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며칠 후, 산수이는 응접실에서 루헤와 단둘이 마주하고 있었다.
드디어 그 이야기를 듣게 될 터였다.
대체 왜 이 비덴비덴 남작령에서 온천수가 고갈된 것인지.
‘드디어 알게 되는 거야. 제국의 학자들도 알아내지 못한 온천수 고갈의 진짜 원인을. 이제 그것만 해결하면 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어.’
산수이는 떨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제 금방이다. 이제 정말…….
마침내 그녀를 향해 루헤가 입을 열었다.
“인간들이 온천수 고갈의 원인을 못 찾았을 만했더군요.”
“왜요?”
“비덴비덴의 온천수는, 애초에 마력으로 만들어진 것이었으니까요.”
“네?”
마력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그렇다면 이 남작령에 마법사가 존재하기라도 했었단 말인가?
루헤는 그런 산수이의 심중을 읽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 마법사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아요.”
“그럼 그 온천수는 대체?”
“마력구.”
“마력…… 구요?”
“그래요. 이 남작령 지하에서 마력구가 사용되었던 흔적이 발견됐어요.”
마력구.
마력이 응축되어있는 구 형태의 마도구로, 마법 시전자가 존재하지 않아도 스스로 마력을 방출해낼 수 있는 물체.
루헤가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갔다.
“마력구에서 흘러나온 마력이, 비덴비덴 남작령의 지하수를 끓여 온천수로 만들었던 것 같더군요.”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문제의 원인을 찾은 것이다.
한마디로 그 마력구인지 뭔지를 찾아내 지하수를 다시 끓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 아닌가.
“그래서 그 마력구는 지금 어떻게 된 거예요, 루헤? 고장 났나요? 마력을 다 썼나? 어떻게 하면 다시 온천수가 나오게 할 수 있어요?”
“그게…….”
루헤가 잠시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사라졌어요.”
“네?”
비덴비덴 남작령의 온천수가 마력구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도 이미 놀라웠는데.
‘그런데, 사라졌다고……?’
산수이는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먼저, 누가 이 남작령의 지하 깊숙한 곳에 마력구를 가져다 둔 거지? 대체 언제? 왜?
‘비덴비덴 남작은 알고 있었나?’
아니, 그랬을 리가 없다.
그랬다면 제국의 학자들을 불러 모아 조사를 시키진 않았겠지.
수상한 마력구가 땅속에서 발견되었다면, 이상한 오해를 사기 십상이었을 테니까.
‘아니면 그냥 아주 오래전부터 땅속에 묻혀있던, 고대 유물일 수도 있잖아?’
그럼 왜 이제 와서 그 마력구란 게 갑자기 사라진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명쾌한 답이 나오질 않았다.
산수이가 다급하게 되물었다.
“그 마력구는 지금 어디에 있죠?”
“거기까지는.”
루헤가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수이가 제게 부탁한 일의 범위 밖이네요.”
차갑게도 선을 딱 그어버리는 루헤를 보며, 산수이가 간절한 눈빛으로 애원했다.
“루헤, 죄송하지만 한 번만 더 알아봐 주시면 안 돼요?”
루헤가 길게 하품하며 말했다.
“흐아암…….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죠, 수이?”
누가 마족 아니랄까 봐.
“어떻게 하면 다시 알아봐 주실 거예요? 아! 또 무료 세신 서비스해드릴까요?”
이제 어느 정도의 손해에 대해선 면역이 생긴 산수이였다.
하지만 루헤는 고개를 저었다.
“이젠 그것 갖곤 안 되죠, 수이.”
몸을 일으킨 그가 제 얼굴을 산수이에게 불쑥 들이밀었다.
“왜, 왜 이래요.”
루헤는 당황한 산수이를 향해 자신의 볼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알잖아요, 수이. 내가 뭘 원하는지.”
싱긋 지어 보이는 천상의 미소도 잊지 않으면서.
***
하마터면 루헤의 정강이를 걷어찰 뻔했다.
‘인류를 위기에 빠트릴 뻔했어. 어떻게 된 게 그저 뽀뽀할 생각밖에 없냐고!’
됐다, 때려치워.
억지로 뽀뽀를 하느니 그냥 직접 발로 뛰겠어.
“일단은 사건 현장을 조사하는 게 우선이지.”
그녀는 커다란 주머니를 가져와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 마력구라는 게 땅속에 파묻혀 있었다고 했지? 그럼 필요한 게 삽이랑, 곡괭이. 또…….”
혼자서 삽질할 준비를 마치고 작업복까지 입고 방을 나서려던 산수이의 앞에, 아지랑이 같은 환영이 나타났다.
곧이어 그 안에서 루헤가 모습을 드러냈다.
“루헤?!”
“하아…… 내 이럴 줄 알았지.”
허공에서 나타난 그가 산수이의 앞에 가볍게 착지했다.
그녀의 손에 들린 각종 땅 파는 도구들을 보며, 루헤가 혀를 찼다.
“고작 볼 뽀뽀가 그렇게 힘든가? 키스라도 해 달라고 했으면 진짜로 정강이를 맞았겠는데요.”
“누, 누가 대가로 뽀뽀를 해요! 그리고 키스라니, 이분이 진짜!”
“아, 그럼 마음에 우러나서 하는 건 괜찮다?”
루헤가 싱긋 웃었다.
“그럼 내가 수이를 도와주면, 먼저 입을 맞춰 주려나?”
그는 손가락을 한번 튕겨, 산수이가 손에 들고 있던 것들을 모조리 제자리로 옮겨놓았다.
“이런 게 왜 필요하겠어요, 수이. 당신 옆에 대마왕이 있는데.”
***
그렇게 산수이는 루헤의 품에 안긴 채 마력구가 존재했었다는 곳으로 텔레포트했다.
그곳은 남작저 뒤편에 자리한 비덴산의 한가운데였다.
산 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하늘 위에서, 산수이는 루헤의 목을 꽉 끌어안은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왜 그동안은 아무도 마력구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던 걸까요?”
오랜 시간 동안 남작령의 산속 한가운데 존재하고 있었다는데 말이다.
“그야.”
루헤 역시 발아래를 살피며 말했다.
“이 주변에 결계가 쳐져 있었기 때문이죠.”
“결계요?”
“네. 지금은 사라졌지만.”
루헤가 허공을 향해 손짓하자, 그들 앞으로 희미한 붉은 안개가 일렁이다 사라졌다.
“어떤 놈인진 몰라도, 촘촘하게도 짜 놨었네요.”
“그럼 지금은 다 사라진 거예요?”
루헤가 끄덕였다.
“이젠 저도 흥미가 생길 지경이에요.”
마계에서 가장 강한 마력을 지닌 자신조차 찾아내지 못했던 결계가 존재했었다니.
대관절 그 마력구가 뭐기에, 이토록 감쪽같이 숨어 있다가 다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것인가.
그 역시도 여간 궁금한 게 아니었다.
루헤는 잠시 동안 마력으로 주변을 탐색했다.
“역시 이곳엔 아무것도 남아있질 않아요, 수이.”
“조금만 더 살펴보면 안 돼요? 어떤 단서가 남아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냥 제국 전체에 내 수하들을 풀어서 찾는 게 빠를 거라니까요.”
“제국 하늘 위에 마족들이 한가득 날아다니게 하자고요? 절대 안 돼요!”
“이거 봐, 또 종족 차별.”
루헤가 낮게 혀를 쯧 차며 물었다.
“수이가 지금 의지하고 있는 게 누군지 잊었어요? 나도 마족이라고요.”
“그렇지만.”
산수이가 루헤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루헤는 믿으라면서요.”
순간 그 말에 여태껏 평정을 유지하던 루헤의 표정이 변했다.
그의 핏기 없는 새하얀 얼굴에 살짝 분홍빛이 돌았지만, 그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며 말했다.
“……마족을 그렇게 함부로 믿으면 안 돼요, 수이.”
“네?! 아니, 언제는 종족 차별하지 말라면서요!”
어이없어하는 산수이를 향해, 루헤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튼, 안 돼요. 아주 위험한 놈들이니까.”
허.
한 입으로 두말한다는 게 바로 이런 경우지?
산수이가 빈정대며 물었다.
“그럼 루헤도 위험하단 소리겠네요?”
그 말을 들은 루헤가 산수이를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산수이의 귀에 대고 차갑게 속삭였다.
“글쎄…… 어떨까?”
사아아—
갑자기 그들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분명 루헤의 눈과 입은 웃고 있는데, 그를 둘러싼 공기가 달라졌다.
‘뭐, 뭐야. 루헤 표정이…….’
갑자기 서늘하게 변해버린 분위기에, 산수이가 당황하며 말을 돌렸다.
“루헤. 팔 아프지 않아요? 저 이제 내려주셔도 되는데.”
“…….”
하지만 그는 말이 없었다.
산수이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점점 더 짙은 핏빛으로 물들어갔다.
‘내가 명하노니…….’
루헤는 자신도 모르는 새 속으로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너는 나만을 위해서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 생도, 그 죽음도, 오로지 나 루헤…….’
그의 무의식은 어느새 빠르게 주문을 읊어나가, 마지막 구절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찰싹-!
하지만 그의 주문이 완성되기 직전, 산수이가 손바닥으로 그의 가슴팍을 때렸다.
“아 내려달라니까!”
그제야 루헤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제길, 하마터면 미혹술을 쓸 뻔했어…….’
그는 제 품 안의 이 작은 인간을 바라보았다.
마음만 먹으면 한 손으로라도 숨줄을 끊어놓을 수 있을 만큼, 여리고 여린 작은 인간.
하지만 그녀가 이태리타월을 손에 끼고 저를 밀어주던 그 순간부터, 이 작은 인간은 제 모든 걸 붙잡고 흔들어대고 있었다.
‘세상 모든 게 귀찮던 내가, 너 때문에 이 먼 곳까지 날아왔어.’
죽일까.
유혹할까.
아니면 이대로 그냥 마계로 데려가 영원히 내 것으로 만들까.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산수이의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이 고민은 항상 오래지 않아 끝이 났다.
네가 나를 바라보는 인간의 눈빛을 잃고 싶지 않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둘러싼 한기를 거둔 채, 지상으로 내려와 그녀를 향해 장난스럽게 말했다.
“인간의 육체는 연약하잖아요, 수이. 나한테 편하게 올라타 있어요. 내 다리가 수이 다리다, 생각하면서.”
아악 진짜!
올라타긴 뭘 올라타! 네 다리가 왜 내 다리야!
정말 말 한마디를 해도 왜 꼭 저렇게 변태같이 하는 거야, 저런 천사의 얼굴을 하고서!
하지만 그녀가 속으로 구시렁거리던 것도 잠시.
그녀를 안고 걸어가던 루헤가 갑자기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루헤? 왜 그래요?”
“…….”
하지만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산수이가 고개를 돌려 루헤의 시선을 따라 내려다본 곳엔.
작은 동물 하나가 겨우 들어갈 만한 크기의 땅굴이 파여 있었다.
“이걸로 명확해졌네요.”
루헤가 말했다.
“누군가 땅을 파서 마력구를 가져갔어요.”
그리고 잠시 후.
“수이, 미쳤어요?”
땅굴 속으로 얼굴을 쑥 들이미는 산수이를 보고 루헤는 경악했다.
그가 손가락을 튕겨 산수이를 허공 위로 끌어올렸다.
“아악! 방해하지 말고 놔 주세요!”
“그 안에서 뭐가 튀어나올 줄 알고 이렇게 겁 없이 구는 거예요?”
“하지만……!”
산수이는 아쉬운 듯 자꾸만 그 땅굴을 돌아보았다.
그런 산수이를 바라보던 루헤는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수이.”
“네?”
“왜 이 문제에 그렇게까지 집착하는 거예요?”
그가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산수이에게 다가가, 차가운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혹시 나에게 말하지 않은 뭔가가 있나요?”
산수이가 당황하며 고개를 돌렸다.
“이, 있긴 뭐가 있어요! 전 그저, 이 남작령에 다시 온천수가 나왔으면 하는 것뿐이에요.”
“흐음.”
그가 손가락을 튕겨 산수이를 다시 지상으로 내려주었다.
그러고는 제가 두르고 있던 검은 로브를 벗어, 그녀를 머리부터 감싸주었다.
“이렇게 하죠. 내가 대신 땅굴 속으로 내려가 볼 테니, 수이는 저택으로 돌아가 있어요.”
“저도 같이 갈래요.”
“저 밑에 들어갔다 매장당해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냥 내 말 들어요.”
맞는 말이긴 했다.
무슨 두더지도 아니고, 인간인 제가 저길 어떻게 들어갈 수 있겠는가.
“대신 나하고 하나만 약속해요, 수이.”
“무슨 약속요?”
“저 아래에도 아무런 단서가 남아 있지 않다면, 그냥 내 말을 듣기로.”
그 말인즉슨.
“내 수하들을 부르든지, 그게 싫으면 그냥 깔끔하게 포기해요, 수이.”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알겠어요.”
산수이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조심해야 해요, 루헤. 다치지 않게.”
그 말에 루헤가 작게 쿡쿡 웃었다.
“몇백 년을 사는 동안, 나에게 다치지 말라고 한 건 아마 당신이 처음일 거예요.”
그리고 이어지는 루헤의 손가락 튕기는 소리와 함께, 산수이의 눈앞이 암전되었고.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어느새 남작저의 응접실로 되돌아와 있었다.
‘이젠 루헤를 믿고 기다리는 수밖엔 없겠네.’
그렇게 생각하며 산수이는 응접실 소파에 앉아 그가 마력구를 되찾아 돌아오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