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산수이는 마법진이 만들어준 계단을 통해 깊은 땅굴 속으로 서둘러 내려갔다.
“얀피르-!”
그를 찾아 미친 듯이 달리고, 또 달렸다.
다행히 굴속은 오직 한 방향으로만 길이 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달려도 도대체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었다.
그를 찾아 헤매는 내내, 그녀의 머릿속엔 오직 한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얀피르는 무사할까?
이 길의 끝에 그가 있는 게 맞겠지?
이미 마력구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 따위는 기억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산수이의 두 눈은 오직 자신의 반려만을 찾고 있었으니까.
“얀피르, 어디 있어?”
그렇게 마침내 동굴의 끝자락까지 도달한 산수이.
그러나 동굴 안은 황량하게 먼지만 흩날리고 있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얀피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얀피르는 대체 어디 있지?’
산수이는 동굴 곳곳을 샅샅이 찾아보았다.
하지만 이곳에 존재하는 것이라곤 그저 무언가의 조각인 듯 보이는 새하얗고 거대한 잔해뿐이었다.
산수이는 마지막으로 그 잔해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마치 유리처럼 산산조각 난 커다란 파편들이 스스로 새하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때였다.
“얀피르!”
그토록 찾던 그가, 빛의 잔해 뒤편에 죽은 듯 고요히 누워있었다.
산수이는 얀피르를 품에 안고 그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얀피르, 제발 눈 좀 떠 봐!”
차가워진 그의 손을 연신 주무르고, 그의 얼굴에 제 볼을 문질러대길 몇 차례.
얼마 후, 얀피르가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천천히 눈을 떴다.
“으…….”
“얀피르, 정신이 들어? 나야, 내가 왔어. 이제 괜찮아.”
“주…… 인?”
얀피르가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산수이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비로소 얀피르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한 산수이는, 그를 제 품에 와락 끌어안았다.
“아아 다행이다, 다행이다……!”
산수이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쉴새 없이 흘러내렸다.
얀피르는 산수이의 품에 안긴 채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주인, 나…… 기억이 돌아왔어.”
***
몇백 년 전.
지하에서의 삶에 이골이 난 마족들은 결국 인간세계를 침략했다.
인간들은 자신들과 동맹을 맺고 있던 드래곤족과 힘을 합쳐 마족에게 끝까지 저항했다.
드래곤들의 압도적인 물리력 덕분에 전세는 인간계 쪽으로 기우는 듯 보였다.
하지만 한 마족의 참전 이후 모든 것이 달라져버렸다.
그는 드래곤의 약점을 파고들어 순식간에 그들을 몰살시켰다.
그렇게 모든 드래곤들이 세상 속에서 영영 사라졌다.
마지막, 드래곤 제국의 황실만을 남겨둔 채.
드래곤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얀피르 드 라첸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마족에 맞서 싸웠다.
하지만 이미 승패는 결정되어 있었다.
결국 드래곤 제국의 황궁마저 마족의 손에 점령당하려던 위기의 순간.
얀피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애달픈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드래곤 제국의 황제와 황후.
바로 제 부모의 얼굴이었다.
“듣거라, 얀피르 드 라첸. 내 하나뿐인 아들아.”
드래곤의 황제가 손을 뻗자, 이윽고 그들 사이로 커다란 알 형태의 봉인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드래곤의 황태자는 울며 소리쳤다.
“안 됩니다, 폐하! 저도 마지막까지 함께 싸우겠습니다!”
그러나 황제의 의지는 굳건했다.
“가거라. 얀피르 너만은 꼭 살아남아야 한다. 살아서 반드시…….”
“싫습니다!”
하지만 황제는 제 아들의 애원을 뒤로한 채 봉인구를 작동시켰다.
이윽고 얀피르는 황제에 의해 알 속에 봉인되어 지하 깊숙한 곳에 묻혔다.
“아바마마-! 어마마마-!”
곧이어 마족들이 황궁 안으로 쳐들어왔다.
그들은 황궁 안에 남겨진 모든 드래곤들을 학살하는 와중에도, 봉인된 얀피르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그날, 그렇게 드래곤 제국은 영원히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지하 깊은 곳에 잠들어있는 마지막 황태자만을 남겨둔 채.
***
회상을 마친 얀피르가 깨질 듯한 머리를 쥐어 잡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일단 기억나는 건 거기까지야.”
얀피르가 제 몸을 동굴 벽에 천천히 기대었다.
“대체 내가 왜 봉인된 건지. 이렇게까지 혼자 살아남아서 해야만 했던 일이 뭔지는 아직 모르겠어.”
그가 처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너무 오랫동안 봉인되어 있느라 다른 기억들은 다 날아가 버렸나 봐.”
마계 대전이라면, 역사서에나 나오는 몇백 년 전의 전투니까.
얀피르가 제 눈앞에 놓인 하얀 잔해들로 시선을 옮겼다.
그것은 오랜 시간 동안 그를 가둬 두었던 알 형태의 봉인구였던 것이다.
옆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산수이가 얀피르의 손을 꼬옥 잡아주었다.
“난 괜찮아, 주인. 적어도 가장 중요한 건 기억해 냈으니까.”
“가장 중요한 거?”
“응. 부모님과…… 내 진짜 이름.”
그런 얀피르를 바라보는 산수이의 가슴이 저릿했다.
얀피르가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듯 그녀를 향해 피식 웃어 보였다.
산수이 역시 그를 따라 웃기로 했다.
“그럼 얀피르 넌 지금 대체 몇 살인 걸까……?”
얀피르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주인 너, 지금 놀라는 포인트가 고작 내 나이야?”
“고작? 몇백 살이 고작은 아니지.”
얀피르가 산수이에게 제 얼굴을 불쑥 들이밀며 말했다.
“나이가 뭐가 중요해. 여전히 봉인되었을 때 모습이랑 똑같은데!”
산수이가 쿡쿡 웃었다.
“그러게, 곱게 늙긴 했네.”
“안 늙었다니까! 근데 주인 너 내 정체는 안 신기해? 나, 나름 왕자님이었다니까?”
“그거야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얀피르가 깜짝 놀라 물었다.
“알고 있었다고? 주인 네가 어떻게?”
“응. 내가 여기 들어올 때 마법진 아저씨가 말해주던데.”
산수이가 마법진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드래곤 제국의 황태자, 얀피르 드 라첸의 반려여!”
얀피르의 눈이 커졌다.
“주인 너 방금 뭐라…….”
그때, 갑자기 얀피르의 심장에 뜨거운 고통이 느껴졌다.
“크, 크윽!”
“얀피르?!”
그가 자신의 심장을 부여잡고는 고통스럽게 몸부림쳤다.
머리를 뒤로 젖히며 부르르 떨던 얀피르가 황금빛 눈동자를 크게 번뜩였다.
이윽고, 그의 심장에 선명한 각인이 새겨졌다.
그녀의 영혼이었다.
이어서 형언할 수 없는 감각이 그의 온몸을 뒤덮었다.
한없이 따뜻하고, 달고, 녹아내릴 것 같은 감각이 이어졌다.
그의 심장이 평소보다 더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바로, 제 눈앞의 작은 여인을 향해서.
“!”
얀피르가 천천히 고개를 내려 산수이를 바라보았다.
“주인, 너…… 설마.”
그는 이제야 뒤늦게 깨달았다.
산수이가 지금 무엇을 입고 제 눈앞에 앉아있는지를.
제가 준 드래곤의 비늘 드레스.
이 험한 동굴 안을 굳이 저 불편한 차림으로 들어왔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됐다.
왜 아까 진즉 알아차리지 못했지?
그의 얼굴에 어린 표정 변화를 지켜보며, 산수이는 그저 씩 웃어 보일 뿐이었다.
얀피르가 산수이의 어깨를 잡고 다급히 물었다.
“주인 너 설마, 여길 들어올 수 있었던 게…… 내 반려가 됐기 때문이었어?!”
그녀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대체 왜!”
“내가 반려가 된 게 싫어?”
“그런 뜻이 아니잖아!”
얀피르가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주인 너, 드래곤의 반려가 된다는 게 무슨 뜻인지는 알아?”
“응. 영원히 그 반려만 사랑하는 거라며.”
“그걸 알고도 수락해?”
얀피르가 고개를 축 떨궜다.
그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이윽고 몸을 일으킨 그가 산수이의 손을 덥석 잡았다.
“가자.”
“어딜?”
“마법진한테.”
“왜?”
“반려 물러달라고 하려고.”
“그거 무를 수 있는 거였어?”
“드래곤인 나는 안 되겠지만, 주인 너는 혹시 모르잖아. 인간이니까 가능할지도.”
“아니, 그러니까 도대체 그걸 왜 무르려는 건데!”
“네가 나 때문에 희생하는 게 싫으니까!”
얀피르가 비통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왜 여길 들어온 거야. 조금만 더 있었으면 내가 알아서 깨어났을 텐데, 왜.”
“그야 얀피르 네가 걱정돼서…….”
“그렇다고 나한테 네 인생을 걸어버리면 어떡해! 나 때문에 넌, 넌…….”
얀피르가 제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어떻게 마음에도 없는 상대랑 평생을 반려로 살려 그래, 이 바보야……!”
그 말에 산수이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내가 마음이 없다고 누가 그래?”
“어?”
산수이가 얀피르 앞에 철퍼덕 마주 앉았다.
“나 그렇게 바보 아니야, 얀피르.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 때문에 인생을 걸 정도로 모자라지 않다고, 나.”
“뭐……?”
예상치 못한 대답에 얀피르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심장이 한층 더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설마, 설마.
얀피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주인 너, 설마 나를 좋아해?”
“아니?”
산수이가 얀피르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좋아하는 마음은 사실 예전에 이미 넘어섰던 것 같아. 바보같이 내가 몰랐을 뿐이지.”
“……!”
“이렇게 가슴이 터지게 아픈 걸 보면, 이게 사랑이 아니고 뭐겠어.”
얀피르는 방금 제가 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지금 이게 꿈인가?
‘주인이…… 나를?’
입을 떡 벌린 그가 멍하니 산수이를 바라보았다.
산수이 역시 사랑스러운 눈길로 얀피르를 마주 보았다.
“네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순간 깨달았어. 나는 네가 없으면 안 될 것 같더라고.”
그러고는 얀피르의 손을 꽉 잡으며 속삭였다.
“내가 내 마음을 너무 늦게 알아차려서 미안해.”
그제야 정신을 퍼뜩 차린 얀피르가 그녀에게 물었다.
“주인 너 진짜 후회 안 해?”
“후회를 왜 해?”
“내 심장 이제 주인 너한테 묶인 거야. 절대 못 풀어.”
“잘됐네.”
“나 집착 엄청 심해.”
“나도 놔 줄 생각 없어.”
“너 이제 다른 놈 못 만나. 내가 그놈 가만 안 둘 거야.”
“이렇게 내 취향인 얼굴에, 조신한 데다 야하기까지 한 최고의 반려 두고 다른 놈 만날 생각, 나도 없는데?”
순간 동시에 웃음이 터져버린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이마를 콩 맞댔다.
“주인.”
얀피르가 그녀를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속삭였다.
“사랑해.”
그가 말을 이었다.
“내 숨이 끊어질 때까지, 영원히 주인 너만 사랑할 거야.”
“……나도.”
산수이는 제 앞에 앉은 반려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이 눈빛을 영영 잃을 뻔했다는 걸 떠올리면 아찔했다.
그녀가 손을 뻗어 얀피르의 얼굴을 가만히 쓸어 만졌다.
그러자 얀피르가 산수이의 손바닥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나를 선택해 줘서 고마워, 주인. 내가 정말 잘할게. 절대로 후회하지 않게 해 줄게.”
“그건 내가 할 말인걸.”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잠시간 망설이던 얀피르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럼 나 이번엔 정말 너한테 키스해도 돼?”
“이 바보야.”
산수이가 피식 웃었다.
“그런 건 원래 안 물어보고 하는 거야.”
그러고는 그의 옷깃을 제 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