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비덴탕의 딸기 시식회가 있기 하루 전날.
산수이가 옆에서 지켜본 결과, 얀피르의 상태는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었다.
이제는 딸기 비슷한 것만 봐도 현기증을 느끼는 것같이 보였다.
프리트에게서 전해 들은 휘온의 상태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얀피르랑 휘온한테는 딸기 시식을 시키면 안 되겠어. 대신 루헤한테 부탁해보자.’
그렇게 산수이는 루헤가 머물고 있는 방으로 찾아갔다.
루헤가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반겼다.
“온천수 얘기를 들으러 온 건가요, 수이?”
“으음…… 그것도 중요하지만 당장 더 급한 문제가 생겼어요, 루헤.”
산수이는 루헤에게 지금의 상황을 대충 설명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루헤가 대신 딸기 디저트 맛을 봐 줬으면 좋겠어요. 이번 이벤트, 정말 중요하거든요. 다양한 배경의 참가자가 필요해요.”
하지만 루헤는 그게 아니라는 듯 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흐음, 수이. 방법이 틀렸어요.”
“틀리다뇨?”
“수이가 정말로 원하는 건, 그 둘의 상태가 나아지는 것이잖아요?”
그 말을 듣자 산수이의 어깨가 축 처졌다.
“사실…… 네, 그래요. 두 사람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다시 딸기를 먹을 수 있게 됐으면 좋겠어요.”
“그렇다면 더더욱 딸기를 회피하게 해서는 안 되죠.”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데요?”
루헤가 새빨간 눈을 빛내며 씩 미소 지었다.
“고통을 주는 존재와 직면하게 해야죠.”
이른바 지속적 노출 치료 요법이었다.
산수이는 무릎을 탁 쳤다.
‘그래, 원래 세계에서도 들어본 적 있어. 트라우마를 일으킨 대상을 지속적으로 노출시키면, 공포심이 점차 둔감해진다고!’
루헤가 심리학에도 능했을 줄이야!
대마왕이라더니 내어놓는 해결 방법 또한 기가 막혔다.
하지만 루헤의 속마음은 전연 다른 것이었다.
‘이렇게 하는 편이 더 재미있을 것 같으니까요, 후후.’
그가 산수이를 향해 말없이 배시시 웃었다.
그렇게.
죽음의 딸기 시식회에는 결국 네 남자 모두가 참석하게 되었다.
기다란 티 테이블에는 산수이가 미리 배치해둔 대로 프리트, 얀피르, 휘온, 그리고 루헤의 순서대로 앉게 되었고.
그 앞으로는 딸기로 만든 각종 음식들이 즐비하게 놓여있었다.
딸기 잼, 딸기 케이크, 딸기 마카롱, 딸기 쿠키, 딸기 덮밥…….
그 음식들을 보고 프리트가 혀를 끌끌 찼다.
“이건 정말…… 너무했는데, 남작.”
“어떤 점이 말씀이세요, 저하?”
그가 검지를 까딱까딱하며 말했다.
“가장 중요한 딸기주스가 빠졌잖아.”
“어머, 내 정신 좀 봐. 제일 중요한 걸! 금방 가져오라 이를게요!”
휘온은 진심으로 자신의 주군을 그냥 한 대 치고 옥살이를 할까 고민해보았다.
얀피르 역시 산수이를 향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주인, 도와주려는 거야……, 아니면 놀리는 거야?”
옆에서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루헤는 웃음이 나올 뻔한 것을 간신히 참으며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다.
산수이가 얀피르를 향해 섭섭한 표정으로 답했다.
“놀리다니, 절대 그런 거 아냐. 난 그저 두 사람을 딸기 트라우마로부터 치료해 주려는 거라고.”
“트라우…… 뭐?”
그때, 코 안을 가득 채우는 딸기향에 얀피르는 그만 참지 못하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우욱-!”
그 소리를 들은 휘온 역시 얼굴이 새파래지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치료되긴커녕 상태가 더 나빠진 두 사람을 보며 산수이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어, 이게 아닌데?’
그런 산수이를 바라보는 루헤의 얼굴도 굳어갔다.
‘하암……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지만 하는 수 없네요. 수이가 눈치채면 곤란하니.’
테이블 아래로 몰래 손을 내린 그가 탁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치유 마법이었다.
순간 얀피르와 휘온의 몸에서 구토감이 싹 사라졌다.
그렇게나 역하던 딸기 냄새도 다시 향긋하게 느껴졌다.
“어……?”
“갑자기 몸이…… 가벼워졌어.”
두 남자는 멀쩡한 모습으로 착석해 딸기를 베어 물었다.
산수이가 기쁨에 가득 찬 표정으로 루헤를 돌아보았다.
‘루헤 말이 맞았어요!’
자신을 향해 행복하게 웃어 보이는 산수이를 향해, 루헤 역시도 세상 예쁜 미소로 답해주었다.
***
시식회 도중 갑작스럽게 찾아온 고객님 때문에 산수이는 잠시 자리를 비워야 했다.
그렇게 남작저 정원의 딸기 테이블에는 오직 네 남자만이 남게 됐다.
그들 사이에 잠시간 썰렁한 공기가 흘렀다.
휭—
가장 먼저 침묵을 깬 것은 프리트였다.
“이봐, 마왕.”
“…….”
침묵으로 일관하는 루헤를 향해, 프리트가 성난 듯 물었다.
“그날, 감히 누구 허락으로 무도회에 참석한 거지? 마계의 왕께서는 예의라는 것도 모르나?”
너 때문에 그날 산통이 깨졌잖아!
“……흐아암.”
루헤는 대답 대신 하늘을 향해 손바닥을 펴 보였다.
곧이어 검은 연기와 함께 황실 무도회 초대장이 그의 손바닥 위로 툭 떨어졌다.
그가 나른한 표정으로 프리트를 향해 답했다.
“이렇게요.”
루헤의 손에는 검은 연기가 채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었다.
프리트가 분노에 서린 눈빛으로 자리를 박차며 일어나 외쳤다.
“흐, 흑마법? 이 마왕 놈, 감히 황실을 능멸해?!”
하지만 그 옆에 앉아있던 얀피르가 그를 저지했다.
“참아, 저하야. 알고 보면 쟤도 불쌍한 놈이야.”
“뭐?”
얀피르의 말에 여태껏 표정 변화 없던 루헤의 눈썹이 살짝 떨렸다.
“대체 저놈의 무엇이 불쌍하다는 거지, 드래곤?”
그 말에 얀피르가 루헤를 향해 정말 안쓰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이, 마족.”
“……?”
“너도 주인 좋아하지?”
잠시간의 침묵 끝에 루헤가 입을 열었다.
“……수이를 말하는 거라면. 네, 그래요. 그 인간에게 흥미가 있죠.”
“흥미 같은 소리 하네. 고작 그깟 마음으로 주인의 심부름을 하고 다녔을 리는 없잖아?”
그 말에 루헤의 미간이 구겨졌다.
“전 그저 수이의 소원을 들어준 것입니다만.”
“그래봤자 어차피 주인이 좋아하는 건 네가 아니야, 마족. 헛고생하는 게 안쓰러워서 말해준다.”
그 말에 세 남자의 시선이 일제히 얀피르에게로 쏠렸다.
“그게 무슨 말이냐, 드래곤!”
“사, 산수이가 누굴 좋아하는지 알고 있는 거냐, 얀피르?”
“……!”
세 남자는 어서 말해보라는 표정으로 그를 재촉했다.
얀피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아, 이 바보들아. 주인이 좋아하는 건.”
설마 얀피르 자신이라 답하는 건 아니겠지?
뜸 들이지 말고 어서 말하라고!
세 남자는 애간장이 다 녹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곧이어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주인공은.
“……때밀이래.”
뭐?
이 무슨 지나가던 개도 알 만한 이야기인가.
“산수이가 때밀이를 좋아하는 건 당연한 거잖아!”
하지만 그런 냉랭한 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얀피르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자기는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고, 목욕탕하고 때밀이랑 결혼한 몸이래. 다들 알겠어? 우리는 주인한테 때만도 못한 존재들이라고.”
“아니, 그래도 더러운 때보다는 우리가…….”
“휘온, 그만.”
서글픈 침묵이 흘렀다.
속이 탔던 네 남자는 티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딸기 주스를 단숨에 들이켰다.
벌컥벌컥.
탁-!
프리트가 입가에 묻은 딸기 주스를 손으로 거칠게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난 포기하지 않겠다. 그녀를 반드시 황태자비로 맞이하겠어.”
얀피르 역시 그르렁대며 맞받아쳤다.
“웃기지 마. 주인은 내가 먼저 침 발라뒀어.”
휘온이 냅킨을 집어들어 자신의 윗입술에 묻은 분홍색 딸기 거품을 조심스레 닦아내며 말했다.
“그녀만큼은 저도 양보할 수 없습니다.”
그런 세 남자를 바라보며, 루헤는 그저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냥 오늘 당장 수이를 마계로 데려가 버릴까 봐요…….’
잠시간 네 남자 사이에 침묵이 흐르다, 프리트가 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다들, 나머지 얘기는 ‘그곳’에 가서 하는 게 어때?”
***
비덴탕 안.
네 남자는 노천탕에 동그랗게 모여앉아 몸을 지졌다.
한동안의 노곤함이 이어지다, 얀피르가 루헤에게 물었다.
“그래서, 이 남작령에 온천수가 고갈된 원인은 찾은 거냐, 마족?”
그 물음에 휘온과 프리트 역시 놀라 돌아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지?”
“정말로 원인을 알아내신 겁니까, 루헤 님?”
하지만 루헤는 그저 뜻 모를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프리트가 답답한 듯 되물었다.
“어서 대답해, 이 자식아!”
“그건.”
루헤가 크게 하품했다.
“수이한테만 알려 줄 건데요.”
분개하는 프리트의 뒤로, 얀피르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어쨌든 이유를 찾긴 찾았다는 거네. 그러면 됐어.”
얀피르는 루헤에게서 고개를 돌려 물 안으로 깊이 들어갔다.
프리트가 루헤를 향해 중얼거렸다.
“사우나스의 정체도 알고 있더니…… 네놈의 정보력도 정말 보통이 아니군, 마왕.”
“어라? 이제 절 인정해 주시는 건가요, 인간의 황태자?”
“그럴 리가.”
“칭찬으로 들을게요.”
“귓구멍이 막혔어, 마왕? 아니라니까?”
프리트를 향해 호호 웃고 있는 루헤를 향해, 이번에는 휘온이 질문을 던졌다.
“온천수 고갈의 원인을 찾으셨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으시겠군요?”
“음…… 그건, 수이한테 달려있겠죠?”
“예?”
루헤는 대답 대신 싱긋 웃더니 곧바로 화제를 돌려버렸다.
“그런데, 두 분은 대체 어쩌다가 입을 맞추신 거예요?”
“!”
잊고 있었던 아픈 기억에 소금을 뿌리자, 얀피르와 휘온이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거렸다.
하지만 루헤는 그런 반응일랑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가 계속해서 예쁘게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정말이지, 너무 궁금해서 이 제가 잠을 한숨도 못 잘 정도였다니까요?”
얀피르가 받아쳤다.
“그럼 지금이라도 물속에 들어가서 처자라, 마족.”
“설마, 공작에게 드래곤의 비늘까지 줘 버린 건 아니죠?”
그렇게 말하며 루헤가 쿡쿡 웃었다.
그런데.
얀피르의 얼굴에 서린 찰나의 표정을 루헤가 보고 말았다.
그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드래곤 당신 설마…….”
루헤가 서늘한 목소리로 얀피르를 노려보았다.
“비늘을 벌써 줬군요? 수이한테.”
얀피르가 루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당당하게 내뱉었다.
“그래.”
“수이가 받아들이던가요?”
하지만 얀피르는 말이 없었다.
그의 표정에서 대답을 읽어낸 루헤가 어이없다는 듯 내뱉었다.
“미쳤군요, 그런 무모한 짓을…….”
그때, 갑자기 둘 사이로 프리트가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왜, 마왕 네놈도 드래곤의 비늘이 갖고 싶냐?”
“네?”
순간 루헤의 포커페이스가 무너져내렸다.
그는 정말로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는 얀피르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표정에 담긴 의미를 알 길 없던 프리트가 얀피르를 향해 외쳤다.
“어이 드래곤, 혹시라도 이놈한테 먼저 주려는 건 아니지? 그럼 정말 실망이다.”
“?”
루헤가 황당한 표정으로 두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때, 뒤에서 사색이 된 휘온이 프리트를 향해 다가왔다.
“저, 저하? 혹시 얀피르에게 드래곤의 비늘을 달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기왕이면 몸에 지니고 다니기 좋도록 반지로 만들어 달라고 했었는데 이놈이 거절했어.”
프리트가 제 손가락을 척 들어 보이며 말했다.
“황태자의 명을 우습게 아는 아주 건방진 놈이야.”
당황한 휘온이 프리트의 입을 틀어막으려 했다.
“저하, 잠시 저랑 얘기 좀…….”
“왜, 휘온 네놈도 얀피르 놈의 비늘이 가지고 싶은가 보지? 그러면 줄을 서라고. 일단 내가 먼저 받고 그다음이 마왕 놈, 맨 마지막이 휘온 너…….”
그때, 루헤가 참지 못하고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학! 아아, 정말이지!”
루헤는 눈물까지 흘리며 웃다 쓰러져 물속으로 꼬르륵 잠겨 들어갔다.
이를 본 프리트가 제 검지를 들어 올려 머리 옆 허공에 대고 빙 돌렸다.
“이 자식은 또 왜 이래? 미친 거 아냐?”
결국 휘온이 참지 못하고 프리트에게 진실을 터뜨리고 말았다.
“저하! 드래곤이 비늘을 준다는 건, 자신과 결혼해 달라는 뜻이라고요!”
뜻이라고요-라고요—
휘온의 말이 죽음의 메아리가 되어 프리트의 귀에 가서 꽂혔다.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진 그가 천천히 얀피르를 돌아보았다.
얀피르는 이제 다 체념했다는 표정으로 욕탕 모서리에 팔을 걸친 채, 프리트를 향해 한심하다는 듯 뇌까렸다.
“뭐, 왼손 약지에 끼워주면 되냐?”
“드래곤 너 이 자식아아아!”
프리트가 포효하는 소리가 온 건물에 울려 퍼졌다.