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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세신사 영애님-100화 (100/150)

100화.

루헤가 혼자서 땅굴 속으로 들어간 지도 벌써 몇 시간이 지났다.

산수이는 응접실에 앉아 그가 마력구의 행방을 찾아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

혹시 마법이 아닌 곡괭이로 땅을 파 내려가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웃음이 나올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산수이는 더 이상 웃을 수 없게 되었다.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해!’

그러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까 루헤와 함께 갔던 그 숲속의 정확한 위치도, 인간인 제가 땅굴을 내려갈 수 있는 방법 역시도 몰랐으니까.

게다가 이렇게 소식이 끊긴 루헤에게 연락할 방법 또한 알 수가 없었다.

“어쩌지? 휴와 듀한테라도 알려야 하나?”

그 꼬마 박쥐들이 정기적으로 목욕하러 올 때가 됐긴 한데.

이런저런 생각에 산수이는 머리가 뒤엉켰다.

한참 동안 응접실을 왔다 갔다 하며 초조함을 달래던 찰나.

갑자기 눈앞이 일렁이더니 드디어 기다리던 그가 허공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루헤?!”

“…….”

하지만 그는 굳은 표정으로 아무 말이 없었다.

“루헤, 거기서 무슨 일 있었어요?”

“마력구를 가져간 자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아요, 수이.”

“대체 누구예요? 그 도둑놈 지금 어디에 있어요? 내가 아주 그냥!”

그러자 루헤는 말없이 손가락을 들어 올려 창문 밖을 가리켰다.

“?”

산수이의 시선이 루헤의 손가락을 따라갔다.

그 끝에 존재한 자의 얼굴을 본 산수이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려갔다.

그것은 바로.

“당신의, 드래곤.”

루헤의 손끝이 가리키는 건, 바로 창문 너머로 보이는 얀피르였다.

‘말도 안 돼. 얀피르가 왜……?’

산수이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루헤에게 다그쳐 물었다.

“대체 그 땅굴 속에 뭐가 있었는데요?”

“나도 몰라요. 애초에 안으로 들어가질 못했으니까.”

“네? 아니 그럼 왜……!”

“그들의 종족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게끔 마법진이 설계되어 있었으니까요.”

“그들의 종족이라면…….”

루헤가 고개를 끄덕이며 또다시 창문 밖의 얀피르에게 시선을 던졌다.

“드래곤.”

이게 다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얀피르가 그 안에 들어갔었다는 거야?

대체 왜?

정말 루헤의 말대로, 마력구를 가지러?

산수이의 머릿속에, 일전에 얀피르가 했던 말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이런 허접한 마법 도구로 드래곤을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정말로 얀피르가 그 마력구를 훔쳐 간 건가? 여태껏 기억이 안 나는 척, 자신을 속여가면서까지?

산수이의 복잡한 머릿속에 수많은 의문이 생겨났다.

그러나 그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은 결국 한가지였다.

‘나는 얀피르를 믿어.’

얀피르가 자신을 속였을 리 없다. 분명 뭔가 사정이 있을 거야.

그가 직접 하는 말만 믿겠다고, 산수이는 결심했다.

산수이의 표정을 본 루헤가 그녀의 마음을 읽었다는 듯 끄덕였다.

“저자를 믿는군요.”

“그래요. 저는 얀피르를 믿어요. 루헤의 말이 사실이라 해도, 분명 무슨 사정이 있었을 거예요.”

“……그렇다면 악역은 내가 대신 맡아 주는 수밖에.”

“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루헤는 검은 연기가 되어 산수이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는 곧바로 저택 밖의 얀피르 앞에서 다시 현신했다.

“드래곤.”

루헤가 얀피르의 앞에 가볍게 착지하며 그를 불렀다.

그러나 얀피르는 이미 그가 자신을 찾아올 거라 예상했다는 듯,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루헤를 맞이했다.

“왔구나, 마족.”

***

그렇게 산수이는 두 남자와 함께 응접실에 모였다.

서로를 대치하고 선 얀피르와 루헤의 사이에서, 산수이는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사이 루헤가 먼저 얀피르를 향해 말했다.

“아까 그 태도는…… 마치 제가 당신을 찾아갈 거란 걸 이미 알고 있던 눈치 같던데요.”

“아아, 그야 당연한 거 아니야?”

얀피르가 코웃음을 쳤다.

“아시다시피 우리 종족이 귀가 좀 좋아야지.”

“……!”

그 말과 함께 얀피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산수이에게 다가가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주인, 너 아까 저 마족 놈한테 나 믿는다고 하더라?”

“그……! 너 밖에서 다 듣고 있었던 거야?”

얀피르가 제 볼을 산수이의 뺨에 연신 비벼대며 실실 쪼갰다.

“진짜 너무 좋아, 주인.”

“얀피르!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고. 게다가 보는 눈도 있는데 좀…….”

쨍그랑-!

그때 갑자기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산수이와 얀피르가 고개를 돌려보니, 루헤의 손에 들려있던 찻잔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루헤가 손가락을 튕겨 찻잔을 다시 원래의 형태로 되돌려놓고는 싱긋 웃었다.

“일단 하던 얘기부터 마저 하죠, 드래곤?”

한숨을 내쉰 얀피르가 산수이에게서 떨어져 제 자리에 풀썩 앉았다.

“알았어, 알았다고.”

얀피르는 자신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루헤를 향해 입을 열었다.

“우선 네놈이 말하는 마력구라는 거, 난 본 적도 없어.”

그러자 루헤가 코웃음을 쳤다.

“설마 그곳에 있던 드래곤의 마법진까지 모른다고 할 생각은 아니겠죠?”

“응, 모르는데.”

“하아. 이봐요, 드래곤.”

골치 아프다는 표정의 루헤를 향해, 얀피르가 외쳤다.

“정말 모르는데 어떻게 해? 게다가 드래곤만 출입이 가능한 마법진이라니, 그게 뭔지 오히려 내가 네놈에게 묻고 싶은 심정이라고.”

“그럼 그 안에서 당신의 냄새가 진동하는 건 어떻게 설명할 건가요?”

“대체 거기가 어딘데? 어디서 내 냄새가 난다는 거야?”

“이곳 비덴비덴 남작령의 비덴산, 숲속 한가운데 있는 땅굴 속.”

“……!”

순간 그 말을 들은 얀피르의 표정이 묘하게 흔들렸다.

루헤는 그 순간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역시, 아는 게 있는 모양이군요.”

하지만 얀피르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얀피르의 반응에 산수이 역시 적잖이 놀란 표정이었다.

“얀피르……?”

그때였다.

바깥에서 무언가 세차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파닥파닥—

쿵!

그들이 고개를 돌려 바라본 곳엔, 박쥐 모습의 휴와 듀가 유리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마왕님-!”

“급해, 열어줘!”

산수이가 놀라 소리쳤다.

“어? 꼬마 박쥐들?”

산수이는 창문을 열어 그들을 안으로 들여보내 줬다.

거센 숨을 몰아쉬던 두 꼬마 박쥐는, 곧장 루헤에게로 날아가 그의 머리 근처에서 정신없이 파닥거렸다.

“너무 길었어, 마왕님. 인간 세상 여행!”

“그가 마왕님 찾고 있다, 큰일!”

그 말을 들은 루헤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다.

그가 귀찮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루헤가 얀피르를 향해 경고하듯 말했다.

“나머지 이야기는 마계에 다녀온 후 듣도록 하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루헤는 곧바로 산수이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등에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금방 다녀올게요, 수이.”

“무슨 일이 생긴 거예요?”

“네, 여기서 더 자리를 비웠다간…….”

하지만 그는 뒷말을 삼키곤 말을 돌렸다.

“내가 전에 수이에게 입혀줬던 로브, 아직 가지고 있죠?”

“네. 남작저로 텔레포트할 때 저한테 입혀주셨던 그 검은색 로브 말이죠?”

루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로브만 입으면 한 번 가 봤던 곳은 어디라도 이동할 수 있어요.”

“……!”

“만일 내가 없을 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걸 사용해요, 수이.”

옆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얀피르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내가 주인의 옆에 있는데 대체 무슨 일이 생긴다는 거야, 마족.”

하지만 루헤는 그를 못 미덥다는 듯 바라보다, 산수이를 향해 마지막 말을 전했다.

“로브를 작동시키는 주문은 간단해요. 바로…….”

소곤소곤.

그가 산수이의 귀에 무언가 작게 속삭인 후, 예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주문을 들은 산수이는 적잖이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

“무, 무슨 주문이 그래요? 저기요, 루헤?!”

산수이가 그를 향해 다급히 소리쳤다.

하지만 그는 이미 검은 연기와 함께 꼬마 박쥐들을 데리고 허공 속으로 사라진 후였다.

***

얀피르와 단둘이 남은 산수이.

그녀는 얀피르에게 여태껏 있었던 마력구와 관련된 일들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산수이의 말을 듣던 얀피르의 얼굴이 점점 굳어져갔다.

“그동안 온천수가 끊겨서 주인과 영지민들이 고생하던 게 모두, 그 마력구라는 게 사라졌기 때문이었다고?”

“응.”

“게다가 드래곤만 출입할 수 있는 마법진이라.”

얀피르는 길게 고민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지금 당장 가보면 되겠네.”

“얀피르 너, 거기가 어딘 줄 정말 아는 거야?”

“……응.”

잠시 망설이던 얀피르가 입을 열었다.

“거기, 내가 맨 처음 깨어났던 곳인 것 같거든.”

그랬다.

몇 해 전, 그가 처음 눈을 뜬 곳.

기억이 끊겨 모든 게 다 기억나진 않지만.

분명 자신의 첫 기억은 거기서부터였다.

땅속에서 힘겹게 기어 올라와 마침내 처음으로 태양을 만끽하던 바로 그 곳.

“내 냄새가 배어있다면 틀림없어. 바로 거기일 거야.”

그곳은 이상할 정도로 인적이 드물었으니까.

게다가 배가 고파 마을로 내려오다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이.

바로 이곳, 비덴비덴 남작가의 저택이었다.

그러니 분명 자신이 생각하는 그곳이 맞을 터였다.

“하지만 얀피르, 혼자 가는 건 위험해. 그 안에 뭐가 있을 줄 알고.”

산수이가 그를 말렸지만, 얀피르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마, 주인. 내가 원래부터 있던 곳인데 뭐가 위험하겠어? 그리고 거길 다시 가 봐야 네가 찾는 그 마력구라는 것의 행방을 알 수 있잖아.”

“그럴 거면 나도 같이 가. 아니, 아예 조사 팀을 꾸려서 같이 가자!”

그 말에 얀피르가 피식 웃었다.

“마법진이 그려져 있다는데 어떻게 들어가게? 주인 너도 알잖아, 거긴 나밖에 못 들어가.”

그리고 나도 이젠 알아야겠어.

도대체 내가 왜 그곳에서 깨어난 건지. 산수이가 찾는 마력구가 어째서 거기에 있다 사라진 건지.

그리고…….

자신은 누구이며, 자신이 잃어버린 기억 속 진실은 대체 무엇인지를.

얀피르가 산수이의 뺨을 어루만졌다.

“금방 다녀올 테니까, 주인은 여기서 쉬고 있어.”

“조심해서 다녀와야 해……?”

“걱정하지 마, 주인. 네 드래곤은 그렇게 약하지 않다고.”

산수이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 얀피르는, 다시 작은 드래곤의 모습으로 돌아가, 깊은 산속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약속과는 달리, 다음 날이 되도록 그는 남작저로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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