…… 그리고.
이어서 발레아나의 눈에 얀피르의 소매 끝자락에 묻어있는 산수이의 붉은 립스틱 자국이 들어왔다.
그리고 역시 마지막은 은밀한 곳에서 몰래 하는 첫 키…….
물론 그 상상 속 주인공의 얼굴은 오직 한 인물이었다.
‘이국의 왕자님……!’
그 아름다운 분과 비밀스럽게라도 좋으니 연애를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제야 발레아나는 아까 자신이 열심히 산수이를 찾아다니던 이유를 기억해냈다.
‘맞아, 그 왕자님의 정보를 언니한테 물어봐야 해!’
게다가.
산수이가 얀피르와 연애 중이라면 이제 모든 것이 확실해졌으니까.
‘그 이국의 왕자님은, 언니의 정인이 아니었던 거야!’
발레아나의 가슴이 기쁨으로 가득 차 세차게 뛰었다.
뭔가 엄청나게 중요한 다른 무언가를 잊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상관없었다.
지금 발레아나에게 가장 중요한 건 따로 있었으니까.
“언니, 연애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나 실은 언니한테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그게 뭔데?”
발레아나가 산수이를 향해 제 깊고 푸른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물었다.
“나한테 그 이국의 왕자님에 대해 알려주면 안 돼?”
“이…… 국의 왕자님?”
산수이는 발레아나가 대체 누굴 말하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게 누군데?”
“아이 왜, 지난번 무도회에서 언니랑 가장 먼저 춤을 췄던, 그 긴 머리의 아름다우신 분 있잖아…….”
그 얘기를 하는 발레아나의 얼굴이 수줍게 붉어졌다.
“나랑 가장 먼저 춤을 췄던 긴 머리……? 자, 잠깐! 발레아나 너 지금 뭐라고?!”
그러니까 지금.
루헤, 그러니까 대마왕보고 이국의 왕자님이라고?
그러자 여태껏 잠자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얀피르가 제 이마를 탁 치며 중얼거렸다.
“맙소사.”
하지만 발레아나는 그들이 이렇게 반응하는 이유를 전혀 알 길이 없었다.
그녀가 산수이와 얀피르를 번갈아 쳐다보며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왜요? 아. 설마 그분, 왕족이 아니신가요?”
산수이가 곤란한 표정으로 발레아나에게 말했다.
“저기…… 발레아나? 혈통과는 상관없이, 그냥 그분께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얀피르도 옆에서 거들었다.
“그래, 황녀. 그놈은 정말 아니야.”
하지만 발레아나는 단호했다.
“어떻게……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닌 두 분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수가 있어요? 사랑은 종족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걸, 몸소 보여주셨잖아요!”
당황한 산수이가 서둘러 말했다.
“아니, 발레아나? 그러니까 내 말을 좀.”
하지만 발레아나는 막무가내였다.
탕-!
그녀가 테이블 위를 내려치며 제 의지를 굳건히 밝혔다.
“상관없어요! 설령 그분이 왕족은커녕 귀족이 아니라 해도 괜찮다고요. 사랑은, 사랑은……! 국경과 신분도 뛰어넘을 수 있는 그런 숭고한 거니까요!”
으아악.
산수이는 참담했다.
‘이럴 수가. 우리 귀요미 발레아나가, 빠져도 하필 마왕한테 빠지면 어쩌자는 거야-!’
미치겠네.
대체 루헤의 정체에 대해서 발레아나한테 말해줘야 해, 말아야 해?
하지만 산수이가 더 고민하기도 전, 얀피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봐, 황녀. 그놈이 정말 그렇게 좋아?”
발레아나가 달아오른 얼굴을 푹 숙이며 말했다.
“네. 그분을 처음 본 날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잊을 수가 없었는걸요.”
잠시 생각에 잠기던 얀피르가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그놈에 대해서 말해줄 테니까, 대신 주인이랑 내 비밀 연애에 협조하는 건 어때?”
“얀피르, 안 돼!”
산수이가 그를 말렸지만, 얀피르 역시 단호했다.
“주인, 황녀가 애도 아닌데 알 건 알아야지. 무조건 막는다고 능사가 아냐.”
“하지만……!”
얀피르가 산수이에게 제 얼굴을 들이대며 덧붙였다.
“사랑하는 마음이, 어디 막는다고 막아져?”
윽.
내가 자기 얼굴에 약한 걸 알고 저러는 거지 지금?
그런 산수이를 보고 얀피르가 키득대며 말을 이었다.
“난 안 막아지던데.”
으으.
산수이는 일전에 얀피르한테 자기 얼굴이 예뻐서 좋아한 거냐고 따져 물었던 것이 떠올라 몹시 부끄러워졌다.
‘얼빠는 나잖아.’
결국 산수이는 얀피르의 얼굴에 넘어가…… 아니, 그의 의견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대신, 우리 발레아나 너무 놀라지 않게 살살 말해.”
“맡겨 둬.”
앞에서 이 모든 얘기를 듣고 있던 발레아나 공주는 점점 더 몸이 달았다.
대체 그분의 정체가 뭔데 언니랑 얀피르 후작이 저렇게까지 반응하는 거지?
이제 발레아나는 사랑의 감정을 넘어서 호기심이 일 지경이었다.
어떻게든 알아야겠다. 그분이 대체 누구인지.
발레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녀의 이름을 걸고 약속드리죠. 두 분이 먼저 공개 연애를 하실 때까지 저는 절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그저 뒤에서 두 분의 사랑을 지지하겠습니다.”
“좋아.”
얀피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심각한 표정으로 깍지 낀 제 두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황녀, 이 대륙에 살고 있는 다양한 종족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어?”
“다양한 종족이요?”
발레아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했다.
“그야 저희 인간과, 얀피르 후작과 같은 드래곤족도 있고, 천족이랑, 그리고 또…….”
발레아나가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위험천만한 마족들도 있고요. 그런데 제게 이런 걸 물으시는 걸 보니, 역시 그분의 정체는.”
발레아나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천족이군요?!”
내 그럴 줄 알았어!
그렇게 고결하게 아름다운 분이 평범한 인간이었을 리 없어!
역시 그분은 천족이야, 하늘에서 내려온 날개 잃은 천사라고!
그 말을 들은 산수이는 그냥 이제 망했다는 표정으로, 될 대로 되라며 의자 뒤로 벌러덩 누워버렸다.
얀피르가 고개를 저었다.
“틀렸어.”
“트, 틀렸다고요? 그럼?”
“일단, 그자의 이름은 루헤 슈바츠발트.”
루헤…… 어쩜 이름조차 멋있었다.
발레아나가 얼굴을 붉히며 얀피르에게 물었다.
“설마 루헤 님은 얀피르 후작처럼 드래곤이신 건가요?”
그 말을 들은 얀피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런 건 말이라도 삼가 줘, 황녀. 그자는 내 동족들을 학살한 이들과 같은 족속이니까.”
“학살…… 예?”
그 말을 들은 발레아나의 얼굴에서 핏기가 삭 가셨다.
그렇다면, 그런 거라면 남은 종족은 단 하나뿐 아닌가.
“그럼 설마…… 마족?”
얀피르가 끄덕이며 덧붙였다.
“뭐, 그래도 왕족이라고 볼 수는 있겠네. 그냥 마족이 아니라 마왕이니까 말이야.”
발레아나의 머리가 핑핑 돌았다.
이게 다 무슨 소리야.
어떻게 그 선량한 얼굴이 마족, 그것도…….
‘대, 대마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