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며칠 전.
집사는 결재가 필요한 서류를 들고 산수이를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평소대로였다면 서재에 콕 틀어박혀 일만 하고 있었을 산수이가 그날따라 이상하게 보이질 않았다.
“남작님?”
그렇게 남작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그는 마침내 저택 뒤뜰에 혼자 서있던 산수이를 발견했다.
하지만 그때 갑자기 얀피르가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
“주인이 부탁한 대로 우리 사귀는 거 비밀로 하고 있으니까, 빨랑 약속대로 1일 1뽀뽀 해줘.”
“하여간…… 알겠어.”
그렇게 산수이가 얀피르에게 다가가 그의 얼굴을 소중히 어루만지더니.
쪽—
그의 입술에 가볍게 뽀뽀한 뒤, 새빨개진 얼굴로 서둘러 도망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너무 놀란 집사는 제 손에 들고 있던 문서들을 모조리 떨어트리고 말았다.
‘허, 허억! 얀피르 후작님, 드디어……! 드디어 우리 남작님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하셨군요!’
그는 감격에 젖어 눈물을 흘릴 지경이었다.
사실 집사는 애초부터 그를 지지하고 있었다.
‘이 제국 내에, 저분보다 몸도 마음도 더 훌륭한 사내는 없을 테니까요.’
더군다나 제 주인에게 다정하기까지 하니, 그야말로 금상첨화 아니겠는가.
한편 넋이 나간 채 산수이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헤벌쭉하게 웃고 있던 얀피르.
그는 갑자기 불어온 바람 때문에 집사가 가까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눈치챘다.
얀피르가 그를 향해 멋쩍게 웃어 보였다.
“방금 본 건 비밀로 해 줘, 집사.”
그 말을 들은 집사는 깜짝 놀랐다.
“아니 후작님, 어째서 비밀로 하란 말씀이십니까? 두 분이 마침내 맺어지셨는데, 당연히 결혼식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요!”
하지만 얀피르는 고개를 저으며 깊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물론 나야 지금 당장이라도 그러고 싶지. 하지만 주인이, 일단은 일에 집중하고 싶대.”
“하아, 정말 우리 남작님은…….”
침울한 표정의 집사를 향해, 얀피르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특히, 유모한테는 절대 말하면 안 돼.”
그 말을 들은 집사는 움찔했다.
제가 항상 유모와 함께 산수이 남작님의 남편감에 관해 토론했던 걸 눈치채신 건가?!
얀피르가 그런 집사를 보며 씩 웃었다.
“다 알고 있었어. 집사가 유모랑 같이 우리를 주시하고 있었다는 거.”
“후, 후작님……!”
“그래서 어때? 집사는 주인의 선택이 마음에 들어?”
집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에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입니다. 남작님께서 최고의 선택을 내리셨군요.”
그 말을 들은 얀피르가 만족한 듯 씩 웃었다.
그렇게 회상을 마친 집사는 태연한 척,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유모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유모의 눈에선 여전히 호기심이 사라질 기색이 보이질 않았다.
‘으음, 이를 어쩌죠 후작님. 제가 비밀을 지켜드리더라도, 일단 유모가 마음먹고 나서기 시작하면 들키는 것은 시간문제일 듯싶습니다만…….’
아니나 다를까, 유모가 결연한 표정으로 집사를 바라보았다.
“집사님, 아무래도 저는 촉이 와요. 제가 한번 알아볼 테니 기다리고 계세요. 제가 꼭 엄청난 소식을 안고 돌아올 테니까요!”
그렇게 유모는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사용인 휴게실을 나섰다.
집사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유모. 차라리 다 파헤쳐주십시오. 그래서 두 분의 결혼식이 하루라도 앞당겨질 수만 있다면, 저는 언제라도 환영입니다!’
얀피르에 대한 의리 때문에 차마 제 입으론 털어놓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누구보다 간절하게 두 남녀가 하루속히 맺어지길 바라고 있던 집사였으니까.
***
그렇게 산수이를 찾아 나선 유모.
하지만 어디에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물론 얀피르도.
겨우 물어물어 둘의 행방을 찾았을 땐, 둘은 이미 남작저에 없다고 했다.
“두 분께서 벌써 출타하셨다고?”
한발 늦은 것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그녀의 의심을 확신으로 바꿔주었다.
“그것도 마부까지 물리고, 단 두 분이서만 말이지……?”
유모가 씩 웃었다.
한편 산수이는 마차 안에 홀로 우두커니 앉아 어디론가 알 수 없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갑자기 시내에 산수이가 꼭 가 봐야 할 급한 일이 생겼다길래, 얀피르와 함께 다녀오기로 했었는데.
그런데 그가 채 탑승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마차가 출발해버리는 것이 아닌가.
놀란 산수이가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보니.
“……!”
마부석에 앉아있는 건, 다름 아닌 얀피르였다.
그가 산수이를 향해 외쳤다.
“어어? 위험하니까 고개 내밀면 안 돼, 주인.”
“지, 지금 우리 어디 가는 거야, 얀피르?!”
“데이트하러 가는데?”
“이게 무슨 데이트야!”
그렇게 얀피르에게 납치 아닌 납치를 당한 산수이.
그들은 얼마 후 인적이 드문 들판에 도착했다.
새파란 풀밭 위에 핑크빛 매트를 펼치며, 얀피르가 큰 목소리로 산수이를 불렀다.
“얼른 와, 주인!”
피크닉 바구니에 각종 음식들까지. 아주 작정하고 야무지게도 준비해 온 모양새였다.
‘방심했다……!’
또 얀피르한테 넘어가 버린 것이다.
이래서야 비밀 연애를 하는 이유가 없지 않아?
점점 더 사우나스의 미션과는 멀어지고 있는 것 같은데?
산수이는 하는 수 없이 신발을 벗고 매트 위로 올라갔다.
그러자 얀피르가 자신의 다리를 팡팡 두드리며 말했다.
“이거 베고 누워, 주인.”
“거기 누우라고? 얀피르 네가 무슨 생각인지 내가 모를 줄 알고?”
“내가 무슨 생각인 거 같은데?”
“그야…….”
무언가를 떠올린 산수이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러자 얀피르가 산수이의 이마에 제 손바닥을 갖다 대며 장난스럽게 중얼거렸다.
“음? 내 반려 얼굴이 왜 이렇게 뜨겁지? 설마, 내가 키스라도 할 거라고 생각한 건가?”
“!”
속을 들켜 적잖이 당황하는 산수이를 보며, 얀피르가 귀엽다는 듯 쿡쿡거렸다.
산수이가 제 이마에서 얀피르의 손을 치워내며 소리쳤다.
“우, 웃지 마!”
“수희야.”
얀피르의 입에서 또다시 자신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산수이의 가슴이 속절없이 쿵 내려앉았다.
아 얘는 정말 나를 심쿵사시킬 생각인 거냐고.
얀피르가 산수이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오늘은 안 할게.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이리 와 수희야.”
크, 크흠. 걱정이라니. 사실 살짝 기대하고 있었는데.
아무튼 그렇게 얀피르의 다리를 베고 누운 산수이.
곧 산수이의 눈동자에 새파란 하늘이 담겼다.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얀피르의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좋다…….’
평온하고, 행복했다.
산수이는 천천히 눈을 감고 지금의 순간을 만끽했다.
곧이어 그녀의 귓가에 사랑하는 이의 음성이 들려왔다.
“주인, 원래 세상의 너는 어떤 삶을 살고 있었어?”
“원래의…… 나?”
“응. 궁금해. 너의 하루, 네가 좋아하던 것, 전부 다.”
놀란 산수이가 눈을 반짝 떴다.
그러자 얀피르가 고개를 숙여 산수이의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안수희의 눈동자는 무슨 색이었어?”
예상치 못한 질문에 말문이 막혀버린 그녀를 바라보며, 얀피르가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갔다.
“머리 색은?”
산수이가 머뭇거리다 작게 중얼거렸다.
“……눈은 갈색. 머리카락은 얀피르 너와 같은 검은색이었어.”
“우와, 진짜? 알에서 깨어난 뒤로 이런 머리 색 가진 인간은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얀피르가 그녀의 코끝에 제 코를 콩 갖다 비벼대며 말했다.
“우리 완전 운명이네.”
“그, 그 세계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다 검은색 머리였거든!”
“그래도.”
얀피르가 싱그럽게 웃었다.
“그 많은 사람들 중 나한테 온 건 너잖아.”
아, 무슨 말도 저렇게 예쁘게 해.
그렇게, 산수이는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놓기 시작했다.
그녀가 대중목욕탕에서 세신사로 일할 때 어떤 재미난 에피소드가 있었는지.
원래 세계에서도 얼마나 목욕을 좋아했었는지를.
얀피르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가만히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산수이의 이야기가 모두 끝나갈 무렵, 문득 위화감을 느낀 얀피르가 궁금한 듯 물었다.
“근데, 가족은?”
“가…… 족?”
“응. 아까부터 계속 목욕탕에서 일했던 얘기만 하길래.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어? 형제자매는 있었고?”
하지만 산수이는 말이 없었다.
산수이의 얼굴에 드리워지는 그늘을 본 얀피르가 서둘러 덧붙였다.
“얘기하고 싶지 않으면, 굳이 안 해도…….”
“없었어.”
산수이가 얀피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 태어났을 때부터 보육원 앞에 버려져 있었거든.”
“……!”
그렇게, 산수이는 처음으로 자신의 진짜 속내를 누군가에게 털어놓았다.
항상 남의 때를 밀어주며 이야기를 들어주는 쪽에만 서 있었는데.
결코 누구에게도 말해주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자신의 어두웠던 과거사를 일단 말하기 시작하자.
마치 강둑이 터지듯 그간의 설움과 지독했던 외로움이 한꺼번이 쓸려 나왔다.
곧이어 자신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새어 나오는 게 느껴졌다.
산수이는 서둘러 제 팔을 들어 올려 눈가를 지그시 내리눌렀다.
흘러내린 눈물이 얀피르의 다리를 적시지 못하도록.
하지만 얀피르는 말없이 그녀의 팔을 들어 올렸다.
놀란 그녀가 뭐라 할 새도 없이, 그가 산수이를 그대로 끌어올려 제 품 안에 안고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것도 나랑 똑같네? 뭐야, 역시 우리 운명 맞잖아. 왜 이렇게 통하는 게 많아?”
“뭐가 똑같다는 거야?”
“가족 없이 혼자 남은 거.”
“그게 어떻게 똑같아? 얀피르 넌 가족이 있었잖아.”
“지금은 없잖아. 어…… 아니다, 나 가족 있네.”
그가 산수이와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내 반려.”
“…….”
“우리 둘 다 가족이라곤 서로뿐이니까 하는 수 없네. 외로운 둘이서 더 사랑하며 사는 수밖에.”
결국 산수이는 다시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흐윽.”
그렇게 산수이는 얀피르의 가슴에 제 얼굴을 파묻은 채 한참을 울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얀피르가 산수이에게 속삭였다.
“과거에 어떻게 살았든, 어차피 중요한 건 지금이야. 난 좋은데? 내가 주인한테 뭐든 첫 번째라.”
“첫 번째?”
“응. 주인한테 내가 첫사랑이라며. 거기다 첫 번째 가족까지 됐는데, 안 좋을 수가 있어?”
얀피르가 씩 웃었다.
“주인이 혼자라 못 해 본 거, 앞으로 내가 옆에서 다 같이 해줄게.”
그제야 눈물이 멈춘 산수이가 얀피르를 보며 웃기 시작했다. 그녀가 웃는 걸 보며 그 역시 함께 웃음이 터졌다.
“얀피르, 근데 나 좀 억울해졌어.”
“뭐가?”
“나한텐 뭐든 다 네가 처음이었는데…….”
산수이가 손가락으로 얀피르의 가슴을 문지르며 말했다.
“얀피르 네 첫 키스는 내가 아니네?”
“…….”
이번엔 얀피르가 울고 싶어졌다.
***
남작저로 돌아온 산수이의 손에는 웬 괴상한 꽃다발이 한 아름 들려있었다.
마차가 돌아오는 소리를 들은 유모는 한걸음에 달려나가 산수이와 얀피르를 추궁하려 했다.
하지만 제 주인의 손에 들린 그 물건을 보곤 일순 멈칫했다.
산수이의 손에 들린 꽃다발은, 온통 시커먼 꽃잎으로 가득했으니까.
그 옆을 장식한 풀떼기들 역시 우드빛의 칙칙한 것들뿐이었다.
‘두 분이 데이트를 가셨던 게 아니라 어디 장례식에라도 다녀오신 거였나……?’
하지만 그 꽃다발을 바라보는 산수이의 표정은 세상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보였다.
심지어 꽃 한 송이마다 제가 직접 소중하게 손질해서 화병에 장식해두기까지 했다.
‘아니, 예전에 얀피르 후작님께서 멀쩡한 꽃다발을 선물해 주실 때는 거들떠도 안 보시더니만…….’
분명 남작님과 닮은 보랏빛과 연푸른 빛깔이 어우러진 세상 화려한 꽃다발이었지.
얀피르 후작님이 매일같이 선물해대셨었는데.
그때는 분명 관심 없다는 듯 대충 근처에 보이는 화병에 아무렇게나 꽂아두지 않았었나.
유모는 이제 둘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길 포기했다.
어차피 곧 자신의 궁금증이 풀릴 예정이기도 했다.
대체 제 주인의 마음이 누구에게로 향해있는지.
프리트 황태자와, 휘온 공작이 이곳 남작저를 향해 달려오고 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