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루헤가 준 마법 로브를 작동시키는 주문이 뭐였냐는 얀피르의 질문에, 산수이가 묘하게 동요하며 말을 더듬었다.
“아. 그, 그거? 벼, 별거 아니었어.”
하지만 이미 얀피르는 그녀의 속내를 꿰뚫어 본 후였다.
그가 되물었다.
“뭐야. 주문 뭐였는데.”
“별거 아니라니까.”
“그런데 왜 내 눈을 피할까?”
얀피르가 삐딱하게 서서 물었다.
“왜, 그 마족 놈이 자길 사랑한다고 외치기라도 하래?”
“아니? 그런 건 절대 아냐!”
얀피르가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그런데 왜 말을 못 해, 주인.”
“…….”
끝내 대답하지 않으려는 산수이를 보며, 얀피르는 동굴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버렸다.
“얀피르? 지금 뭐 하는 거야!”
“아-주인이 말해줄 때까지 여기서 나가지 말아야겠다.”
“그래도 절대 말 안 해줄 거야.”
“그럼 이 동굴에서 계속 살아야지 뭐. 우리 아까 하던 거나 계속 마저 할까?”
자신을 향해 능글맞게 웃는 얀피르를 보며, 산수이는 몹시 곤란해졌다.
‘아 진짜……! 그딴 주문을 얀피르 앞에서 어떻게 말하라고!’
하지만 제힘으로 저 드래곤을 일으킬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녀는 결국 얀피르의 옷깃을 붙잡은 채, 한숨을 내쉬며 모기만 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게요.”
“뭐라고? 안 들려.”
“다음에…… 해 줄게요.”
“뭘…… 해준다고?”
“아, 진짜! [다음에 만나면 뽀뽀해줄게요, 루헤.]라고!”
순간 얀피르와 산수이의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며, 두 사람은 남작저로 이동했다.
***
“대체 뭐, 뭘 해?!”
텔레포트가 발동되어 남작저로 돌아오자마자, 얀피르가 송곳니를 세우며 그르렁거렸다.
“아 왜 화를 내! 주문일 뿐이잖아, 주문!”
“그 마족 놈이 주인 너한테 뽀뽀해달라고 했었어?!”
산수이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긴 침묵은 긍정을 의미했다.
그러자 눈깔이 뒤집힌 얀피르의 팔에서 검은 비늘이 돋아났다.
“진짜 죽여버리겠어.”
산수이가 그를 말리며 진정시켰다.
“참아, 얀피르!”
그녀는 분노에 휩싸인 얀피르의 얼굴을 재빨리 손으로 붙잡았다.
그리고 그의 입에 다시 한 번 가볍게 입을 맞췄다.
쪽—
그러자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미쳐 날뛰려던 얀피르가 일순 다시 멍멍이처럼 순해졌다.
“…….”
산수이가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진짜 걱정하지 말라니까. 뽀뽀 같은 거 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할 생각 없어.”
그런 산수이에게 얀피르가 손가락으로 제 볼을 톡톡 가리켰다.
산수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뭐, 왜.”
“뭐긴 뭐야, 나도 뽀뽀해줘.”
“루헤한테 뽀뽀 안 했다니까.”
“아 그건 당연한 거고! 빨랑 해줘, 나도 뽀뽀.”
에휴.
산수이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얀피르에게 다가가 그의 볼에 뽀뽀를 쪽-해주었다.
“됐지?”
하지만 됐을 리가 있나.
얀피르는 야한 웃음을 지으며 산수이의 턱을 붙잡고 그대로 다시 입을 맞춰버렸다.
***
‘여기서 더 하다간 죽는다…….’
키스뿐인데도 한번 할 때마다 온몸의 기운이 얀피르에게로 쭉쭉 빨려 나가는 느낌이었다.
어찌나 절륜하게 사람을 홀려대는지, 산수이는 다리가 후들거려 일어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어떻게 저게 처음일 수가 있어?! 드래곤 종족은 다 저런 거야?’
게다가.
“더, 더 이상은 안 돼! 오늘은 키스 금지!”
“쳇…… 알겠어. 그럼 대신 핥아도 돼?”
“그거야 뭐.”
하지만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벌어진 건.
츄웁-
“하, 핥는다며! 왜 또 키스를 해!”
“핥은 거 맞긴 하잖아.”
이런 미친!
그나마 산수이가 완강히 거부해서 ‘그것’만은 피할 수 있었다.
얀피르가 불만에 가득 찬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대체 왜! 난 주인이 누구든 상관없다니까? 게다가 이번엔 동굴 안도 아니잖아. 주인 침대에 내가 엄청 푹신푹신한 거 깔아놨단 말이야.”
그가 손바닥으로 이불 위를 팡팡 두드리며 애원했다.
“그, 그건 사우나스 님의 임무를 모두 완수하고, 내가 새로운 소원을 빌고 나면 하자. 응?”
“대체 무슨 소원을 빌 건데 그래?”
“그건…… 아직은 비밀이야.”
“크아악-! 주인 너무해 진짜!”
그렇게 얀피르는 또다시 기약 없는 고된 인내의 시간을 견뎌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산수이가 당분간 비밀 연애를 하자고 하는 것이 아닌가.
얀피르는 그야말로 딱 미칠 노릇이었다.
‘대체 왜! 이제 넌 내 거라고 온 제국에 대고 소리치고 싶은데, 왜왜왜!’
특히나 그 세 놈한테는 지금이라도 당장 달려가서 면전에 대고 말해주고 싶었다.
이제 산수이는 내 반려니까 건드리는 놈들은 가만두지 않겠다고.
하지만 산수이의 설명을 들은 얀피르는 또다시 그녀에게 져 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산수이 역시 숨기고 싶어서 숨기는 건 아니었다.
‘나도 공개 연애 하고 싶다고!’
제 인생 처음으로 해 보는 연애인데, 아무렴.
얀피르랑 시내에 나가서 데이트도 하고 싶고, 남들 다 하는 커플 아이템도 맞춰보고 싶고.
설레는 마음으로 수줍게 손도 잡아보고, 어?
물론 이미 진도가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것 같지만.
하지만 그녀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21세기 한국이 아니었다.
이 세계에서 귀족 남녀가 교제를 한다는 것은, 곧바로 결혼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걸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큰 추문이 날 것이 뻔했다.
가뜩이나 귀족들 사이에 이미 산수이와 얀피르가 동거 중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둘이 실제로 교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날엔 유모가 가만있지 않을 테고.
‘분명 당장에 결혼식 날짜를 잡자고 하겠지.’
그렇게 되면 몇 달에 걸친 호화로운 결혼식 준비를 절대 피해갈 수 없을 터.
온갖 웨딩 장식은 물론이요, 청첩장 제작에 드레스, 부케, 케이크…….
사우나스의 미션만 가지고도 정신이 없어 죽겠는데, 그 와중에 결혼식까지 준비할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
“일단 사우나스 님의 미션부터 끝내자, 응? 이제 마력구만 찾으면 되니까, 결혼식은 그다음에 해도 늦지 않잖아.”
얀피르가 불만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인간들은 너무 복잡해. 왜 남의 연애사에 이래라저래라 오지랖을 부리는 거야?”
“하아, 내 말이 그 말이야.”
“주인 네가 원래 살던 세상은 어땠어?”
“뭐, 거기선 적어도 결혼 전에 자유롭게 연애는 할 수 있었지.”
“뭐야, 좋은데? 우리 그냥 주인 네 원래 세상 방식대로 연애부터 한다고 하면 안 돼?”
“내가 싫다 해도 유모는 혼자서라도 결혼식 준비를 시작할걸?”
“그럼 그냥 결혼하자. 안 그래도 주인 너랑 결혼하고 싶어 미치겠는데.”
“너 나랑 결혼식 올리고 나서도 약속대로 잘 참을 자신 있어?”
물론 없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내를 옆에 두고 매일 밤 어떻게 참아.
그렇게 결국 산수이의 뜻에 따라 당분간은 비밀 연애를 하기로 한 얀피르.
하지만 비통한 자신의 표정마저 숨길 수는 없었다.
산수이는 나라 잃은 표정이 된 그를 열심히 달래주었다.
“비밀 연애라 해도, 내가 얀피르 너의 반려라는 건 변함이 없어. 응?”
“하아…… 알았다고.”
게다가, 실은 이 연애를 당분간 잠재워둬야 할 또 다른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었다.
동굴에서 남작저로 돌아왔던 바로 그날.
산수이는 그날 밤을 결코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으니까.
다행히 모두가 잠든 새벽에 돌아왔던 터라 아무한테도 들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가 반려가 된 첫날인데, 오늘 딱 하루만 예전처럼 같이 자면 안 돼? 응?”
“하, 하지만…….”
저를 바라보며 간절하게 애원하던 얀피르의 모습에, 저 위험한 제안을 허락해버리고 만 것이다.
“주인이 걱정하는 일 절대 없도록 할게. 너도 알잖아, 나 잘 참는 거.”
알지, 누구보다 잘 알지.
네가 너무 요망한 게 문제일 뿐.
아니나 다를까, 자신의 옆에 눕자마자 또다시 입을 맞춰오는 그를 보며 산수이는 당황했지만.
“거, 걱정할 일 없게 하겠다며!”
“키스는 원래 안 물어보고 하는 거라며. 주인 설마 너…….”
얀피르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다른 거 상상했어? 네가 원한다면 나야 바로…….”
“나가!”
그렇게 베개를 던져 얀피르를 제 방에서 내쫓고는 다짐했다.
절대, 절대 절대 사우나스의 임무가 끝나기 전에 본격적인 연애를 시작해서는 안 된다고.
‘내가 정신 줄을 단단히 잡지 않으면, 이러다 정말 호로록 넘어가 버릴 것 같으니까!’
진심이었다.
아마 일은 손에 잡히지도 않겠지.
그 예로, 그날 밤 산수이는 얀피르가 떠난 이후에도 제 방 안에서 혼자 뜬눈으로 날을 꼴딱 샜으니까.
자꾸만 허공에 그의 입술이 떠다녀서 말이다.
국가가 허락한 유일한 마약은 음악이라더니 전혀 아니었다.
진짜 마약은 따로 있었다.
어떻게 된 게 하면 할수록 더 좋아지기만 했다.
게다가 이 짐승 같은 남자는 지칠 줄도 몰랐다.
하여간 틈만 나면 호시탐탐 다시 입을 맞출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주인, 그렇게 너무 앉아서 일만 하면 건강에 안 좋아. 나랑 나가서 산책하다 오자.”
산책 같은 소리 하네.
거기에 속아 넘어가 인적 없는 곳에서 얼마나 시간을 보내고 온 지 모른다.
“주인, 비덴탕 지하실 물탱크가 고장 난 것 같아. 같이 가서 좀 봐 줘.”
하지만 그날 고장 난 건 자신의 입술이었다.
“주이인…….”
여기서 만일 공개 연애까지 했다면, 정상적인 생활은 절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틈을 비집고 새어 나와 흘러넘치기 시작한 사랑의 감정을 어떻게 숨길 수가 있겠는가.
이미 둘 사이에 흐르기 시작한 핑크빛 기류는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감추려야 감출 수가 없는 것이었다.
적어도 이 남작저에서, 유모와 집사만큼은 눈치채고 있었다.
둘 사이의 분위기가 얼마 전부터 묘하게 달라져 있다는 것을.
사용인 휴게실 안.
유모가 집사에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집사님, 요새 우리 남작님과 얀피르 후작님 사이에 뭔가 변화가 있었던 것 같지 않으세요?”
“으으음…… 글쎄요.”
집사는 모른 척 유모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하지만 유모는 이를 눈치채지 못한 채, 그저 답답하다는 듯 되물을 뿐이었다.
“에? 집사님, 두 분 사이의 그 미묘한 기류를 정말 모르시겠어요?”
“……전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하아, 이상하네. 두 분 사이에 분명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사실 집사는 다 알고 있었다.
둘이 연애를 시작했다는 걸.
며칠 전, 저택 뒤뜰을 지나다 우연히 산수이와 얀피르가 애정 행각을 하는 걸 목격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