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처음에 얀피르는 이 상황이 꿈인지 생시인지 믿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산수이가 자신을 휙 끌어당기더니.
그의 입술에 그녀의 보드랍고 말랑말랑한 것이 살짝 닿았다 떨어졌으니까.
쪽—
얼이 빠진 채 그 모습 그대로 굳어버린 얀피르를 보자, 산수이는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정신이 퍼뜩 들었다.
얼굴이 터질 듯 새빨개진 그녀가 말을 더듬었다.
“으아아…….”
생의 첫 입맞춤이었다.
본 건 많았지만, 해 본 적이 있었어야지.
분명 어색하기 짝이 없었을 거야.
그러니까 얀피르가 저렇게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거겠지.
‘나, 나는 좋았는데. 얀피르는 별로였나?’
사실 그냥 좋았다는 말로는 설명이 되질 않았다.
입술이 닿은 건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때의 느낌은 영겁의 세월이 지나도 잊지 못할 만큼 그녀의 뇌리에 깊이 박혔다.
보드라운 감촉과 얀피르의 아찔한 향기.
그리고 손끝에서 느껴지던 그의 몸 떨림…….
그때였다.
“하아아아아.”
갑자기 긴 한숨을 내쉬며 얀피르가 자신의 머리를 산수이의 어깨에 툭 내려놓았다.
그의 깊은 한숨 소리를 들은 산수이는 가슴이 철렁했다.
‘으, 역시 별로였나 봐!’
하지만 그녀의 걱정과는 다르게, 시선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얀피르의 귀는 터질 듯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어차피 기억도 안 나는데 그냥 오늘을 내 생일로 할까 봐.”
“생일?”
“응.”
그가 고개를 들어 올려 산수이와 눈을 맞추었다.
“지금 너무 행복해서, 완전 다시 태어난 기분이거든.”
“……!”
낯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얀피르를 보며, 산수이의 귀도 함께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당황한 그녀가 말을 더듬었다.
“그, 그러다 진짜 생일이 기억나면 어쩌게? 두 번 챙기게?”
“그럼 그때 가서 우리가 처음 키스한 날로 바꾸면 되지. 그러려면…….”
갑자기 얀피르가 그녀에게 더욱 더 가까이 다가왔다.
아까와는 다르게 살짝 풀려버린 그의 눈빛에 산수이가 놀라 움찔거렸다.
“야, 얀피르?”
하지만 얀피르는 대답 대신 그의 커다란 손으로 산수이의 뒷덜미를 감싸며 속삭였다.
“뽀뽀 말고, 제대로도 한번 해야겠지?”
“?!”
그러고는 산수이에게 강하게 입을 맞췄다.
***
그렇게 동굴 속에서 한 시간이 지났다.
“후읍……!”
이미 거친 한 마리의 짐승이 된 얀피르는 산수이를 거의 잡아먹을 듯한 기세였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황홀함에 산수이는 정신을 놓을 지경이었다.
“흐…… 흐아!”
내가 아까 했던 건 그냥 애들 장난이었구나!
도대체 그동안 어떻게 참아온 것인지 신기할 정도였다.
얀피르는 마치 한 마리 미쳐 날뛰는 맹수같았다.
“하아…….”
마침내 눈이 풀릴 대로 풀려 돌아버린 그가 산수이를 안아 올리려던 순간.
“그, 그만!”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은 산수이가 빠르게 그를 저지했다.
하지만 얀피르의 눈은 이미 맛이 가 있었다.
그는 단 1초라도 지체하고 싶지 않다는 듯 그르렁거렸다.
“크르르……. 주인, 나 이제 멈추기 힘든데.”
산수이가 다급하게 외쳤다.
“저기 잠깐만! 나, 아직 마음의 준비가……!”
“무서워서 그래?”
놀란 토끼 눈이 된 산수이를 보고 얀피르가 일순 멈칫했다.
그가 산수이의 손을 잡고 연신 쪽쪽 입을 맞춰대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살살 할게. 안 아프게.”
“아니 대체 뭘 살살 한다는 거야!”
“다 알면서 뭘 물어봐, 주인.”
그렇게 실실 웃으며 얀피르가 다시금 자신을 끌어안자, 산수이는 그의 등짝을 냅다 후려쳐버렸다.
“안 된다고!”
“왜 안 되는데! 주인도 이제 나 좋아한다며-!”
“넌 좋아한다고 바로 하냐!”
“당연하지! 서로 같은 마음인 걸 확인했는데, 바로 사랑을…….”
“아, 아무튼 안 돼! 게다가 이런 곳에서…….”
그러자 얀피르가 주위를 둘러보곤, 이내 납득했다는 듯 끄덕였다.
“아, 장소가 문제였구나. 알겠어. 그럼 저택으로 돌아가면 곧바로…….”
“그래도 안 돼!”
얀피르는 이제 거의 울어버릴 듯한 표정이었다.
“그럼 대체 언제 되는데!”
그 말에 산수이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그 전에, 네가 꼭 알아야 할 얘기가 있어.”
***
얀피르와 맞잡은 산수이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이제 정말, 얀피르에게 자신의 정체에 대해 털어놔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이 얘기를 모두 듣고 나면 얀피르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속았다고 생각할까? 혹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보이려나.
아니면 자신이 사랑했던 건 네가 아니었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저를 이토록 사랑스럽게 바라봐 주는 저 눈을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 수도.
그렇다 해도 말해야만 했다.
그와의 관계가 더 깊어지기 전에.
나는, 사실 산수이 비덴비덴이 아니라고.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살던 안수희가, 갑자기 사우나스의 부름을 받아 산수이의 몸에 빙의가 된 거라고.
마침내 모든 이야기를 들은 얀피르가, 한참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뭐야, 그게 끝?”
오히려 놀란 건 산수이 쪽이었다.
“그게 끝이냐고? 너, 지금까지 내가 한 얘기 다 이해한 거 맞아?”
“응. 그래서 주인이 가끔씩 내가 못 알아듣는 말들을 했던 거구나?”
얀피르는 별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이었다.
“아무튼 정리하자면, 지금 주인의 몸에 들어있는 건 다른 세상에서 온 영혼이라는 말 아니야?”
“그, 그래. 산수이 비덴비덴이 아니라.”
“근데 그게 뭐?”
“그게 뭐냐니? 이런 얘길 듣고도 안 놀라?”
얀피르가 산수이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게 뭐 어쨌다고. 내가 원래부터 산수이 비덴비덴의 영혼을 알고 지냈던 것도 아니고.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건 그냥 주인 그대로잖아. 겉껍데기가 뭐든 상관없이.”
“얀피르…….”
그 말을 듣는 산수이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자신이 그토록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 정말 이렇게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구나 싶어서.
벅차오르는 감정을 애써 누른 채, 산수이가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실제의 나는 이만큼 예쁘지도 않고.”
“나 주인 예뻐서 좋아한 거 아닌데?”
“그렇지만 너 만날 나보고 예쁘다고……!”
이 눈과 머리카락 색깔에 맞춰서 화단에 꽃도 심고, 드레스도 만들어 주고 그랬잖아!
“그야.”
얀피르가 자신의 이마를 산수이의 이마에 콩-갖다 대며 속삭였다.
“좋아하는 여자가 내 눈에 예뻐 보이는 건 당연한 거 아냐?”
“으…… 그럼 넌 날 왜 좋아하는 건데?”
“좋아하는 데 이유가 어디 있어? 그냥 좋아해, 주인.”
“……바보.”
“그런데, 주인의 진짜 이름은 뭐야?”
“내 진짜 이름?”
처음이었다.
이 세계에 와서 제 이름을 입 밖으로 내뱉어 보는 것은.
그리고 누군가가 그걸 물어봐 주는 것도.
“안…… 수희.”
“……수희?”
얀피르가 미간을 찌푸렸다.
“안수희, 산수이. 뭐야, 이름 두 개가 왜 이렇게 비슷해? 그래서 그 마족 놈이 수이, 수이 할 때마다 주인 얼굴이 새빨개졌었던 거고만?”
“야! 그, 그런 거 아니……!”
“수희야.”
“……!”
갑자기 얀피르의 입을 통해 제 이름을 듣게 되자 산수이의 가슴속이 간지러워졌다.
얀피르가 산수이의 이마에 입 맞추며, 그녀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더 불러주었다.
“사랑해, 나의 수희야.”
왠지 눈물이 나 버릴 것만 같은 산수이는, 그의 가슴에 그대로 얼굴을 파묻어버렸다.
얀피르는 떨리는 산수이의 어깨를 그저 말없이 토닥여주었다.
하지만 해야 할 얘기가 모두 끝난 것이 아니란 건, 그들 모두 알고 있었다.
아직, 해결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아있음을.
얀피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우나스가 목욕의 신이란 건 그 마족 놈한테 들어서 이미 알고 있었어. 하지만 이건…… 좀 충격이긴 하네.”
임무를 마치면, 사우나스에게 소원을 빌어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려 했다니.
그 말에 놀란 산수이가 물었다.
“얀피르 너, 여태 사우나스를 찾고 있었던 거야?”
“당연하지.”
얀피르가 산수이를 향해 답했다.
“주인 네가 자꾸 나를 떠나려고 하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
“……!”
“물론 네가 그러는 데 사우나스란 놈이 연관되어 있나 보다 정도로만 생각했었지. 하지만 이건…….”
얀피르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연신 마른세수를 해 댔다.
그리고 마침내 결심한 듯 말했다.
“주인.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으면, 가도 돼.”
“그게 무슨 소리야. 너 여태 내가 하는 말 뭘 들은 거야? 내가 떠나버리면, 넌…….”
“내가 따라가면 되니까.”
“뭐?”
“네가 사는 세상이 어디든, 네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든. 주인 네가 있는 곳으로 따라가겠다고.”
그 말에 산수이는 자신도 모르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야, 너 거기가 어떤 곳인 줄이나 알아? 얀피르 네가 드래곤이 되어 하늘을 날아다니면 연구 대상으로 실험실에 잡혀갈걸?”
“그럼 계속 인간의 모습으로 있으면 되지.”
“어떻게 그러고 살아. 됐어, 난 이미 결심했어.”
산수이는 제 눈앞의 반려를 바라보았다.
“난 여기 남아서 너랑 살아갈 거야.”
“……후회하지 않겠어?”
“후회야 하겠지, 그 세상이 그리울 때도 있겠지. 하지만.”
산수이가 그의 입술에 또 한 번 입을 쪽 맞추곤 해사하게 웃었다.
“아까도 말했잖아. 이런 반려를 대체 어디 가서 또 만나? 안 돼, 나 아까워서 못 가.”
“주인 너 진짜.”
얀피르가 젖은 눈동자로 그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원래 세상 따윈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행복하게 만들어 줄게, 수희야.”
그렇게 얀피르는 또다시 산수이에게 입을 맞췄다.
끝나지 않을 키스는 그 이후로도 한참이나 지속되었다.
***
“그 마력구라는 거 말이야.”
출구를 향해 걸으며, 얀피르가 말했다.
“주인이 오기 전에 내가 여길 샅샅이 뒤져봤거든? 근데 그 비슷하게 생긴 것도 없었어.”
그가 손에 들린 알껍데기 조각을 산수이에게 내밀었다.
“여기서 찾은 거라곤 정말 딱 이거 하나뿐이야. 내가 봉인되어 있었던 알껍데기 조각들.”
산수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얀피르. 넌 불안하지 않아?”
“뭐가?”
“내가 아직도…… 마력구를 찾으려고 하는 거.”
조금 전, 산수이는 얀피르에게 자신의 결심에 대해 털어놓았었다.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지 않더라도, 사우나스가 내린 임무는 끝까지 수행하고 싶다고.
‘내가 여기서 포기해버리면, 이 남작령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본디 온천수를 기반으로 목욕탕을 운영하며 살아가던 자들이었다.
지금이야 비덴탕과 때밀이 장사가 잘되어 일자리가 많이 창출되었다지만.
정말로 그들을 위한다면, 원래대로 이 땅에서 온천수가 다시 나올 수 있도록 만들어 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난 이곳에서 산수이 비덴비덴 남작으로 살아가기로 했어. 그렇다면, 나의 영지민들이 본업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힘쓰는 것 또한 나의 책임이야.’
이런 생각들을 얀피르에게 모두 털어놓았을 때, 그는 언제나처럼 산수이의 생각을 지지해주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주인. 그리고 난 전혀 불안하지 않아. 설령 네가 원래의 세계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내가 따라가면 된다니까?”
“안 간다고.”
그렇게 계속해서 걷고 걸어, 어느새 그들은 출구 가까이에 다다랐다.
하늘 위에서 새어 나오는 빛을 함께 바라보며 동굴을 떠나려던 찰나.
얀피르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주인, 여기까진 그 마족 놈이 준 로브를 써서 왔겠네? 그거, 주문이 뭐였어?”
멈칫.
그 말에 산수이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